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의 피부처럼 영화의 질감도 영화마다 다 다르다. 한편의 영화에서 ‘룩’을 구현한다는 것은 질감을 결정하는 일이다.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카메라의 매체적 특징뿐만 아니라 렌즈의 특이성, 빛의 성질인 광질과 광량, 빛을 통한 색의 사용과 미술에서 색의 활용, 공간과 소품의 소재 특성, 영화 안 의상의 소재와 표면 성질 등 다양하다. 이런 요소들은 영화 안에서 작용하고 있지만 서사에 가려 잘 인지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질감으로 인지되는 요소는 화면의 거침과 부드러움, 선명함과 지저분함과 같은 인상일 것이다. 그것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가 화면 위 그레인, 필름에서는 입자, 디지털에서는 노이즈라는 질감이다. 디지털의 입자는 말 그대로 노이즈라 배격되지만 필름의 입자는 디지털 시대에 점점 더 선호되고 있으며, 디지털 안에서 필름의 입자를 표현하려는 시도까지 늘고 있다. 필름의 입자는 화면을 거칠고 지저분하게 보이게도 하고 때로는 피사체의 형태를 선명하지 않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필름의 룩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입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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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부터 영사까지 완벽하게 디지털시스템이 구축된 시대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필름 촬영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2024년 칸영화제에 첫 공개된 59편의 장편영화 중 12편이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필름으로 촬영된 12편의 영화 중 8편은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필름으로만 촬영하던 시절 16mm 필름의 선택은 비주얼 컨셉보다는 예산의 문제였다. 반면에 디지털 시대 16mm 필름의 선택은 예산의 문제가 아닌 비주얼에 대한 선택이고, 그중에서도 질감에 대한 선택이다. 16mm가 35mm 필름보다 더 거친 필름 입자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상산업 안에서도 필름 룩의 유령은 몇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출몰하고 있다. CF와 뮤직비디오에서 필름 촬영을 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디지털영상에서 필름 룩을 구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필름과 디지털 룩의 근본적인 차이는 질감의 차이다. 질감의 차이가 두 매체의 다른 정서를 만든다. 필름에서 질감을 만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은 입자다. 필름은 얇은 플라스틱이다. 필름에 상이 맺히는 원리는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빛이 은 입자에 닿으면 빛의 에너지는 명암으로, 빛의 파장은 색으로 전환되어 이미지를 구성한다. 빛 입자의 에너지와 파장을 품은 은 입자가 필름 현상 과정을 거치면 눈에 볼 수 있는 형태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필름의 제작 과정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먼저 돌돌 말린 커다란 플라스틱 필름 롤이 풀리면서 스프레이 통을 지나간다. 아주 작은 은 입자가 스프레이를 통해 랜덤하게 플라스틱 필름 위로 뿌려진다. 통과한 필름을 규격에 맞게 8mm, 16mm, 35mm, 70mm 등으로 자르고 양옆에 필름이 지나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퍼포레이션이라는 구멍을 뚫으면 최종 촬영용 필름이 완성된다.
필름이 발명되고 생산된 이후 모든 은 입자는 단 하나도 필름 위 동일한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1초에 24프레임씩 이동하는 필름의 첫 번째 프레임 속 은 입자의 위치와 두 번째 프레임 속 은 입자의 위치는 다르다. 동일한 이미지를 길게 찍어도, 프레임마다 기록된 은 입자의 위치는 다 다르다. 카메라 필름 매거진에 감긴 필름이 시작하는 위치도 동일하지 않다. 필름을 감는 촬영팀 로더에 따라서, 카메라에 따라서 필름 시작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규격과 종류의 필름을 사용해도 필름이 촬영되는 시작점을 같게 할 수 없기에 은 입자의 위치가 모든 필름에서 다 같다고 가정해도 프레임마다 은 입자의 위치는 같을 수 없다. 결국 한곳에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은 입자와 필름의 시작점을 알 수 없음이 초당 24프레임이라는 카메라의 운동과 만나 필름의 질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디지털에서 필름의 은 입자처럼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곳은 카메라 센서의 작은 방 픽셀이다. 디지털 센서의 픽셀은 해상도에 맞춰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모든 빛은 규격화되고 고정된 방 안에 들어가 기록된다. 디지털의 입자인 노이즈는 각 픽셀에 기록된 빛의 크기가 작을 때 강제로 그 빛을 전자적으로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디지털카메라도 초당 24프레임으로 움직이지만 고정된 픽셀 안의 빛을 강제로 크게 만들다 보니 그 빛은 그 자리 위에서 마른 수건의 물을 짜듯 빛을 강제로 짜내면서 버둥거린다. 그 제자리 버둥거림이 디지털 화면 안 어둠에서 지글거리게 보이는데 이것이 노이즈다. 같은 거침에 지글거림이지만 고정된 위치에 있는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지의 차이가 필름과 디지털 사이 질감의 차이를 구분한다.
