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죽어도 좋아>, 죽여도 좋은가? [4] - 박찬욱의 격문 ①
2002-08-02
등급심의위에 부치는 박찬욱의 격문

죽어도 싫다!

나요, 더이상 잡문을 짓거나 인터뷰 같은 데 얼굴 내밀지 않고 조용히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쓰려던 참이었거든요? <죽어도 좋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걸작을 만들어야지 하는 각오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개봉하지 말라니요. ‘제한상영가’라니요, ‘영화 못 튼다는 걸 허락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요. 당신들이 뭔데 시나리오도 못 쓰게 하고 사람 열받게 하시는지요, 안 그래도 더워죽겠는데.

아, 죄송합니다. 좀 흥분했네요. ‘당신’ 운운했던 건 취소하겠습니다. 사실 흥분할 만도 한 게, 제가 누구냐하면은요, <죽어도 좋아> 광팬이거든요?(말하자면 <고양이를 부탁해>와 조영남씨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아>가 좋아죽겠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한참 전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문자막 프린트 제작지원 심사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VHS카세트로 받아서 집에서 보는 방식이었지요. ‘뭐야, 이거? 처음 듣는 제목에 처음 보는 감독인걸?’ 이렇게 생각하며 재생 버튼을 누르고 한 10분이나 지났을까요? 미친 듯이 아내를 불렀습니다. 나란히 앉아 처음부터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마루바닥을 데굴데굴 뒹굴다시피 해가며 웃었습니다. 끝날 때쯤엔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그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그 영화 얘기를 해댔습니다. 기자들을 만나면 빨리 감독 인터뷰 잡으라고 충고했고 감독들을 만나면 우리 반성하자고 촉구했으며, 민간인을 만나면 “기다려라, 죽이는 영화가 너희 곁을 찾아갈 것이니. 한국영화, 이제 장난 아니니라”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번 판정으로 저, 완전히 바보됐습니다.

구강 아니라 비강으로 한들 뭐가 대숩니까, 아래로 들어가면 정상이고 위로 들어가면 변태입니까? 국가가 체위도 정해주나요? 남성기가 크게 잡혀서 안 된다고요? 중요한 건 어느 신체기관이 찍혀 있느냐가 아니잖습니까. 영화가 무슨 축군가요? ‘핸들링’처럼 ‘페니슬링’하면 반칙인가 보죠? 그럼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은 미술사의 숱한 걸작들은 다 뭡니까. 그리고, 성교를 가짜로 했든 진짜로 했든 그런 게 왜 문제죠? 가짜로 하는 영화들일수록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나요? 예를 들어 너무 실감나게 연기해서 꼭 진짜 같아 보이는 어떤 에로틱한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배우들을 불러 실제 삽입 여부를 조사 확인한 다음, “삽입이면 제한이요, 불입이면 십팔이라…”, 이러실 건가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기들 좋아서 진짜로 성교하는 장면과 아무 애정도 없는 배우들이 억지로 성교하는 척만 하는 장면 중에 어느 쪽이 보기에 아름다운가요? 그 장면에서 심의위원 여러분은 정말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나요, 아니면 ‘나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은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셨나요. 전자면 과민이요, 후자면 오만이라….

제 생각에는 여러분이 뭔가를 심판하려는 자세로 영화를 봐서 그런 착각이 생겼지 않았나 싶군요. 그냥 편한 마음이었다면 여러분도 아마 저희 부부처럼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희한한 경험을 하셨을 텐데, 참 안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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