켈리 라이카트의 세계는 길 위를 유동해왔다. 인물들은 좀더 나은 환경을 찾아, 설령 그곳의 실체를 확신하지 못해도, 이미 길 위다. 일시적인 이탈(<초원의 강>(1994), <올드 조이>(2006), <어떤 여자들>(2016))이건, 필연적인 여정(<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이건 그 행로는 주로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은유가 아닌 현실 구조의 문제이면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적 초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심상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고독한 방랑은 대체로 덜 가진 자의 고된 몫이지만 그 과정은 해결을 도모하는 대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길의 시간에 머문다. 그 길의 현재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느린 호흡과 찬찬한 시선이 라이카트 세계의 육체적 리듬이자 태도다. 회한이나 향수, 낭만과 분노는 이 길의 속성과 거리가 멀다. 빈곤과 불안, 쓸쓸함을 피할 수 없으나 운이 좋으면 얼마간의 우정으로 지속할 길. 모호한 목적지를 향한 길의 현재성이 결국 죽음을 코앞에 둔다고 해도 라이카트는 그 끝을 두 친구가 긴 잠에 이른 광경으로 묵묵히 지켜보길 택한다(<퍼스트 카우>(2019)). 땅에 붙박인 집이 아니라, 사방이 트인 사막, 나무로 우거진 숲속, 황량한 고속도로, 돌무더기 터, 안팎의 구분이 허술한 오두막과 같은 지대에 라이카트의 인물들은 마음을 두거나 내몰린다. 굳이 인물의 내면을 들추지 않아도 그들이 응시하고 지나가고 살아내는 풍경이 이들 마음의 풍경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
라이카트의 여덟 번째 장편 <쇼잉 업>은 전작들과 사뭇 달라 보인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만큼 실내 공간에 많은 장면을 할애한 작품은 없다. 코로나 시국에 촬영되어 이동이 제한된 상황을 고려해도, 이는 라이카트의 세계에 일어난 작지 않은 변화다. 주인공 리지(미셸 윌리엄스)에게는 집이 있다. 월세를 내야 하고 당장 온수 시스템이 고장나 불편을 겪으며, 옆집 소음이 그대로 들려 성가시긴 하지만, 고양이와 단둘이 사는 집 차고에는 작업실도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리지에게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는 창작과 생산의 장소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 집은 그가 지키고 돌아오고자 하는 사적인 터전으로 그려진다. 집주인이자 예술학교 동료인 조(홍차우)의 거처는 리지의 집과 경제적 규모나 성격 면에서 차이를 보여도 이 영화의 또 다른 거점으로 자리한다.
리지와 조의 집과 작업실, 그리고 예술학교 내부, <쇼잉 업>의 정박지는 실내 공간이다. 그 공간들이 인물과 공동체를 설명하는 통로가 된다. 라이카트의 전작들에서 움직이는 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앞서 말했듯, 방랑과 이탈의 힘을 비추지만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특유의 정취로 빛나는 자동차 장면은 평온한 귀가의 동선에 더 가깝다. 적어도 여기서 ‘길’을 떠도는 일은 인물들을 사로잡거나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행위가 아니다. 리지는 아버지 집에 불쑥 찾아와 소파를 점령한 떠돌이 노부부를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 타인의 은밀한 공간을 무례하게 점유한 침입자 보듯 못마땅해한다.
