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청설> <먼 훗날 우리>까지. 관객의 기억에 각인된 멜로 작품이 연이어 리메이크되는 가운데, 문득 궁금해진다. 최근 부는 이 바람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동아시아 청춘 로맨스물이 거듭 생명을 얻어 우리에게 돌아오는 진짜 이유 말이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 영화계의 현주소가 놓여 있다. 그곳에 닿기 전, 우선 최근 리메이크되는 작품이 공유하는 특별한 점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국내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장르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청춘물에 로맨스, 판타지의 요소까지 공유한다. 우연히 다가온 첫사랑, 사랑에 서툰 남자, 해사하며 속이 깊은 여자, 투닥거리며 깊어지는 사랑, 갑자기 다가온 위기, 서로의 진심을 깨닫는 마무리까지. 관습화된 코스가 있고, 이를 얼마나 맛깔스럽게 운행하는지가 흥행을 좌우한다. 이 장르 팬덤의 기대를 만족시키면서도, 너무 지루하지 않도록 적당한 변형을 주어야 한다. 로맨스만 하더라도 장르적 색채가 짙은데, 이 작품들은 ‘장르 속 장르’라 할 정도로 특성이 강하다.
주연배우들도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청춘스타들이 주로 캐스팅되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여자 주연배우의 경우 선호되는 비주얼이 있다. 계륜미(<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판)를 필두로 주동우(<먼 훗날 우리> 중국판), 진의함·노윤서(<청설> 대만판·한국판), 원진아(<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까지. 깨끗하고 청초한 이미지의 배우가 자주 발탁된다. 대만 청춘물 여자주인공상이라 할까. 영화는 아니지만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 <그 해 우리는>의 김다미도 이런 페이스에 속한다. 또 아이돌 출신 배우가 자주 기용되는 경향도 보인다. 도경수(<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 진영·다현(<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한국판) 등이 그 예다. 장르적 색채가 진해서 상대적으로 연기 부담이 덜한 대신, 청춘을 대변하는 이미지의 중요성은 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마지막으로 리메이크 원작 중에는 2000년대 작품이 많다.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다. 원작 기준으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2007년, <청설>이 2009년,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2004년에 각각 개봉했다. <먼 훗날 우리>는 2018년 개봉했지만 2007년이 배경이다. 이 영화 속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약 20년의 터울이 존재한다. 지금의 리메이크 바람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20년 전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제작된 로맨스 판타지 영화가 약간의 메이크업을 마친 뒤 한국을 다시 찾은 형국이다.
궁금해진다. 어째서 최근 것도 아닌, 20여년 전 작품들이 자꾸만 한국에 소환되는가?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인 관객 확보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이미 호평받았고 팬덤도 확보한 원작이 흥행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기대. 이것은 <신과 함께> <내부자들> <조명가게> 등 인기 웹툰이 자주 영상화되는 트렌드와 맥을 같이한다. ‘이미 아는 그 맛’을 다시 맛보려는 관객과 검증된 레시피를 손에 쥔 제작사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존재감 강한 원작은 독이 든 성배다. 관객이 원하는 바는 확고하기 때문에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비판과 피드백을 감내해야 한다. 원작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는 작품에 대한 거부감도 존재하므로 창작자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제약된다. 원작이 일군 토대는 비옥한 동시에 비싸다.
2000년대 작품이 자주 리메이크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과거의 감성에 대한 향수’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2025년으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그러나 지금과 다른 결의 순수와 낭만이 살아 있는(것으로 인식되는) 시기. 얼핏 가까운 듯 보이는 2000년대와 지금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감성의 강이 있다. 특히 스마트폰과 SNS 콤보는 젊은 층의 감성에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변곡점이 2010년 무렵이라 생각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서로에게 닿을 수 있고, 모든 정보가 발빠르게 전달되는 지금 우리는 그 시절의 감성을 상정하기 어렵다. 리메이크 원작에서 주인공이 활보하는 학교 혹은 동네는 ‘작고 아늑하며 닫힌 세계’로서 존재한다. 이곳은 사랑이 우연히 나타나고, 한번 놓쳐버리면 찾기 힘든 공간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랑은 운명적으로 존재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청설>의 주인공은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소년은 첫사랑과 통화하기 위해 밥값을 모두 써버린다. 그런데 이런 제약이 그 시절 특유의 아련하고 애타는 정서를 스크린에 새긴다. 지금 한국에서 불붙은 리메이크 열풍이 좇는 것도 결국 이러한 정서다.
반면 지금 2025년 한국에서 이런 감성을 그대로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에게 반한다면(<말할 수 없는 비밀>) SNS부터 찾을 것이고, 알 수 없는 소녀의 언어는(<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 연애 예능에서 소비된다. 아무것도 개입하지 않는, 그래서 여리고 불안정한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000년대 청춘 로맨스물을 개작하겠다는 결정은 그것이 안전하다는 판단과 더불어, 그 시절 감성을 오늘날 찾기 어렵다는 인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에서 20년의 시간을 건너 유준(도경수)을 만나러 온 정아(원진아)는 요새 친구답지 않으며 신비롭다. 지금 한국영화계는 자기만의 정아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 최근의 리메이크 바람은 지금 시대에 2000년대 감성을 수입해오려는 시도로 보인다. 한국영화계는 20년 전 대만영화계에 ‘청춘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대한 외주를 맡긴 상태다. 이것은 최근 국내에서 굵직한 멜로 작품이 잘 안 나오는 경향과도 맞물린다. <클래식>(2003), <건축학개론>(2012) 등 첫사랑 영화의 계보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 장르 팬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줄 화제작이 없는 가운데, 리메이크 작품들은 일종의 대체재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최근 <이터널 선샤인>(2004), <노트북>(2004), <밀레니엄 맘보>(2001), <색, 계>(2007), <러브레터>(1995) 등 2000년대 로맨스 명작이 줄줄이 재개봉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리메이크 자체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잊힐 수 있는 감성을 되살리며 새로운 색을 입힌다. 또 개작 과정에서 재창조가 일어나는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경우에도 대만판은 원작답게 심플하고 굵직하다면 일본판은 단출한 감성이 돋보이고 한국판은 디테일과 감정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리메이크가 느는 경향이 곧바로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개작은 늘고 창작은 부족한 지금의 상황이, 이 장르에 대한 포기 선언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명작을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째서 2025년만의 순수를 담은 오리지널 청춘 멜로가 등장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20년 전 청춘이 품었던 열정은 2025년엔 어떤 얼굴로 바뀌었을까. 첫사랑을 향한 아련한 그 마음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숨 쉬고 있을까. 동시대의 감성을 ‘2000년대 대만 청춘 멜로’의 양식 안에 새긴 후에 자기 색을 입히는 작품은 없을까. 그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때 이 장르의 이름을 새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리메이크 열풍이 이런 변화로 이어질지, 잠시 불었던 바람에 그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