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이 지난 6월17일 신작 <해안선>의 촬영을 시작했다. <나쁜 남자>로 또 한번 격한 찬반논란에 휘말렸던 김기덕 감독이 이번에 만들 작품은 어떤 영화일까? 제작발표회를 겸한 해병대 지옥훈련 퇴소식이 열린, 전라북도 위도의 <해안선> 촬영현장을 다녀왔다.편집자----6월17일 오전 8시, 40명이 넘는 영화담당 기자들을 태운 두대의 관광버스가 덕수궁을 출발, 김기덕 감독의 신작 <해안선> 촬영장인 위도를 향했다. 공중파 3사의 방송카메라에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를 망라한 취재진 규모를 보자, 묘한 느낌이 밀려왔다. 96년 데뷔작 <악어>의 첫 시사회가 열린 직후 김기덕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좀 흥분했다. “한강변에서 <악어>를 찍는 동안 아무도 취재하러 오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어떤 경력도 알려진 적 없는 감독이 찍는, 스타가 나오지 않는 데뷔작 촬영현장에 기자들이 찾아가지 않은 건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건만 김기덕 감독은 조바심을 냈다. 아마 아무도 내 영화를 주목하지 않으리라는 불안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그는 절박했다. 그때 그는 연출만 끝내면 더이상 할 일이 없는 감독이 아니었다. <악어>를 걸겠다는 극장은 거의 없었고 <악어>라는 영화제목을 들어본 기자도 많지 않았다. 극장 관계자를 만나 <악어>를 틀어달라는 부탁도 직접 해야 했고, 기자에게 시사회에 와달라는 전화도 직접 해야 했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5시간 걸리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까지 찾아가는 수십명의 기자들을 보면서 새삼 <악어> 시사회 때 기억이 난다. 불과 이십여명이 찾았던 <악어> 시사회장의 쓸쓸한 풍경이 이젠 한낱 추억거리가 됐다.
“지금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인다, 탕!”
기자들을 태운 버스는 전라북도 부안군 격포항까지 4시간을 달렸다. 격포항에 가까워지자 도로 오른편으로 변산반도의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구불구불 도로가 꺾일 때마다 햇살에 부서지는 바다가 눈에 들어오지만 틈틈이 나타나는 마을은 다소 을씨년스럽다. 아직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 관광객은 거의 없고 한낮의 횟집과 가게들도 텅 비어 보인다. 격포항에 내리자 위도로 가는 페리호가 기다리고 있다. 94년 10월 292명을 수장시킨 악명높은 코스가 <해안선> 촬영장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배를 타고 격포항에서 위도항까지 40여분, 그런 다음 버스로 촬영장까지 해안선을 따라 10분쯤 달리자 오른편에 해병대 초소가 보인다. “초전박살” 네 글자가 초소 정문에 보란 듯이 걸려 있고 문 옆엔 두명의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해안 초소, “밤 7시 이후 이곳을 접근하는 자는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살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적힌 경고문, 파도가 깎아놓은 해안 절벽의 눈부신 풍광을 무안하게 만드는 이곳이 <해안선>의 주요 무대다. 수려한 자연을 가로막고 서 있는 험상궂은 군 초소에서 김기덕 감독은 간첩을 잡겠다는 의욕에 넘쳐 실수로 민간인을 사살하고 미쳐버린 어떤 군인의 이야기를 할 작정이다. 미군기지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 죽은 혼혈아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수취인불명>처럼 <해안선> 역시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이다. 5년간 해병대에서 근무했던 김기덕 감독이 보도자료에 적은 연출의 변은 다음과 같다.
“탕! 귀를 찢는 총성에 잠을 깨면 얼마 전 개봉한 <나쁜 남자> 포스터가 걸려 있는 내 방이다. 다시 잠이 들면 죽지 않은 간첩이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재빨리 벌떡 일어나 무장과 총을 찾으면 <파란 대문> 포스터가 걸려 있는 내 방이다. 다시 잠이 들면 고참의 주먹이 피멍 든 내 가슴을 치고 기합 든 고함소리로 필승을 외치다 깨면 <섬> 포스터가 걸려 있는 내 방이다.