수직적 기록과 수평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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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미지를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가 동시에 담아낼 때 필름은 묵직하고 깊이가 있는 느낌이라면 왜 디지털은 가볍고 평평하며 납작한 느낌이 드는 걸까? 앞서 말한 은 입자의 움직임이 만드는 질감의 차이도 있지만 공간적 기록 방식의 차이도 있다. 필름은 이미지가 수직적으로 깊이에 따라 기록되는 반면 디지털은 수평적인 평면 위에 동일하게 기록된다. 필름은 빛 파장의 길이에 따라 수직적으로 다른 위치에서 은 입자가 반응하고 색을 만든다. 필름의 두께는 약 0.12mm로 얇지만, 그 얇은 두께 안에 여러 층을 가지고 있다. 건물로 비유하면 건물 전체 하중을 받치면서 기초가 되는 두꺼운 필름 베이스가 있다. 필름 베이스 밑으로는 빛의 난반사를 방지해주는 층이, 위로는 각각 빛의 파장이 반응할 색 염료층이 구분되어 수직적으로 깊이 있게 배치되어 있다. 필름의 제일 윗면에는 필름 면을 보호하는 보호막 층이 있고 그 아래 블루 파장과 관계해 옐로 색을 만드는 층, 그 밑에 그린 파장과 관계를 맺어 마젠타 색을 만드는 층, 마지막 레드 파장과 관계를 맺어 사이언 색을 만드는 층이 배치되어 있다. 필름은 이렇게 이미지가 동일한 평면 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수평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프레임마다 다 다른 위치에서 기록된다.
반면 디지털 센서는 보통 한 픽셀 안에 두개의 그린 파장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와 각각 1개씩 블루와 레드 파장을 받아들이는 수용체 등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디지털 센서의 픽셀은 빛을 균등하게 받기 위해 동일한 크기의 방들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고, 수직적 깊이 없이 수평적으로 정보를 기록한다. 피사체의 형태와 공간을 동일한 평면 위에 깊이 없이 수평적으로 고정되어 기록하는 것과 움직이는 수평 면과 더불어 각각 다른 깊이에서 정보를 기록하여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물질적 깊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입체적으로 스크린 안으로 향하는 Z축 화면의 깊이로 드러난다. 수평적 디지털이미지가 만들 수 없는 깊이감이다.
필름의 육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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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필름 위 은 입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필름영화에서 보는 입자의 질감은 실제 은 입자의 움직임이 아니다. 은 입자는 피사체와 공간에 투사된 빛의 정보를 기록하고만 있을 뿐이다. 필름을 현상하기 전까지 우리는 기록된 정보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은 입자의 기록된 정보를 잠재된 이미지라고 한다. 필름의 현상 과정을 거치면 은 입자는 자신이 기록한 정보를 남긴 채 사라진다. 은 입자가 사라지고 남은 자국과 염료들과 반응하며 남긴 결과물들이 우리가 보는 이미지다. 사라진 은 입자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은 입자의 자국과 반응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물질의 육체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물질이 남긴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들에서는 중심에서 벗어난 인물들과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는 인물들을 벗어나거나 비껴나간 풍경과 사물들을 통해 정서를 발견하기도 한다. 16mm 고감도 필름으로 촬영한 <캐롤>은 1950년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유하는 필름의 거친 질감 위에 담아낸다. <키메라>는 한신 안에서도 8mm, 16mm, 35mm 필름을 함께 사용한다. 각각 다른 입자의 질감 차이를 통해 사라질 현재의 순간들을 필름의 입자 위에 기록하고 흔적을 남긴다. 여건상 디지털로 촬영했지만 필름 입자의 육체성을 담은 영화들도 있다. <듄>은 디지털로 찍고, 최종 편집본을 필름 레코딩을 거쳐 필름의 운동하는 입자들을 디지털 표면 위에 담아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디지털로 촬영하고 필름의 입자를 화면 위에 넣는다. 수녀원에서 우연히 마주한 진실에 고뇌하는 주인공 빌 펄롱의 감정을 거친 입자의 질감으로 표현했다. 1969년 말,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함께 보내게 된 교수와 학생 사이의 우정을 담은 <바튼 아카데미>도 디지털로 촬영하고 필름의 입자로 화면 위를 덮는다. 이 영화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내려는 듯 필름 스크래치도 화면 위에 더한다. 대안 가족에 대한 다른 고찰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필름 입자와 있어서는 안될 필름 스크래치를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배치하며 다른 사유를 펼친다.
