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캐한 매연과 천둥 같은 엔진 소리, 세상 쿨한 카레이서들의 목숨을 건 경주와 사업가들의 냉철한 비즈니스 담판…, 같은 것들보다 진정 즐거운 <페라리>의 순간은 바나나 한개에 있다. 페라리사의 명운을 건 1천 마일 레이스 ‘밀레 밀리아’ 도중 페라리사의 카레이서 피터(잭 오코넬)는 주유 지점에 내려 잠깐 쉬면서 바나나 한개를 까고 급히 한입, 두입 해치운다. 그리고 반쯤 남은 바나나를 엔초 페라리 회장(애덤 드라이버)에게 마치 버리듯 툭 건네준다. 평소 꽤 권위적인 엔초이지만 경주 중인 선수에겐 별다른 말도 못한다. 대신 엔초는 이 바나나를 자연스레 회사 직원에게, 직원은 정비공에게, 정비공은 카레이싱 구경 나온 동네 아이들에게 떠넘긴다. 130분짜리 <페라리>에 겨우 10초쯤 차지하는 이 웃긴 바나나 숏, 일련의 자그마한 몸짓들에 어떤 의미를 덧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거창한 의미나 상징을 이 바나나 자체엔 부여하지 말자고, 웬만하면 이 장면을 그저 한순간의 소박한 장난질로 바라보아야 그 실체를 더욱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1초의 장난질
영화의 리듬이라거나 톤이라거나 템포라거나 하는 것들은 전혀 추상이 아니다. 여하간 사람이 찍고 매만진 영화의 숏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필연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있는데, 이는 결국 숏의 지속 길이다. 마이클 만의 영화를 두고 으레 말하는, 건조한 톤과 쫄깃한 리듬은 다분히 의도적인 숏의 길이 배치에서 나온다. 미시적인 신 단위의 컷 편집보다 더욱 큰 차원에서 영화 전반의 박자감을 쪼개는 감각은 타인이 쉽게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고 어딘가의 시나리오 작법서에 줄줄이 쓸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만약 이것을 연출자 고유의 스타일이라 말한다면 더욱 옳을 것이다. <페라리>의 경우엔 전술했던 바나나 숏이 그러한 역할을 맡는다. 긴박한 경주 도중에 잠시 욱여넣은 사소한 재밋거리, 볼거리가 영화의 근원적인 행위적 어트랙션을 유도하고 신과 시퀀스의 긴장감을 완화한다. 바나나 숏- 고전적인 미디엄숏의 10초짜리 패닝- 으로 풀어놓은 관객의 마음은 겨우 8분 뒤에 이어질 비극(자동차 사고로 민간인 10여명이 사망하는 일)을 마주할 때 더욱 큰 낙차를 느끼게 된다.
너무도 기본적이고 사소한 끼워넣기의 여유 혹은 대담함. 마이클 만의 영화를 복기하면 이는 분명 연출자 고유의 집착적 패턴이다. 이를테면 <페라리> 이전의 근작 <블랙코드>에서 보여준 시시껄렁한 천재 해커들의 범죄 서사, 아니면 주인공 해서웨이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의 근육질 상체에 비견되어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키보드보다 즐거운 마이클 만의 인장은 1~2초 만에 쓱 지나가버리는 어느 중화권 주방장의 불타는 웍 돌리기, 또는 해서웨이와 리엔(탕웨이)이 급히 계단을 오를 때 중간 층에서 물구나무 서고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의 장난질이 프레임의 전경을 지배하는 순간이다. 지나고 나면 그 장면들이 어느 시퀀스에 끼어 있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그때만큼은 분명하게 관객의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의외의 움직임이며 영화의 리듬을 개성 있게 매만지는 이음매들이다.
‘장난질’이라는 뉘앙스를 가장 직설적으로 분출한 작품은 <마이애미 바이스>일 것이다. 세계적인 마약 조직을 쫓던 FBI 요원 리카르도(제이미 폭스)는 아주 여유롭게 연인 트루디(나오미 해리스)와 사랑을 나누던 중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장난”(joke)이라며 다시 침대를 흔든다. 두 연인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하던 일을 마저 한다. 거창하게 섹스의 리듬에 빗댄 이 장난의 순간처럼 마이클 만은 영화를 하나의 큰 절차적, 신체적 움직임으로 간주하며 그 절차 사이사이에 숨을 틔울 장난질의 쉼표를 마련하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또 다른 FBI 요원 소니(콜린 패럴)가 범죄 조직의 간부 이사벨라(공리)와 잠시 쿠바의 어느 바에서 진중한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역시 창 바깥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빠른 다리가 <페라리>의 레이싱카들보다 빨리 1초 만에 지나가버리곤 한다.
자그마한 낙관과 아이들
마이클 만의 장난질 같은 영화적 리듬은 아마 할리우드 고유의 낙관주의에서 파생하여 아직 잔존해 있는 작은 조각(들) 중 하나 같기도 하다. 이것은 커다란 연역적 사고라기보다 지난날에 보았던 몇편의 미국영화를 마이클 만의 장난질이 떠올리게 만들어 생겨난 귀납적 결론이다. 예를 들면 바로 얼마 전 미국영화의 한 시대가 지나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 #2>에서 배심원의 도덕적 딜레마를 뼈저리게 느끼던 순박한 미국 청년 저스틴(니컬러스 홀트)은 임신 중인 아내 앨리슨(조이 도이치)과 함께 핼러윈데이를 준비한다. 죄를 고백하느냐 마느냐의 심각한 갈림길 한복판임에도 저스틴은 우스꽝스러운 핼러윈 분장을 한다. 집에 놀러 와 “trick or treat!”(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준다. 장르의 법칙에도 윤리의 심사숙고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이 장난 주고받기의 시간을 통해 영화의 일상성은 유지되고 아주 잠깐의 평화, 그리고 세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모종의 낙관이 일순간에 스며든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에서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조작했느냐 마느냐의 거국적 사건을 파헤치는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장 벤(톰 행크스)은 보도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신문 발행인인 캐서린(메릴 스트리프)을 이른 아침에 찾아간다. 국가와 기업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이 긴장의 순간에 불현듯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보라색 공(풍선이었을 수도 있다)이 방으로 굴러 들어오고, 벤은 공을 찾으러 온 소녀에게 등 돌려 그것을 돌려준다. 요컨대 일련의 (아직 전통적인) 미국영화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습관이란 장르의 속도감이 우상향할 무렵 종종 찾아드는 장난의 멈춤들, 그리고 그러한 멈춤의 장면들에 유독 아이들이 자주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숏의 리듬을 책임져줄 장난질에 어울리는 주체를 물색하다 보니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영화에 개입한 것인지, 반대로 어른들의 쓰라린 범죄와 은닉과 현실 주변부에 여전히 아이들의 기분 좋은 장난이 머물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의식의 흐름이 막힐 무렵 다시 <페라리>로 돌아와서 엔초의 곁에 있던 아이, 외도로 낳은 아들 피에로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어른들의 돈 놀음으로 무고한 시민과 아이가 죽어나고, 부자 회장님(엔초)의 당당한 외도로 인해 소년이 이름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이 부조리한 광속의 세계에서도 피에로는 자동차에 대한 꿈과 희망을 지니고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피에로를 죽은 이복형의 묘소로 데려가며 자기 가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영화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낙관은 그 현실을 마주하러 가는 부자의 뒷모습을 멀찍이 외면하듯 찍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 이전 짤막한 장난질의 순간들은 이 낙관의 정경에 도달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중간중간의 간식(바나나 같은)이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