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CG보다 실사를, 그리고 기적을 믿는다˝
7월23일 뉴욕 리젠시 호텔에 마련된 인터뷰룸으로 쓱, 들어온 샤말란의 첫인상은 “설마, 저 사람이…”라는 쪽에 가까웠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란 얼굴, 중키에 그리 날렵하지 않은 몸매까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비범함이나 날카로움과는 그리 관계없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히 10초 뒤, 편견은 격파됐다. 의자에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낸 그의 말들은 단호했고, 확신에 넘쳤다. 이 30대 초반의 시네아스트는 마치 숙련된 장인처럼 자신의 창작세계를 줄줄 풀어냈지만, 태도만큼은 시종 성실함 그 자체였다. 결국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그의 천재성보다 진지함과 성실성을 믿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24분17초 뒤 그가 자리를 떠났을 때, 기자들의 입에서 “역시…”란 말이 동시에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싸인>의 시작 부분 타이틀 크레딧은 히치콕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고전적 스타일이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촬영하기 전에 음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음악은 히치콕의 영화 여러 편에서 음악을 맡았던 버나드 허먼의 음악과 매우 비슷했다. 우리는 허먼의 음악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 음악을 버릴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사용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을 했다. 하지만 버리기엔 너무나도 훌륭한 음악이어서 영화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선 1940년대의 누아르영화를 연상케 하는 크레딧을 만들기로 했다. 커다란 글씨가 스크린에 쿵쿵 박히는 그런 스타일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고전적인 스타일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런 커다란 느낌과 정적인 분위기의 화면을 병치시키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했다.
-<싸인>뿐 아니라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에서도 마찬가지로, 컴퓨터그래픽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액션장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나.
=사실 나는 컴퓨터그래픽에 대해 매우 불편한 느낌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요즘 영화들은 CG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나는 CG는 오로지 실사로 촬영할 수 없는 장면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될 수 있으면 실제로 촬영을 해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 안 되면 컴퓨터그래픽을 써야 한다. <식스 센스>에서 유령이 등장할 때, 추운 기운 때문에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장면의 경우를 보자. 이 장면은 CG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CG를 쓰게 되면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얼음으로 가득 찬 거대한 방을 만들고, 오스먼트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가서 연기를 하게 했다. 물론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관객은 약간이나마 진실성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싸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미스터리 서클을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었다. CG로 처리하면 현실의 까칠한 부분이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았다. CG로 만든다면 관객이 이 500피트짜리 미스터리 서클을 누군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영화는 고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 나는 현대적인 영화 제작방식보다는 고전적인 방식을 택하는 편이다. 살인자가 있고 희생자가 있다고 할 때, 나는 살인자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희생자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희생자가 살인자의 소리를 듣거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표현할 것이다. 관객은 그것을 통해 희생자가 살인자의 존재를 감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머릿속으로 재현하는 것이 실제 장면을 보는 것보다 훨씬 무섭기 때문이다. 칼든 살인마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마치 관객에게 걱정하지 마, 이건 널 놀라게 하려는 거야,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싸인>에는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을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단지 운명, 우연이라고 믿는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너는 어느 쪽이냐”는 대사가 나온다. 당신은 두 가지 타입 중 어느 쪽인가.
=나는 확실히 기적을 믿는 쪽이다. 어떤 영역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손이 우리를 이끄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내가 그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손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만큼은 염두에 두고 살고 있다. 나는 힌두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앙심이 깊지는 않다. 대신 우리 부모들은 매우 열렬한 신자들이다. 나는 영적인 존재를 믿지만, 그다지 신앙적이지는 않다.
-<싸인>을 포함해 당신의 최근작 세편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아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내게 있어 초자연적 현상은 영적세계나 믿음처럼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초자연적 현상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언가,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현실화해 믿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심각한 무언가를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다.
-<언브레이커블>에서는 만화, <싸인>에서는 미스터리 서클 등 일종의 대중적인 현상, 또는 대중문화 아이콘을 차용했다. 어떤 영향관계가 있을 법하다.
=미스터리 서클이나 만화는 내가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면서 관심을 가져왔던 주제다. 만약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왔다. 특히 만화적인 방법론은 아직도 내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를 주제로 한 영화를 한편 더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미스터리 서클을 외계의 존재와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린 것인가.
