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지니어스>
2017년 | 나타우트 폰피리야 |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 차논 산티네톤쿨, 이사야 호수완, 티라돈 수파펀핀요
<SKY 캐슬>의 신드롬적 인기를 보며 아… 역시 이 나라에서 입시 문제와 학구열은 잘 먹히는 소재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전에 <공부의 신> <강남엄마 따라잡기>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학업 성적이 뛰어난 소녀가 부잣집 자제들의 커닝을 돕고 대범하게 미국 대학 입학 시험까지 노리는 태국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소재 면에서 이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 원작은 명문 사립고 내의 계급 문제, 무한 입시 경쟁과 신자유주의를 날카롭게 해부하며 커닝 행위를 스릴러 장르로 매끈하게 풀어낸 수작이었다. 주인공 린을 비롯한 10대 캐릭터가 단순한 선악 구도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의 명분과 이해관계, 가치관을 지닌다. 할리우드 리메이크가 확정됐지만 <배드 지니어스>는 한국에서 더 유효할 이야기가 아닐까? 학생들의 고사장을 생사가 오가는 범죄 현장처럼 보이게 탈바꿈하고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에 리듬감을 부여할 수 있는 신인감독과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데 눈 밝은 제작자에게 <배드 지니어스> 한국판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권한다. 가상 캐스팅 명단에는 정호연, 채원빈, 이호정을 올려본다. /임수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6년 | 미키 사토시 |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스티커 붙이는 센스는 인생의 센스이기도 한 거다.” 항상 주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한 친구 쿠자쿠(아오이 유우)와 달리 스즈메(우에노 주리)는 모든 것이 평범하다 못해 어중간하다. 어떤 일을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던 어느 날, 스즈메는 아주 뜬금없는 방식으로 스파이 모집 광고를 발견한다. 심지어 면접 자리에서는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을 듣는다. “너무 평범해서 반대로 비범한 거 아니야?” 스파이로서 스즈메의 임무는 단 한가지. 평범하디 평범한 주부로서 지낼 것. 이른 성공, 타인과의 비교, 사회가 규정한 생애주기… 자기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눈치 볼 게 너무 많은 동아시아의 공통된 사회적 분위기는 스즈메가 자신의 평범함을 고민거리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이상하고 귀여운 영화가 한국 버전으로 전환될 때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진다. 어처구니없어 웃게 만드는 마을 주민들, 키치하고 알록달록한 아트 프로덕션, 요상스러운 스파이 미션, 휏휏휏휏휏 웃음소리. 어쩐지 충청도 배경이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뭐여! 시방 내가 스파이여!? /이자연
<반교: 디텐션>
2020년 | 존 쉬 | 왕정, 증경화, 부맹백
칠흑같이 어두운 교실에서 한 여학생이 깨어난다. 학교를 배회하다 그는 자신의 눈높이를 한참 넘어선 길쭉한 귀신을 목도한다. 간담을 서늘케 한 환영들이 실은 이미지화된 공포와 불안이었다는 사실, 뼈아픈 대만의 역사와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영화 중후반부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동명의 게임을 영화화한 <반교: 디텐션>은 1960년대 대만의 군사 독재 시기가 배경이다. 숨어서 금서를 읽던 학생들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학생 중 한명인 웨이중팅이 폐쇄된 학교에 갇히는 악몽을 반복해 꾼다. 대만 사회가 쉽게 회고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스크린에 투과한 <반교: 디테션>은 2019년 금마장영화제 5관왕에 올랐고, 영화 엔딩으로부터 30년 이후의 이야기가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됐다. 개봉 당시 국내 관객들로부터 ‘한국의 독재 시절과 오버랩된다’는 평을 받았던 <반교: 디텐션>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약 40일 뒤 체포된 작금의 시기에,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텍스트로 읽힌다. <반교: 디텐션>을 한국에서 리메이크한다면 어떤 서사와 대치할 수 있을까. 선택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 슬프지만 그럼에도 반복되는 역사를 기억해야 하기에 게임, 공포 장르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부조리한 과거를 기록한 <반교: 디텐션>이 한국의 과거 혹은 현재를 강렬히 고발하는 작품으로 재탄생하길 바라본다. /조현나