길로 나서는 인물 대신, <쇼잉 업>에는 길 위의 동물, 비둘기가 있다. 그 낯선 동물이 리지의 집 안에 불현듯 들이닥친다.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동물은 줄곧 인간의 친숙한 동반자로 등장해왔다. 유일한 가족인 개, 부의 상징인 소, 마차 를 끄는 말 등 동물들은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에게 길들어진 존재지만 인간 곁에서 오히려 고유함을 발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부유층의 소유물인 젖소는 밤마다 몰래 자신에게서 우유를 짜는 가난한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데, 이 행위가 도둑질이나 착취가 아닌, 정당한 나눔 혹은 동물의 시혜로 보이는 건 전적으로 어둠 속 투명하게 빛나는 소의 깊은 눈망울 덕분이다. <어떤 여자들>에서 두 여자를 태우고 인적 없는 고요한 아스팔트를 걸어가는 말 한 마리의 자태는 그 순간을 피로한 현실에 스며든 깨고 싶지 않은 꿈결처럼 만든다. 무엇보다 라이카트에게 동물은 영화 전반의 리듬을 안팎으로 주관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는 동물과의 촬영이 “거리를 두고 조용히” , “동물 속도에 맞춰”(<Filo> 23호) 작업하는 일이라고 말해왔다. 효율성을 앞세운 인간 중심적인 현장의 속도보다 동물 저마다의 속도를 존중하는 과정은 라이카트가 타자의 시간을 받아들여 자신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방식이며 라이카트의 영화를 지탱하는 느린 호흡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는 동물의 야생성을 신비화하기보다 현장 안에서 동물과 협업하는 길, 인간사 한가운데서 동물과 접속하는 길을 고심한다.
<쇼잉 업> 속, 비둘기는 어떤가. 날지 못한 채 작은 상자에 웅크린 이 새는 운동성을 잃고 무력한 상태다. 비둘기는 서사 내에서 젖소, 개, 말과 같은 쓰임을 갖지 못한다. 이 새는 무용하다. 그렇다고 아름다운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여길 때조차 아름다움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어떤 동물보다 흔하게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나 인간과 정서적으로는 친밀하지 않은 새. <쇼잉 업> 역시 비둘기에게 허구의 개별성이나 특수성을 불어넣지 않는다. 젖소와 부엉이의 시선이 자아내던 낯선 생기(<퍼스트 카우>), 말의 육체성에 깃든 기품(<어떤 여자들>), 심지어 화면에서 사라진 개의 잔상이 안기는 애틋함(<웬디와 루시>) 같은 감흥조차 영화는 비둘기에게서 찾지 않는다. 새에게 단독 숏을 가끔 부여하지만 비둘기를, 정확히 말하자면 비둘기가 담긴 상자를 들여다보는 인물들의 시선과 행동에 더 초점을 둔다. 고통에 푸드덕대고 숨을 헐떡이는 비둘기의 모습은 이를 보는 리지의 난감한 얼굴로만 전해진다. 이 동물은 인간과의 소통, 감정 교류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비둘기는 완전한 수동성으로 ‘나’의 안온한 공간에 침입한 불청객이다.
수의사는 비둘기를 보며 말한다. “작업실이 새에게 최적의 장소는 아니죠.” 비둘기를 데려온 보호자 리지의 차고 작업실이 새가 머물기에는 온기가 부족하다는 조언이다. 그러니까 리지는 전작들의 인물처럼 “최적의 장소”를 찾아 미지의 여정으로 향하는 대신, 쇠약한 미지의 존재에게 최선의 임시 거처를 만들어줘야 하는 책임을 덜컥 떠안는다. 작은 박스, 온수 주머니, 깨끗한 종이, 시끄럽지 않은 환경. 이 검소한 조건을 시시각각 챙기며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일은, 그러나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가. 물론 이것이 어느 내향인이 어느 날 우연히 집에 날아든 상처 입은 비둘기를 보살피는 선한 이야기에 그친다면 이처럼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비둘기가 처음부터 리지의 환대를 받은 건 아니다. 비둘기가 리지의 집 안에 처음 출현한 밤, <쇼잉 업>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사건에서 일상으로, 되돌아온 비둘기
여느 평범한 밤처럼 리지가 잠을 청하는 침실의 느긋한 화면이 급변한 건,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공간을 덮치면서다. 이 힘이 침실 장면을 아래층 작업실의 소조 형상으로, 집 바깥의 소음과 빛을 경유해서 단숨에 이동시킨다. 영화가 그렇게 도달한 여성상에서 다시 고요한 침실로 돌아와 잠든 리지에게로 향하는 동안, 화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리지를 깨우는데, 소리의 근원지인 욕실에서는 리지의 고양이가 비둘기 한 마리를 공격하는 중이다. 그 광경에 소스라치며 고양이를 욕실에서 쫓은 리지는 그러나, 비둘기를 구하지 않고 자비 없이 창으로 내던진다. “다른 데 가서 죽으렴.”
