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상수 영화를 볼 때 수첩을 펼쳐놓고 영화에 나오는 표지판이나 가게 간판 같은 것들을 메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들을 추적해서 고작 하는 일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가게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감독의 특성상 로케이션에 적당한 이유라는 건 있겠지만 아주 특별한 이유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그 장소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일상적인 길거리와 카페, 술집들이 영화 속 이야기와 캐릭터에 적셔지면 다른 어떤 공간보다도 저에게 흥미로운 관광지가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뭔가 먹고 마시면 왜 유난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지요. 저는 홍상수가 보장한 맛집을 찾아가서 영화 속 그들과 같은 것을 주문하곤 했습니다. <북촌 방향>의 주 배경이 되는 술집에서 병맥주를 마셔보거나 (지금은 그 술집이 없어졌습니다) <그 후>에 나오는 중국집에서 그들이 맛있어하던 짜장면을 먹어보는 것이죠. (실제로도 맛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저와 같은 악취미를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국내 영화 촬영지의 실제 주소와 현장 사진들을 정리한 어떤 이의 블로그를 찾았을 땐 저만의 보물섬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저 대신 찾아주실 테니 수첩을 닫고 걱정 없이 영화를 봅니다. 이렇게 변태처럼 영화 속 장소를 수소문하지 않더라도 그 장소로 갈 수 있는 좀 간단한 방법도 있습니다. 그냥… 봤던 영화를 다시 보면 되지요. 여러분도 한번 떠올려보세요. 영화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소 같은 장면도 있지만 나만 알고 싶은 가게 같은 장면도 있잖아요.
세계의 도시 속을 달리는 밤의 택시와 그 승객들에 관한 이야기인 <지상의 밤>은 짐 자무시 영화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옴니버스처럼 꾸려진 각각의 도시 이야기 중에서 헬싱키 편, 백야로 거의 아침처럼 보이는 새벽에 술에 취한 세 친구가 서 있습니다. 눈이 쌓인 거리 위에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그들은 자세히 보니 서서 자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너무 좋아해서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 장면을 기다리고, 볼 때마다 처음처럼 폭소합니다. 세 친구는 택시를 타서 누가 더 불행한지 자랑하다 택시 기사의 불행에 숙연해지죠. 배우들의 신명난 연기를 주고받는 중요한 신은 택시 안에서 벌어지지만, 저는 왜 세 친구가 바보같이 서 있는 헬싱키의 눈 덮인 거리 장면이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까요. 아마 취해서 널브러진 저와 제 친구들의 새벽을 떠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러브레터>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사랑하는 장소들로 가득한 영화일 텐데요. 저 역시 그녀가 사는 일본식 구옥에 가고 싶어서, 난로 가에서 스웨터를 입고 편지를 쓰는 그녀 옆에 있고 싶어서 겨울이 되면 습관처럼 방문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묘하게 제 기억에 오래 남는 장소는 유리공방입니다.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그녀와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의 일상적이지만 불편한 대화가 오가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장면인데 말이죠. 작업복을 입고 먼지와 굉음 속에서 뭔가를 만들며 동료와 담소를 나누다 보면 의도치 않게 심연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기도 합니다. 아마 창작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념을 끌어올리는 것에 열중하는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있는 건 약간 관능적인 느낌을 줍니다.
다큐인지 판타지인지 연서인지 모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할 영화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소한 장면이 있습니다. 제인 버킨은 영국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하며 프랑스로 활동 반경이 넓어지게 됩니다. 이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교차편집으로 연출된 장면은, 버킨이 런던의 빅 벤에서 파리의 에펠탑까지 뛰어가는 모습입니다. 가방에는 잡동사니를 한가득 담고 편안한 청바지와 재킷,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은 차림으로 달려갑니다. 너무나 자기다워서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입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 랜드마크를 굳이 찾는 편은 아닌데 빅 벤이나 에펠탑은 어쩔 수 없이(?) 가긴 가야 할 것 같아서 둘러보았던 적이 있었지요. 알고 보니 저는 그녀와 같은 거리를 걸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과거의 저를 칭찬하며 오타쿠적인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에일리언’이라고는 키린지의 노래밖에 모르는 저와 <에이리언> 모든 시리즈를 좋아하는 당신. 당신이 무얼 그리 좋아했었는지 궁금해서 영화 <에이리언>을 봤습니다. 1987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이 상상한 미래는 지금보다 전반적인 디자인이 더 훌륭한 것 같습니다. 탐사선 승무원이 슈퍼컴퓨터와 채팅하는 반짝거리는 그 공간을 보면서는 영화미술에 약간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보면서 왜 그런지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이곳에 다녀갔습니다. 자주 본 영화였을 테니 어쩌면 이 컨트롤 룸에는 한두번이 아니고 꽤 많이 다녀갔겠지요. 그 생각을 하면 조용하고 편안한 기분이 듭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셨을까요? 어떤 영화가 재미있었고 어떤 건 별로였다는데 저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들이라서 영화제목을 몰래 기록해두었어요. 아마 제가 보는 속도로 이 리스트의 영화를 모두 보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아요. 이상하지요. 아직 보지 않은 영화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니. 어떤 장면에서 멈칫했을지, 어떤 장소를 좋아했을지 상상해보며 이제 당신이 먼저 다녀간 장소들을 따라다녀보려고 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과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