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왜, 지금, 다시? 멜로영화 리메이크로 보는 동아시아권 영화산업의 지형도
2025-01-30
글 : 임수연

<청설>부터 <말할 수 없는 비밀>까지, 어떤 관객층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아시아권 멜로영화들이 한국을 무대로 바꾸어 연이어 리메이크되고 있다. 이같은 풍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짚어보았다. 홍수정 영화평론가는 동아시아 청춘 로맨스물이 공유하는 특별한 점과 한계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결국 비슷한 문화권을 공유한 영화가 계속해서 재탄생하는 것은 로컬라이징 이후에도 여전히 소구하는 핵심 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맨스물 외에도 리메이크를 검토해볼 만한 다양한 아시아영화들을 <씨네21> 기자들이 추천해보았다.

2020년 안시환 영화평론가는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를 뒤늦게 관람한 소회를 남기며 “지금 한국영화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정서와 문제의식이 지금의 중국에는 현재의 것으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2017년 김혜리 기자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여러 미덕을 언급하며 “<배드 지니어스>에 이어 한국 장르영화의 상대적 지체를 돌아보게 하는 아시아 대중영화”라고 평했다. 그리고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2023년 한국에서 리메이크돼 개봉했고 올해 구교환, 문가영이 출연하는 한국판 <먼 훗날 우리>(가제)가 개봉을 준비 중이다. 한국영화가 잃어버린 로맨스를 타국에서 발견한 창작자들이 이를 리메이크의 형태로 부활시키려는 행보일까? 특히 한국 영화 제작자들이 주목한 멜로영화는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권에 집중된다. 지난해 대만영화 <청설>의 동명의 리메이크가 관객을 만났고 1월27일 주걸륜이 아닌 도경수 버전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개봉하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한국판이 2월21일 개봉을 확정지었다.

“이미 자국의 젊은 타깃 관객층에게 공감을 얻어 검증된 스토리이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른 상황적 디테일은 다르지만 핵심 감정은 언어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먼 훗날 우리>를 리메이크한 이영한 커버넌트픽쳐스 공동대표) 동아시아권 로맨스영화의 판권을 구입했던 제작자들은 서구권과는 구분되는, 아시아권 관객층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먼저 언급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제작한 송대찬 영화사테이크 대표는 “남녀가 만난 당일 침대가 나오는 서구권과 달리 아시아권은 답답해 죽을지언정 손끝 겨우 스치고 어렵게 뽀뽀하고 마지막 결론이 키스신인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설명했다. 교복과 식사 문화, 무엇보다 배우들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때문에 리메이크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청설>을 제작한 김재중 무비락 대표는 “다른 나라지만 정서적으로 가정할 수 있는 폭이 무척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동서양과 연령대를 막론하고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빠와 아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아시아의 부모들은 서구권과 달리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항상 품 안에 지켜주고 싶어 한다. 사랑의 감정을 좀더 조심스러워하고 마음을 숨기고 싶은 마음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다.”(김재중)

정서의 교집합 욕망의 상호작용

정서의 교집합은 있지만 영화산업은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돼왔다. 2019년 한국 영화산업은 연간 관객수 2억2천만명대를 돌파하며 인구 1인당 연평균 관람횟수 4.37회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영화 강국이었다. 문제는 산업의 규모가 커진 만큼 제작비 역시 상승하고 손익분기점을 보장받기 위해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고예산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경향이 커졌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클래식> <파이란> 등 다양한 멜로영화가 제작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시장은 극장 관객수가 보장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송대찬 대표 역시 “2000년대 중반 이후 좀더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작품, 영화적인 설정이 선호되면서 청춘물은 시리즈물이나 저예산 독립영화, 단편영화에서 주로 소비되고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도 10~20대가 주인공인 청춘영화의 명맥은 거의 끊기고 있었다. 두 여성간의 우정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을 다룬 <소울메이트>를 제작한 변승민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대표는 “최근 리메이크되는 여러 중화권 영화는 결국 청춘영화”라고 운을 띄우며 “한국영화계에 청춘영화 부재에 대한 갈증이 있는 시기”라고 짚었다. 청춘영화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세대와 시대의 이야기가 있지만 영화 대신 드라마로, 특히 로맨틱코미디에 한정돼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는 측면이 강했다는 것이다. 대신 일본과 중국, 대만 영화계는 아직 멜로나 청춘 로맨스가 제작되고 흥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양질 전환의 법칙에 따라 질적 비약도 우선 영화가 자주 제작되어야 가능하다. 그렇게 한국영화계에 사라진 정서가 대신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 발견되면서, 멜로드라마의 부재에 상실감을 느낀 영화 애호가들은 비슷하지만 이국적인 공간에서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편 이같은 작품에서 발굴되는 청춘스타가 있다. 한국에서도 팬이 많은 <상견니>의 허광한 같은 배우가 그 예다. <소울메이트>는 안전한 기성배우보다 젊은 신인배우, 궁극적으로 청춘스타의 탄생을 갈망한 프로젝트였다. 김다미, 전소니, 변우석이 주연을 맡았었다. “사람들에게는 청춘스타 탄생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청춘스타라고 불릴 만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중화권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들을 통해 대리 충족을 하지 않았나 싶다.”(변승민)

리메이크는 한때 한국영화계에 존재했지만 명맥이 끊긴 로맨스영화 계보를 다시 이어가려는 제작자와 관객의 욕망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의 기대 관객수 자체가 감소하면서 반대급부로 중급 규모의 로맨스영화 기획이 재검토되고, 해당 시장에 경쟁력이 있는 일본과 중국, 대만의 결실을 눈여겨본 것이다. 다만 원작과 리메이크의 시간차와 로컬라이징 문제가 제기된다. <청설>의 김재중 대표는 “대만은 스쿠터 문화가 보편적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었다고 예를 들었다.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면 영화의 분위기와 충돌한다. 때문에 주인공들이 스쿠터를 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송대찬 대표는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왔다가는 <색즉시공>처럼 성에 관한 영화가 될 수 있다. 당시 웃고 지나갔던 장면을 10대 주인공들이 그대로 재현하면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원작 주인공의 일명 ‘츤데레’ 같은 면은 살리되 여성 마케터 등에게 자문을 구하며 여성 관객이 거부감을 드러낼 수 있는 신들을 많이 없앴다.

냉정하게 동아시아 로맨스영화들의 리메이크가 성공을 담보하는 아이디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제외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사례가 대부분이라 역시 한국은 멜로영화 불모지라는 편견을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멜로드라마 감성이 할리우드 대자본이 성취할 수 없는 무엇이라면, 서로의 자산을 주고받으며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해볼 만한 시도다. 올해 관객을 만날 <말할 수 없는 비밀> <먼 훗날 우리>(가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등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로컬라이징과 함께 ‘동아시아 로맨스 장르’의 유의미한 확장과 발전의 토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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