침실에서 작업실로 이르게 하는 속도와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경이롭고도 일견 섬뜩한 이 움직임은 리지의 꿈 같기도 하고, 미완의 형상이 부린 마법 같기도 하다. 주목할 건 시공간의 이동과 사건의 발발을 압축 혹은 생략한 이 대목의 빠른 리듬을 일찍이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경험해본 적 없다는 점이다. 인물이 잠든 사이, 라이카트는 편집의 인위적인 힘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시공간을 뒤흔든다. 존재가 “공간을 통과해나가는 방식”(<Filo> 34호)을 통해 프레이밍을 결정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프레임의 구획을 거침없이 뭉개며 시간을 가속하고 공간을 단번에 이행하는 방식은 분명 낯선 것이다. 이 대목의 과감함은 그저 과장된 스타일이 아닐 것이다.
영화 도입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업하는 리지를 담던 카메라가 시선을 이동하면 셔터가 반 이상 내려진 차고 밖으로는 비둘기들이, 안으로는 리지의 작품들이 마치 각자의 세계에 속하듯 자리한다. 바깥을 향해 살짝 열린 문, 그러나 흐트러지지 않은 안과 밖의 경계가 이 장면을 평온하게 만든다. 경계 밖, 땅을 거니는 비둘기들의 모습은 예쁜 그림 같다. 리지의 공간이 지키고자 하는 타자와의 거리는 이 정도일 것이다. 떠돌이 여행자를 기꺼이 수용하는 아버지나 파티로 떠들썩한 조의 집이 보이는 개방성과 달리 리지의 집이 원하는 경계는 소박하지만, 완고하다.
영화는 대체로 리지의 입장에서 그 경계를 소중히 응시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엄격하게 닫힌 문이 아니라는 점 또한 시험해보려고 한다. 그 시도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앞선 침실 장면의 편집이 일으킨 느닷없는 진동은 그런 맥락에서 공간의 폐쇄성을 흔들어 차단막을 ‘영화적으로’ 무너뜨려보는 시도로 느껴도 될 것이다. 그 시도와 함께 비둘기는 더이상 ‘예쁜 그림’이 아닌 불편한 실체로 리지의 욕실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다음날 오전, 밝은 집 내부는 여느 날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이 공간에는 간밤의 요동이 남긴 다른 감각과 리듬의 잔상이 새겨져 있다. 이질적인 편집의 속도가 영화 외적인 시도라면, 서사 내부에서 그 역할은 리지의 작업실을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 조에게 맡겨진다. 리지가 창밖으로 던져버린 비둘기를 조가 다시 주워 천진한 표정으로 리지 앞에 들이민다. 종종 얄밉게 굴어도 조는 리지에게 꼭 필요한 친구다.
전날 밤 욕실에서 냉정하게 내쳐진 비둘기가 리지의 집에 회귀한다. 밤새 리지에게 대단한 각성이 일어났다고, 잠자던 죄의식과 연민이 그새 일어났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건 한밤의 해프닝이 나쁜 기억이 아니라, 이 아침, 구체적인 육체성이 되어 일상의 시간 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매일 해야만 하는 작업 활동, 매 끼니 챙겨줘야 하는 고양이 밥처럼 자주 들여다보고 보살펴야 하는 새의 다친 날개가 리지의 일과에 더해졌다는 사실이다. 별다 를 바 없어 보여도, 조금 확장된 일상의 토양. 이 ‘조금’은 사소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카트에게는 예술가의 거창한 기행이나 정신세계보다 그의 움직임의 지평, 하루를 살게 하는 노동의 지평을 수평적으로 넓히는 일이 더 뜻깊다.
한편의 영화에 일상의 시간 감각을 그대로 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일상을 압축적으로 극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상의 시간 감각을 새삼 일깨워볼 수는 있지 않은가. 다시 느껴 반응하기 위해서는 무감한 연결을 한번은 끊어내야 하지 않는가. 라이카트는 조심스레 묻고 대범하게 실행해본 것 같다. 리지의 침실 장면에서 인공성을 노출한 편집은 ‘일상의 시간 감각’을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깨워보려 감행한 운동일 것이다. 이 비상한 운동성은 리지가 소조 형상에서 축 늘어진 팔을 떼었다 모양을 구부려 다시 붙여 작은 차이로 역동성을 불어넣는 활동과 어딘지 닮아 보인다.