=애초 이 영화를 구상할 때는 10∼12명의 가족이 둘러앉아 있고, 이들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놀라운 현상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이들 캐릭터를 놓고 작업을 하려 하니까 <타워링> 같은 재난영화와 비슷해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울부짖고 기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그런 영화는 내게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결국 한 가족이 중심이 될 때까지 폭을 좁히고 좁혀나갔다. 그리고 미스터리 서클은 이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아이디어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괴상한 아이디어 파일’(weird idea files)에 보관돼 있던 내용이었다. (웃음) 그런데 이 둘을 연결시키면서 나는 깨닫게 됐다. 아, 둘 다 외계인에 관한 내용이군, 이라면서.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제임스 본드 스타일로 시작하자, 그러니까 미스터리 서클을 발견하는 충격적이고 강한 첫 장면으로 문을 연다고 생각하면서 이 두 가지 요소를 더하니까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다. 외계의 존재에 관해 얘기하지 않으면서 외계의 존재를 얘기하는 훌륭한 방법 말이다. 영화에서도 40분이 넘도록 외계의 존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게 됐다.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면서 주제도 깊어졌다. 두 가지의 커다란 주제를 한데 합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영화 후반부에 반전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지.
=앞의 두 영화에서도 애초부터 ‘반전을 보여줘야지’ 하면서 시나리오를 쓴 것은 아니다. 스토리를 발전시켜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엔딩이 반전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내겐 언제나 같은 과정이다. 물론 나는 영화에는 항상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4분의 3 지점에서 딱 세워놓고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냐고. 그럼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답이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그럼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는 거다. 관객 모두 아이디어를 내지만, 어떤 것도 맞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설계하는 거다. 반전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이 기대하지 않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조차도 비슷하다. 너무 확실한 결말을 놓고 쓰면 나 역시 지루해진다. 때문에 내 이야기는 쓰는 과정에서 계속 변화해가곤 한다. 단순한 로맨스영화를 못 쓰는 이유도 이런 때문인 듯하다. 결국에 가서 남자가 여자를 차지한다는 결말을 정해놓은 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내겐 맞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계속 이런저런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거대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면서도 궁극에 가서는 가족이라는 작고 감성적인 곳에 초점을 맞춘다. 혹시 <맨 인 블랙>처럼 상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하는 영화는 생각해본 적이 없나.
=음…. 내 생각에 나는 매우 진지한 사람인 것 같다. (웃음) 나도 <맨 인 블랙> 같은 영화를 보면 즐겁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관객을 상대로 농담을 던지고, 웃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람들을 엄청나게 웃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고민해야 하는 일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성취감을 주거나 애정을 느낄 수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순전히 일이라고 생각하면 잘 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지금 받는 돈의 3배를 줄 테니 그런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해도, 나는 ‘너 지금 농담하는 거니? 말도 안 돼’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 것이 내게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돈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남들보다 많이 주면 뭐든 해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영혼을 팔 수 있다는 얘기다. 하긴, 만약 내가 <맨 인 블랙>을 만들었다면 외계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등의 주제를 다뤄서 영화가 무겁게 흘렀을지도 모른다. 간혹 LA로 갈 때가 있는데, 배우나 산업 종사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나는 내 가족과 나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거기서 재미까지 찾으니 윤리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나. 하지만 그들은 돈을 위해 일한다. 거기엔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프로덕션 노트에 따르면 <싸인>은 <바디 스내쳐> <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등의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의 영화세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 영화가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우선 <엑소시스트>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내게 큰 영향을 줬다. 이 영화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영화를 본 뒤 집에 돌아와서도 무서움을 느껴지는 그런 영화다. <엑소시스트>의 이런 점은 내 영화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고 있다. 또 하나가 있다면 <죠스>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끔찍한 장면과 유머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론이 있다면.
=내 스스로 매직 트릭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이 있다. 우선 내가 A, B를 던져주면 관객은 C를 예측하게 되고, 또 A, B를 제시하면 C를 떠올리게 되고, 이런 식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A, B를 제시하고 관객이 C라고 생각할 때, 그건 아니다, 이게 C다, 라면서 다른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매직 트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