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장동건의 <해안선> [3] - 김기덕 감독 단독 인터뷰
2002-06-28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모순에 대해서 자백해보자˝

수십명의 기자가 몰린 <해안선> 촬영현장에서 간단한 대답만 하고 자리를 정리한 김기덕 감독에게 이틀 뒤 전화를 걸어 <해안선>의 이모저모에 대해 들어봤다. <나쁜 남자>가 끝난 뒤 강원도에 <수취인 불명>의 빨간 버스를 갖다놓고 콩과 옥수수를 기르는 등 생활의 변화를 꾀하면서도 창작의 속도를 늦추지 않던 그는 그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해안선> 두편을 준비해왔다. <해안선>을 끝내고 바로 촬영에 들어갈 <봄 여름…>은 동자승이 해탈하기까지를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보여줄 작품. 제작사인 LJ필름은 <해안선>이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 <봄 여름…>은 다소 다른 색깔의 작품이라 <봄 여름…>을 먼저 찍길 바랐지만 주왕산에 지을 예정인 세트가 환경부와 환경단체의 비협조로 미뤄지는 바람에 <해안선>부터 찍게 됐다. 다음은 예정된 야간촬영이 취소된 6월19일 밤 11시, 위도의 제작진 숙소와 전화로 연결해 진행한 인터뷰.

-그간 준비하던 작품이 <해안선>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두편이었다. 이중 <해안선>을 먼저 촬영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준비하던 작품은 두편말고 <활>도 있었고 여러 가지였다. <봄 여름…>은 지난해 11월에 찍으려던 건데 촬영협조가 안 되고 해서 미뤘다. <해안선>에 대한 구상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했다. 2억∼3억원 저예산으로 찍을 요량으로 했다가 <봄 여름…>이 늦춰지면서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장동건이 출연하면서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보도자료에 인용된 감독의 말을 보면 <해안선>이라는 영화는 당신을 짓누르는 어떤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마치 이 영화를 거치지 않으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함이 있는 듯하다

=<봄 여름…>은 인간이 성숙해가는 어떤 철학적 경지를 그리는 건데 과연 내가 지금 그걸 표현할 수 있을까 의심스런 부분도 있었다. 촬영협조가 문제되기도 했지만 그런 내 상태가 작용하기도 했을 거다. 감독의 말에 쓴 것은 사실이다. 해병대에서 5년을 보낸 뒤 제대한 뒤에도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군대생활이 나를 세뇌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격성, 경계심, 의심, 적대감 그런 것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 배우들이 2박3일간 해병대 지옥훈련을 하는 걸 보면서 다시 악몽을 꾸기도 했다. 군대는 굉장히 단순하고 무식한 조직이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투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이렇게 쉽게 길들여지는구나를 확인하게 된다. 적을 철조망 너머에서 찾을 게 아니다. 군대를 거쳐온 우리, 군대를 갈 우리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총질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가학이 아니라 자학이다.

-배우들의 2박3일 해병대 지옥훈련은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단순히 그럴듯한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광기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퇴소식하던 날, 배우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에 미쳐돌아가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훈련이 끝나고 장동건과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고 시나리오에 표현된 광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 지옥훈련을 거치면서 배우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지만 옆사람이 하니까 나도 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 훈련을 하고 나면 자신이 위대하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게 어떤 광적인 집착으로 변하기도 한다. 장동건도 그런 걸 이해하겠다고 말하더라. 영화에 드러날 계급구조, 군대질서를 위해서도 필요한 훈련이었다.

-<해안선>은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악어> <파란 대문> <섬> <나쁜 남자> 등 좀더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와 달리 <야생동물 보호구역> <수취인불명> <해안선>은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은 군대라는 집단에서 경험한 어떤 것이 투영돼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동족과 분단의 모순을 그리고 <수취인불명>에서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그린 것처럼 <해안선>도 어떤 대치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남과 북의 대치에서 비롯된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끼리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모순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 간첩이 들어온다고 삼면이 바다인 나라의 해안선에 모조리 철조망과 군부대가 있다. 많아야 1년에 1∼2명 들어올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해안에만 감도는 적대감, 긴장감, 초조함이 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매우 민감한 소재이다. <해안선>은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모순에 대해서 솔직히 자백해보자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에 공감할지 모르지만 정작 하고 싶은 얘기가 꼭 군대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거 아닌가 싶다. 구획을 지어놓고 적은 저 너머에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죽이려 드는 것 아닌가.

