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오디세이]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역사의 무대 위에 선 사람들, 디지털 시각효과를 활용한 세계-만들기(1편)
2025-02-12
글 : 이도훈 (영화평론가)
<포레스트 검프>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지의 조작과 생성이 편리해지자 영화가 세계-만들기(world-building)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영화인들의 목소리에 다시금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일찍이 V. F. 퍼킨스는 “영화의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파생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영화의 세계와 흥미롭게 연결되는 방식”이 중요하다면서 리얼리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퍼킨스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일부 영화이론가들은 관객이 이미지와 서사를 매개로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세계가 구축된다고 본다. 여기서 이미지는 제작 과정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것과 후반작업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것을 포함한다.

세계-만들기의 효과적 수단으로서의 디지털 시각효과의 쓰임새는 단순히 리얼리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과 환영주의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영상 소프트웨어에 의해 처리된 공간이 하나의 풍경처럼 제시되는 동시에 극의 무대로 쓰이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이를 위해 그린스크린 또는 블루스크린 앞에서 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후 배경을 합성하는 디지털 매트페인팅이 자주 쓰인다. 이 기법은 가상의 배경이 그려진 유리판을 카메라 렌즈 앞에 놓고 촬영하던 방식을 디지털로 전환한 것이다. 화가의 붓질과 유리판은 각각 컴퓨터그래픽과 블루스크린으로 대체되었고, 가상의 배경에 쓰이는 이미지는 극사실주의적인 수준에 다다랐다. 또한, 가상의 배경과 실사를 합성한 흔적은 관객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매끄러워졌다. 그 결과 디지털 매트페인팅은 비현실적인 배경만이 아니라 역사나 일상과 관련된 현실적인 배경도 다루게 되었다. 영화의 세계가 컴퓨터그래픽과 디지털합성을 활용하여 사실성, 역사성, 일상성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디악>

<포레스트 검프>(1994)는 관객의 집단적 기억 속에 남아 있으나 지금은 물리적으로 사라지거나 달라진 세계를 디지털 시각효과를 이용해 되살려낸다. 1960~7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주요 역사적 사건을 무대화하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시각효과는 주로 사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역사적 배경을 사실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사용된다. 먼저, 하나의 사물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바람에 휘날리다 주인공의 신발 앞으로 떨어지는 깃털, 드넓은 옥수수밭 위로 유유히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 떼, 주인공과 악수하는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 등이 그러하다. 다음으로, 역사적 배경과 실사 촬영분을 합성하여 과거를 시각적으로 복원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이 베트남 전쟁터를 수색하거나 포탄이 터지는 현장을 극적으로 탈출하는 장면, 링컨 기념관 앞의 호수를 가득 메운 반전 시위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는 장면, 여러 아카이브 푸티지에 기록된 실제 역사적 현장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이 장면들은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특정 역사적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 속에 거주하고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활용된 역사적 배경에 주인공이 거주하고 있다는 인상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 작품들에서 역사는 대상, 인물, 사건 등을 아우르는 하나의 환경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이라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처럼 역사적 인물, 사건, 배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 속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을 다룬 <조디악>(2007)은 ‘실제 수사에 기초하였음’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1969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불야성을 이룬 캘리포니아 북동부 도심의 밤 풍경과 그로부터 4주가 지난 후 샌프란시스코 항만의 선착장 건물 주변의 풍경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기능적으로 시각적 볼거리로 제시된 두 풍경 모두 역사적 사료를 활용하여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는 컴퓨터로 만든 3차원 환경을 단순 볼거리가 아닌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위한 무대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워싱턴&체리 교차로에서 일어난 조디악의 범행 현장을 수사하는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면이 대표적이다. 실제 조디악의 범행이 벌어졌던 사건 현장에 블루스크린을 설치해 찍은 이 장면은 후반작업 과정에서 블루스크린이 있던 자리를 과거의 가옥과 거리 풍경을 재현한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대체해서 완성한 것이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정교하게 구현된 그 역사적 공간은 작품 속에서 시각적 스펙터클인 동시에 서사적 공간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역사적 이미지와 이야기는 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와 겹친다. 그런 점에서, <조디악>은 영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가 상호 침투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체인질링>

영화의 세계-만들기는 연출자의 의도나 관객의 해석에 따라 특정 이념과 의미를 도출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실화 기반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고, 그 작품들에 안정, 평화, 법, 질서, 안보와 같은 보수적인 가치를 반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연쇄 소년 납치 사건을 다룬 <체인질링>(2008)은 디지털 시각효과로 만들어진 대도시의 거리의 풍경을 통해 당시 대도시의 삶이 여성에게는 성차별적이고 어린아이에게는 폭력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도시의 거리는 여성과 어린아이가 안심하고 활보하기 힘든 무법천지와 같다. 한편 FBI의 창설자 J. 에드거 후버의 이야기를 다룬 <제이. 에드가>(2011)는 역사적 풍경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에 권력과 질서에 대한 욕망을 담는다. 이 영화는 총 두번에 걸쳐 대통령의 취임식 기념행사를 바라보는 주인공 에드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드거의 시선으로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둘러싼 인파와 행렬을 묘사한 그 두개의 장면은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식 행사와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취임식에 관한 것이다. 각각 역사적 고증을 거쳐 대로의 포장, 건축물의 외관, 자동차의 디자인 등 세부 사항을 컴퓨터로 정교하게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에드거는 닉슨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면서 “모든 시민에게는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읊조린다. 그 말 속에는 시민, 가족, 안정, 질서라는 너무나 단순해서 거부하기 힘든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가 담겨 있으며, 바로 그런 것들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세계와 그것을 지탱하는 세계관을 만드는 일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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