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센스>-공포물인 줄 알았다. 사랑 이야기였다
영화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샤말란의 영화인생은 8살 때 아버지에게 8mm 카메라를 선물받으면서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샤말란은 17살까지 무려 45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샤말란의 우상은 스티븐 스필버그(역시!)였고 <죠스> <레이더스>를 특히 좋아했다. 샤말란은 대학교 4학년 때 첫 연출작인 <프레잉 위드 앵거>(Praying with Anger)의 시나리오를 쓰고, 92년 제작에 들어간다. 미국 출신의 젊은 교환학생이 인도의 대학에 가게 되지만, 오히려 고향인 인도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이야기. 실제로 인도에 갔을 때 샤말란이 겪은 경험과 느낌을 담았다고 한다. 제작, 감독, 각본, 연기까지 도맡으며 인도에 가서 촬영한 <프레잉 위드 앵거>는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나리오 작가 샤말란은 이미 인정을 받았다. <레이버 오브 러브>는 이십세기 폭스에 75만달러에 팔렸고, 콜럼비아는 E. B. 화이트의 명작동화 <스튜어트 리틀>의 각색을 의뢰했다. 미라맥스 제작으로 연출한 두 번째 작품 <와이드 어웨이크>(Wide Awake)에는 로지 오도넬, 데니스 리어리, 다나 딜라니 등 꽤 알려진 배우들이 출연했다.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소년과 할아버지의 친숙하고도 신비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권유로 규율이 엄한 가톨릭 학교에 다닌 경험이 토대가 된 영화. <프레잉 위드 앵거>와 <와이드 어웨이크>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두 작품이 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고작 50만달러였다. 아직 샤말란의 밤은 시작되지 않았다. 두편의 영화를 만들고 난 샤말란은 자신의 제작사인 ‘Blinding Edge Pictures’를 설립한다.
1년간 각본을 쓴 <식스 센스>는 디즈니에 무려 300만달러를 받고 팔았다. 디즈니는 <식스 센스>가 과거의 공포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고, 샤말란에게 감독까지 맡겼다. 그 도박은 성공했다. 브루스 윌리스가 나온다는 것말고는 어떤 흥행요인도 없었던 <식스 센스>는 북미에서 2억4천만달러를 벌어들였고, 전세계 수익은 6억6100만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언브레이커블>은 각본료 500만달러, 연출료 5천만달러를 받았고, <싸인>의 판권으로는 8자리 수치의 금액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최고의 각본료를 받는 작가가 되고 싶고 제작자들로 하여금 좋은 각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게 만들고 싶다”는 샤말란의 호언장담은 이루어진 것이다.
<식스 센스>에서 <싸인>까지 이어지는 샤말란의 승승장구는 분명 탁월한 시나리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샤말란의 시나리오는 익숙하면서도 독특하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출발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결말과 보편적인 감동을 안고 사뿐하게 땅에 안착한다. <싸인>의 제작자인 프랭크 마셜은 “그의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그의 영화의 주제들이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이다. <식스 센스>의 경우 관객은 맨 처음 유령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두 번째 볼 때는 그게 러브 스토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싸인>도 마찬가지다. <싸인>은 SF 스릴러영화인 동시에, 믿음과 영혼에 관한 진지한 드라마다. 관객은 <싸인>에서 인간의 감정들이 초자연적 사건에 의하여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보게 된다”고 말한다. 샤말란이 생각하는 좋은 아이디어의 기준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서스펜스가 있는가, 감동이 있는가, 인간미가 있는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아이디어인가”이다. 그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초자연적 사건과 인물들의 보편적인 감정이 정교하게 어우러진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언브레이커블> - 유리인간, 슈퍼 히어로의 꿈을 꾸다
<언브레이커블>을 보자. <식스 센스>의 성공에 힘입어 <언브레이커블>도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평은 엇갈렸다. 심지어 만화의 슈퍼 히어로에 몰두한 엘리야가 초인을 찾기 위해 사고를 일으키는 내용을 두고, 샤말란이 만화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언브레이커블>은 걸작이다. <언브레이커블>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이의 처절한 자기고백이다. 엘리야는 조금만 부딪혀도 뼈가 부러진다.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제대로 거리를 걸어다닐 수도 없다. 만화책에 열광했던 엘리야는 초인들의 활약을 보면서 의문을 갖는다. 모든 것은 대립되어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다. 그럼 ‘유리 인간’인 내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언브레이커블’도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언브레이커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없는 것이다. 왜 신은 나와 같은 ‘허약한’ 존재를 만들어야만 했는가.