2002년 오늘 어디서부터 온 긴장인지 모르지만 새벽 2시에 근무를 나가는 꿈을 꾸는 이 악몽의 뿌리에는 늘 특수부대 무장을 하고 해안을 자학적으로 뒹굴고 분단의 녹슨 철조망을 뚫고 기습침투하던 한 해병이 떠오른다. 어둠 속에 총구를 겨누고 간첩이 나타나면 의심없이 사살할 준비를 하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그 살기를 소모하며 살아갈까? 이기고 지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에서 오늘밤도 여자 대신 총을 껴안고 시퍼런 두려움으로 어둠 속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다림의 불안이 터질 듯한 욕망을 폭발하며 어둠 속으로 총을 갈기며 우리는 서서히 미쳐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인다. 탕!”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제대한 뒤에도 한동안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무의식의 심연까지 파고든 어떤 경험이 잠든 사이 의식의 표면을 뚫고 가끔씩 솟구친다. 김기덕 감독은 해병대 시절 민간인을 사살한 뒤 미친 군인을 본 적이 있고 지난해 11월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옮겼다. 상황설정이나 영화를 만든 계기로 보면 <섬>이나 <나쁜 남자>보다 <수취인불명>에 가까운 영화가 나오리라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해안선>의 주요 무대인 이곳 위도의 해병대 초소가 주는 느낌도 <수취인불명>과 비슷하다. 마른 황토 위에 시커먼 휘장을 두르고 서 있던 <수취인불명>의 미군기지와 아름다운 해변을 철조망으로 감싼 <해안선>의 군 초소는 뚜렷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건 위압적인 군부대의 존재가 주위 환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해안선>의 해병대 초소는 한눈에 시대착오로 보인다. ‘초, 전, 박, 살’ 네 글자가 불러오는 느낌은 무섭다기보다 어리석고 유치하다. 빨강 바탕에 노랑 페인트로 쓴 글씨도 촌스러움을 돋보이게 한다. 감독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외부인의 눈에 말도 안 되는 짓으로 보이는 수많은 일이 군부대에선 아무도 의심치 않는 진리가 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미쳐간다. 정상과 비정상, 군인의 의무와 인간의 자유의지, 군대질서와 사회질서, 철조망으로 갈라놓은 경계를 <해안선>은 조금씩 허물어갈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다른 작품처럼 <해안선> 역시 어떤 공간의 영화다. 한강다리 아래의 <악어>, 센강변에서 찍은 <야생동물 보호구역>, 포항의 쓸쓸한 해변이 무대인 <파란 대문>, 안성의 어느 저수지에서 찍은 <섬>, 대학로에서 3시간 만에 촬영한 <실제상황>, 미군기지 주변의 삶을 포착한 <수취인불명>, 사창가를 세트로 재현한 <나쁜 남자> 등 지난 7편의 영화에서 그가 선택한 장소는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눈에 보여줬다. <해안선>을 찍을 위도의 모습도 다르지않다. 해안의 절경에 어울리지 않는 군부대와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한적한 해변 마을이 어쩐지 뭉크의 그림 <절규>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해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이 김기덕 감독에겐 절망의 메아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미쳐가는 것에 관하여”
오전 8시에 서울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에 가깝다. 본격적인 더위를 몰고올 여름의 태양으로 눈이 아리지만 근방엔 그늘 하나 없다. <해안선> 출연진은 3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영화사에선 초소 군인으로 나올 25명의 배우가 지난주 토요일부터 2박3일간 해병대 지옥훈련이라는 걸 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은 2박3일간 지옥훈련을 끝내고 퇴소식을 하는 날, 조금 있으면 초소 앞으로 12km 구보를 마친 배우들이 들어온단다. 제작발표회를 겸한 깜짝 이벤트겠거니 하던 취재진은 막상 초소 앞으로 뛰어오는 시커먼 사내들의 모습에 눈을 의심했다. “누가 장동건이지?” 철모를 눌러쓴 채 웃통은 벗고 온통 검은 진흙을 덮어쓴 군인들, 그중 누가 장동건인지 식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취재진을 놀라게 한 건 그다음부터. 빨간 모자를 쓴 해병대 조교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25명의 훈련병(이순간 그들은 배우가 아니라 완전한 군인이었다)이 피부를 대면 타들어갈 듯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반복한다.
“누구야? 신음소리 내는 게, 입 다물어!” 서슬퍼런 조교의 한마디에 누구 하나 반항하지 못한다. 퇴소식에 앞선 마지막 얼차려는 훈련병들을 향한 비인간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공포의 선착순 달리기가 계속되고 훈련병들의 고통스런 신음은 소리가 되지 않아도 지켜보는 이들의 귀에 생생히 들려온다. “3번 학생, 뭐하는 거야?” “넷! 3번 학생 장동건.” 그제야 깃발을 든 훈련병이 장동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뒤로 누워, 일어서, 뒤로 누워, 일어서.” 취재진 앞에서 얼차려를 받는 장동건의 모습은 결코 쇼가 아니다. 누군가 뛰어들어 말리고 싶은 광경은 한참 계속됐다. 오후 3시가 넘어 시작된 퇴소식, 연병장에 정렬한 25명은 총검술 시범을 보였고 마침내 지옥훈련이 끝났다. 취재진은 그제야 감독과 배우를 에워쌌다.
장동건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며 2박3일간 훈련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털어놓는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고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했던 게 사실이다. 힘든데 버티는 다른 배우들 보면서 악으로 견뎠고 지금은 영화 한편 끝냈을 때처럼 가슴 벅찬 느낌이 있다.” 장동건은 <해안선>에서 민간인을 사살하고 미쳐버리는 군인 강 상병으로 나온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고 <해안선>은 시나리오 보기 전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감독님이 서로 좋아하지만 어울리진 않는 사이 같다는 말한 적이 있는데 진짜 어울리는지는 살아봐야 아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기로 했다”고 이번 영화에 출연한 이유를 설명한다. <공공의 적> <아 유 레디?> 등에 출연한 김정학은 강 상병의 동기인 김 상병으로 나온다. 지옥훈련 입소 직전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있던 그에겐 이번 훈련이 목숨을 건 모험 같은 것이었다. 어째서 이런 지옥훈련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날 김기덕 감독은 “영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짧게 답했지만 <해안선>이 표현하려는 군인들의 광기를 지옥훈련처럼 한눈에 보여주는 예도 없다. <해안선>은 미쳐가는 것에 관한 영화다.
현장의 풍경이 백마디 말을 대신한다
취재진에게 이날 주어진 인터뷰 시간은 30여분에 불과했다. 5시간 넘게 그야말로 산넘고 물건너서 찾아간 촬영장치곤 야박하기 짝이 없는 일정이지만 인터뷰보다 현장의 풍경이 영화에 대한 많은 것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실은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그럴 것이다. 그는 제한된 공간에 구획을 짓고 거기에 사회와 권력, 이데올로기와 남녀관계의 축소판을 그린다. 위도의 아름다운 해변에 들어선 해병대 초소 세트의 비대칭구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들 휴가를 떠나는 여름 한철, 이곳에서 구슬땀을 흘릴 제작진은 그런 비대칭구도 안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미친 인간들의 절망적 몸부림을 그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