필름으로만 영화를 찍던 시절에는 필름의 입자를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필름의 입자가 디지털에서 노이즈처럼 기술적 부족함이나 이미지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필름 제조사인 코닥도 고감도에서 필름의 입자가 적게 보이도록 하는 데 주력했고, 그렇게 나온 필름이 비전(Vision) 시리즈다. 현재는 비전3까지 나와 있다. 한국영화에 필름의 존재가 남아 있던 필름의 입자를 영화 안으로 적극 가져왔던 영화 중 한편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다. 이 영화는 추함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지를 두 주인공의 서사와 거친 필름 입자의 질감을 통해 표현한다. 그 당시 화면 입자에 대한 부담감으로 잘 사용하지 않던 ISO800 고감도 필름을 저조도의 촬영 환경에서 사용, 적극적으로 필름의 거친 입자를 화면 안으로 가져와 추함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시도한다. 한국에서 필름영화의 끝자락 독립영화에서 필름의 물질성을 극단적으로 시도한 극영화가 있었다. 김곡 감독의 <고갈>이다. 이 영화는 필름의 입자를 더 거칠게 표현하기 위해 감독이 직접 필름을 자가 현상하고 몇몇 장면들은 촬영된 필름을 부식시켜 영화 안에 사용한다. 필름의 입자성과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영화, 우연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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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성을 지닌 필름의 블랙은 입자의 흔적 때문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순수한 블랙을 만들 수 없다. 빛의 단계를 수치화했을 때 디지털이미지에서는 순수한 블랙 ‘0’이 가능하지만, 필름은 ‘0’ 블랙의 구현이 불가능하다. 디지털은 명암과 색을 비트(bit)로 표현하기 때문에 비트가 높은 하이라이트의 표현은 아날로그 필름보다 약할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트로 표현이 가능한 블랙은 순수한 블랙부터 다양한 계조의 블랙까지 필름보다 자유롭게 블랙을 표현할 수 있다. 필름의 블랙은 입자의 물질성을 기반으로 해서 베이스와 포그를 기본으로 갖고 출발한다. 그래서 필름 프린트에서 블랙은 순수한 블랙이 없고 블랙이 약간 떠 보인다. 필름이 디지털보다 소프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블랙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필름 룩’이라고 이야기할 때 들뜬 블랙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블랙에 강한 디지털은 그 강함을 더 잘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미지 안의 블랙이 순수한 블랙에 가까워질수록 화면은 더 선명하고 깨끗하게 보인다. 해상도의 증가가 이 블랙을 더 짙게 만드는데, 4K 디지털 UHD가 보편화되면서 더 좋은 화질에 대한 강박이 짙은 블랙을 강조하게 되었다. 고해상도에서 순수 블랙에 대한 강박은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들의 리마스터링에서 폐단을 맞이한다. 필름의 뜬 블랙이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색보정 과정에서 베이스와 포그가 사라진 짙은 블랙으로 변한다. 필름 하이라이트의 풍부한 계조는 디지털 복원 과정에서 다 수용되지 못하고 화이트 색의 왜곡으로 변질된다. 거기에 더해 필름 위의 입자들은 선명하고 깨끗한 4K 화질을 위해 제거되거나 그 크기가 작아진다. 빛과 어둠으로 시를 쓰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리마스터링,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리마스터링된 몇몇 작품들에서 4K 디지털로 인해 필름의 육체성이 사라진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최근에 극장에서 상영 중인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피사체에 대한 빛이 정보를 가진 필름의 은 입자는 이미지로, 빛의 정보가 주어지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은 입자는 들뜬 블랙으로 그 흔적들을 필름 위에 남긴다. 은 입자는 드러난 존재도 드러나지 않은 존재도 위계와 구분 없이 타자의 존재들을 모두 필름 위에 남겨놓는다. 필름 위의 은 입자는 자신이 어떤 타자의 빛을 만날지 모른다. 필름 위 가득 담긴 은 입자가 1초에 24장씩 움직이는 카메라 안에서 빛의 이미지, 타자를 만나는 원리는 우연뿐이다. 필름 위 은 입자에 기록된 타자는 현상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다. 타자들을 품었지만 어떤 타자들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기에 잠재화된 이미지면서, 필름의 입자는 무엇을 만날지 모를 ‘우연’을 가득 담고 있기에 무한한 이미지에 대한 잠재성의 장이기도 하다.
영화는 우연의 결과물이다. 우연을 이용할 줄 알고, 다룰 수 있을 때야말로 그 우연이 ‘영화적’이 된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루어진’ 우연 외에는 다른 우연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연을 다루는 것은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시선이다. 필름의 은 입자처럼 영화는 내가 아닌 타자들을 고정되지 않은 시선으로 기록하고 잠재된 이미지로 담아내는 것이다. 필름으로 촬영한다는 것은 이 우연을 적극적으로 다루는 행위다. 디지털에서 필름 룩을 구현한다는 것은 필름의 표면적인 효과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타자들을 담아내면서 카메라와 우연의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서 진정으로 ‘필름적’인 촬영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