M. 나이트 샤말란은 <언브레이커블>을 아주 느리게 진행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시선과 호기심을 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엘리야가 찾는 것은 언브레이커블이다. 대형사고에서 연속으로 살아난 던은 엘리야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던은 자신의 힘을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던의 자각은 엘리야를 만나면서, 그의 대립항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엘리야의 비극은, 그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비극이다. 그는 최악의 비극을 스스로 준비한다. <싸인>에서 그래험은 동생에게 묻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사인이라고 믿는 사람과 단지 운명, 우연이라고 믿는 사람들. 너는 어느 쪽이냐”라고. 엘리야는 신의 사인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선다. 그만큼 그는 절박하다. 초인을 찾아내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초인을 찾지 못하면, 그의 인생이란 싸구려 휴짓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만화 속의 슈퍼 히어로. 그 단순하고 과장된 만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현실에 끌어들여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지만, 엘리야와 던의 캐릭터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싸인>의 제작자인 제작자 샘 머서는 “그의 영화는 심리스릴러이며 서스펜스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른 감독들과 가장 차별되는 점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들을 일상적인 평범한 사람들에게 접목시켜도 매우 자연스러울 만큼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객이 캐릭터를 통해서 느끼는 공포와 감동의 폭이 더 크고 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말할 것도 없고, 던의 자각 역시 보통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부상을 당한 것으로 가장하고,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평범한 가장이 된 남자. 그건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누구나 ‘슈퍼 히어로’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슈퍼 히어로를 원하지 않는다. 그걸 원하는 것은, 엘리야 같은 ‘유리 인간’들이다. 많은 만화광들이 ‘영웅 탄생기’인 <언브레이커블>의 후속편을 갈망하고 있지만, 샤말란은 결코 슈퍼 히어로의 활약을 그린 속편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샤말란이 원하는 것은 슈퍼 히어로의 활약이나 유령의 공포가 아니다. 샤말란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감동과 의미다.
<싸인>은 어떤 영화?
믿음을 잃은 그대, 운명을 믿나요?
어느 날 아침, 당신의 옥수수밭 위에 거대한 동그라미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게다가 옥수수 줄기가 모두 90도로 구부러져 있고, 그 범위도 엄청나게 넓어 동네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보기 어렵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당신은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싸인>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질문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 서클의 정체를 밝혀내는 <X파일>풍 미스터리 어드벤처만을 기대해선 안 된다. <싸인>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은 미스터리 서클이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관해 사람들이 보이는 내적 반응이다. 즉, 이 불가해한 현상을 절대존재의 계시로 믿을 것인가, 그저 우연의 일치로 넘길 것인가라는 문제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그래험 헤스가 아내의 사망 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잃은 성공회 신부였다는 점이나 그의 동생 메릴이 마이너리그 최다 삼진아웃 기록 보유자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는 신 또는 자신에게 믿음을 잃은 이들이 놀라운 현상을 통해 변화를 겪는 과정을 시종 흥미롭게 전한다.
<싸인>은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처럼 샤말란 감독의 도장이 명징하게 찍힌 영화다. 스릴러와 가족드라마가 교차하고, 가슴을 옥죄는 공포와 예상치 못한 유머가 어우러지며,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전작들의 맥을 잇는다. 또 컴퓨터그래픽 등을 통한 현란한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정교하게 얽혀 있는 이야기의 힘만으로 관객을 들썩거리게 하며, 외부적 사건의 출렁거림보다 캐릭터 내면의 흐름에 충실하려는 샤말란 특유의 고전적 방법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샤말란의 작품답게, 후반부에 놀라운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영화의 매력.
믿음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하는 그래험 신부 역의 멜 깁슨이나 인생의 패배자로 싱겁게 살아가는 메릴 역의 와킨 피닉스는 기존의 마초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컬킨가의 막내 로리 컬킨, 보 역의 아비게일 브레슬린 같은 아역 연기자들과의 조화도 매끄러운 편.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샤말란 감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는 꽤 중요한 역할인 레이 역을 맡아, 연기면에서는 그가 숭배하는 히치콕보다 >강한 의지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