소란한 밤을 지나 이제 리지의 공간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비둘기가 치유되는 시간이 더불어 작동한다. 비둘기 침입 사건으로 화면에 순식간에 충격이 가해진 후, 영화는 무언가 완성되고, 무언가 회복되기까지 느리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시간의 힘으로 작은 관계들, 세계들을 이어 프레임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다. 물론 그 결과가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다림 끝에 가마에서 나온 여성상은 리지가 들인 공이 무색하게 한쪽 면이 그을린 상태로 실망을 안기지만, 실패한 모양새도 그런대로 시간의 과정을 품은 노동의 산물이 된다. 돌이켜보면 비둘기가 고양이에게 습격당한 밤, 침실에서 고속으로 작업실에 닿은 시선 끝에는 바로 이 형상이 아직은 찰흙 상태로 놓여 있었다. 미완성 찰흙 덩이와 다친 비둘기가 한집에서 기이하게 연결된 이래, 이 둘은 리지의 손길로 그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견뎌 영화 후반의 육체성에 도달한다. 이들의 영혼은 왠지 신묘하게 공명하는 것 같다.
비상, 착지, 해방
리지의 작업 과정을 세세히 지켜본 상자 속 비둘기는 이번에도 조에 의해 리지의 전시 공간에 들어선다. 조는 관람객으로서 이 새의 온당한 자격을 말한다. 자기만의 공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과 리지의 작업물과 동물이 한데 모인 결말부는 라이카트의 세계에서는 이례적인 결실의 장이다.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대목의 왁자지껄함은 긴장과 다툼과 어색함을 동반하지만, 그마저도 라이카트 영화가 줄곧 떨치지 못하던 외로움과 황량함을 잊게 하는 활기다. 무엇보다도 이 대목의 주인공은 어느새 붕대를 풀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날갯짓으로 비상하는 비둘기일 것이다. 처음에는 불청객으로, 그다음에는 불쌍하고 나약한 새로 시간 대부분을 상자에 가려진 채 영화 한구석에 존재하던 이 비둘기가 불시에 도약해 우리 모두를 그 순간을 우러러보는 구경꾼으로 만든다. 이 장면이 경이롭다면, 그저 기적 같은 광경을 선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더딘 속도로 회복에 이르는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인 육체의 결과를 그 비상이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 새는 어쩐 일인지 창공으로 향하지 않고 갤러리 바닥, 사람들 틈에 다시 내려앉는다. 모두가 고요하게 비둘기를 주시하던 그때, 리지의 오빠이자 광적인 예인 션(존 마가로)이 새를 들어 올려 문밖으로 날린다. 그제야 비둘기가 화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온전한 거처, 아마도 “최적의 장소”로 날아간 이 새의 움직임이 완전한 자력이 아닌 션의 손길에 힘입은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탄성을 내지르며 좇은 비둘기의 궤적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과 인간계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동물, 달리 말해, 환대받지 못한 두 존재가 이뤄낸 눈부신 협업으로 불릴 만하다. 리지와 조가 비둘기의 행로를 따라가듯 시선을 위로 두고 거리를 걷는 모습은 마치 둘의 시점숏처럼 나뭇가지와 전깃줄이 가로지르는 하늘로 이어지지만, 그 어디에도 새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새에 닿지 못하는 인간의 시야만 펼쳐 보이는 이 화면은 공허하지 않다. 이 새는 마침내 자신의 리듬을 되찾아 날아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던 새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으니, 비둘기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결말은 없을 것이다.
튼튼해진 새에게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이 사라질 기동력이 있으나, 날개 없는 인간에게 그런 해방의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를 함께 보살피고 떠나보낸 후 여전히 한 화면에 머무는 리지와 조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의 무탈한 풍경은 그 오후, 두 친구에게 허락된 ‘최선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영원하지는 않을지라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라고 <쇼잉 업>이 나지막하게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