<남색대문>
2002년 | 이치엔 | 계륜미, 진백림, 양우림
학교 운동장에 나란히 앉아 노는 체육복 차림의 두 소녀. 17살 커로우(계륜미)와 위에전(양우림)이 두눈을 감고 미래의 남편과 아이를 상상하다가 이내 부끄러워서 웃어버리고 만다. 대만영화 <남색대문>의 첫 장면에 공명한 한국 여성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의 간질거림은 우리나라의 여학생이 가득한 교실에 늘 은은히 퍼져 있던 감정이었다. 이 밖에도 <남색대문>엔 드러내기보다는 되도록 숨기고 끝까지 가기보다는 도중에 멈춰버리고 마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단짝에게조차 좋아하는 사람을 귓속말로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느라 신발 앞굽만 축내는 청춘들은 자기 감정에 있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이들에게 살갗처럼 가까운 모습이다. 이런 작품이 이젠 한국에서 귀해졌기에 더욱 <남색대문>의 리메이크를 원한다. 1999년생 동갑내기 20대 여성배우 김유정과 김소현이 오랜만에 어지럽고 울렁이는 영화로 재회하면 어떨까. 여름날의 밝은 햇살을 그대로 맞으며 내밀한 대화를 속닥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다./이유채
<오 루시!>
2017년 | 히라야나기 아쓰코 | 데라지마 시노부, 조시 하트넷, 미나미 가호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통해 배우 강말금의 얼굴을 비로소 인식했을 때, 곧바로 데라지마 시노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먼 곳을 하릴없이 응시할 때와 눈앞의 상대를 골똘히 쳐다볼 때의 시차(時差)가 유독 큰 여자. 이를 드러내 파안대소할 때와 입술을 오므려 미소 지을 때 충족의 뉘앙스가 달라지는 여자. 두 배우는 내가 아는 한 동아시아에서 이목구비의 원근, 개폐, 장단만으로 100가지의 대사를 대신할 수 있는 동년배 여성배우다. <오 루시!>의 세츠코(데라지마 시노부)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과 일부 닮았다. 두 여자 모두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고독한 중년이다. 원어민 강사 존(조시 하트넷)을 만나 삶의 온기를 느낀 후 로스앤젤레스행까지 감행하는 세츠코의 과단성은 영(배유람)과 장국영(김영민)을 향한 찬실의 몸짓과 통한다. 무엇보다 두 중년 여성은 자신의 처지가 당장 불운하다 하여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두 여자는 위태로워 보여도 위험해 보이진 않고, 불안해 보여도 불만족스럽진 않다. 섬광처럼 등장해 몸집으로 세츠코를 매혹한 후 목소리로 세츠코를 충동하는 존은 지난해 <레블 리지>와 <무파사: 라이온 킹>으로 불현듯 등장해 육체와 음성 모두를 각인한 에런 피어가 어울린다. /정재현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
1990년 | 소마이 신지 | 나카이 기이치, 마키세 리호, 쇼후쿠테이 쓰루베
속칭 ‘회빙환’ 장르의 열풍이 한차례 한국을 휩쓸고 간 것 같지만, 아직 비장의 카드는 남아 있다⋯.얼마 전 재개봉하기도 한 <태풍클럽>의 소마이 신지 감독은 80년대 데뷔했을 때 <꿈꾸는 열다섯> <세일러복과 기관총> 등 하이틴 장르의 통통 튀는(동시에 무척이나 이상한 순간들로 가득한) 영화를 만들었고, 후반기엔 <여름 정원> <아, 봄> 등 인생사의 너른 굴곡을 유려하게 갈무리하는 작품들을 찍었다. 1990년에 만든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는 그 중간 지점에서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 같은 삶의 찬미와 <태풍클럽> 같은 죽음의 암운을 동시에 거머쥔 역작으로, 주인공인 인기 아이돌 유우가 어느 날 못된 광고계 아저씨의 손길을 피하려다 안타깝게 사망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차저차하여 유우는 자기 모습 그대로 ‘환생’하고 2회차 인생에서는 연예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폐해와 이에 비해 한껏 빛나는 청춘의 원초적인 꿈과 사랑과 무대의 아름다움, 마침내 통쾌한 복수극까지 이어진다. K팝 문화의 성숙기 혹은 여러 부조리를 맞이한 지금의 한국에서 한번 시도해볼 만한 기획이 아닐는지. /이우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