-다른 한편 <해안선>은 가장 홀대받은 영화 가운데 하나인 <실제상황>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상황>에서 증오심으로 인해 살인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이 <해안선>에 투영돼 있다.

=졸병이 고참에게 대드는 하극상에 대한 이야기가 비슷할 거다. 군대에선 물리적 우월성이 지적인 우월성을 누르는 일이 흔하다. 매우 체계적이고 확고한 것 같지만 군대에서 질서는 겉보기만큼 완전하지 않다. 계급장이 그걸 은폐할 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스타와 작업하지 못했다. 이번에 장동건과 작업하게 됐는데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김기덕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목표로 하는 건 아닌데 스타를 기용함으로써 흥행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건 아닌가.

=부담스런 것은 없다. 장동건도 그런 부담이 있다면 출연할 수 없다고 했다. 장동건이 출연하면서 더 멋진 엔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는데 본인 스스로 거부했다. 작품 때문에 여러 번 만났고 촬영을 시작했지만 볼수록 좋은 배우인 것 같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렇지만 <해안선>은 ‘경계’라는 단어가 핵심인 것 같다. 출입통제구역과 관광지, 군인의 의무와 살인, 정상인과 미친 사람, 고참과 졸병, 군대질서와 사회질서 등의 경계가 있고 영화는 그걸 넘나들며 교란시킨다. 동어반복이라는 말도 듣겠지만 김기덕 영화의 주제 중 하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쁜 남자>에서 유리를 통해 표현된 것이 <해안선>에선 철조망을 통해 드러난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면 유리를 깨야 하지만 <해안선>의 철조망은 다가가면 찔리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해병대 초소 연병장에 철조망으로 네트를 만든 족구장을 만들었고 족구장 바닥에 남과 북의 지도를 그렸다. 군인들은 단순한 게임에서도 주입된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그게 내가 이 사회에서 거듭 느끼는 답답함이기도 하다. 완전히 길들여져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바다만 해도 그렇다. 그건 우리 것인데 남에게 내주고도 그건 원래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당신의 영화는 야외 공간이 중요하다. 이번에 촬영장으로 택한 위도도 그럴 텐데 관광으로 먹고사는 을씨년스런 마을과 아름다운 자연, 거기 떡 하니 버틴 해병대 초소가 매우 이상한 조화를 이룬다. 이곳에 버티고 있는 해병대 초소는 그야말로 아주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의 장소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인가.

=원래 동해안에서 찍고 싶었지만 국방부에서 촬영 허가를 내주지 않아 못했다. 전방부대와 유사한 모델을 찾다가 화진포에서 찍으려 했는데 군에서 <해안선> 촬영에 협조하지 않았다. 대안을 물색하다 섬은 군부대 관할이 아니라 경찰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위도를 택했다. 와서 보면 알지만 여기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은 전부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곳이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아름다운 장소일수록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다.

-강원도에서 빨간 버스를 개조해 살고 있다던데 생활환경의 변화는 없나. 어쩐지 지난 영화들이 보여준 격정에 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잡아보는 영화가 나올 듯한 느낌도 든다.

=촬영 때문에 자주 못 가는데 언젠가 제대로 농사를 짓고 싶다. 땅을 사서 콩이랑 옥수수를 심었는데 지금은 땅에 대한 책임을 못 지고 있다.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 아닌 평범한 시골이지만 새소리, 물소리만 들려서 좋다. 뭔가 달라져서 환경을 바꾼 게 아니라 달라지고 싶어서 환경을 바꾼 것이다. 영화에 대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꼭 이래야 하나 혼란스럽기도 하고.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사이에 균열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다 스스로 남이 아는 나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거 아닌가 싶은 두려움도 있다.

-<봄 여름…>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가? 이미 주왕산에 세트를 짓고 있다던데.

=주왕산에 암자 세트를 짓고 있는데 그 장소는 이미 4년 전에 발견한 곳이다. 수백년 전 왕이 만든 연못이 있고 300년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어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장소다. <해안선>이 끝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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