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장이모의 <영웅> 시사기 [3] - 장이모·이연걸 인터뷰
2002-12-23
글 : 박은영

"무(武)보다 협(俠)을 강조하고 싶었다. "

감독 장이모 인터뷰

장이모는 피곤해 보였다. 언제나처럼 짧은 스포츠머리인 그는 빨간색 점퍼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의 영화 <영웅>이 ‘열정과 혼란’의 색으로 지정한, 그 빨간색이 자꾸 눈에 밟혔다. 아닌 게 아니라, <영웅>을 향한 그의 마음은 ‘열정과 혼란’ 그 자체인 듯 느껴졌다. 그는 <영웅>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영화이길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와호장룡>의 아류 또는 단순한 상업영화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내비쳤다.

-당신은 서극이나 이안과 달리 무협영화를 보지 않고 자란 세대다. 그런 당신이 홍콩 장르인 무협을 택한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문화대혁명이 있던 1967년에 나는 17살이었다. 당시 무협소설은 금서에 속했는데, 이때 우연히 접하고는 관심을 갖게 됐다. 무협영화로 처음 본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큰 충격을 받았고, 그뒤로도 좋은 무협물이라면 가능한 한 많이 보려고 했다. 서극이나 이안은 어려서부터 많은 무협물을 접했겠지만, 시간적으로는 몰라도 양적으로는 나도 남부럽지 않게 많이 봤다. 나는 대학 입학도 28살에 했고, 데뷔작도 37살에 찍었다. 모든 게 조금씩 늦는 편이다. (웃음)

-진시황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영화 소재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진시황릉인 병마용이 있던 산서 지방이라, 어릴 때부터 가깝게 느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받은 느낌을 담아내보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 속에 산서지역의 사투리와 북방계 특유의 강렬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다. 진나라, 그리고 진시황은 중국 소설과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대중이 친근하게 느낀다는 장점도 있었다.

-무협 서사극치고는 상영시간이 짧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본래 영화를 길게 찍지 않는다. 또 영웅 캐릭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들의 결단력과 힘을 부각시켜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굵고 짧게 묘사하는 것이 적절했다고 본다.

-시각적인, 그리고 내용적인 연출 의도를 알고 싶다.

=시각적으로는 중국 전통의 미를 알리고 싶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의미의 경지(意境)’를 담아내는 것이다. 무협은 보통 싸움의 무(武)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 영화에서 협(俠)을 강조하고 싶었다. 예의를 갖추고 서로 존중하고 교류하는, 무사의 호탕한 기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찌르기 중심의 액션이 주를 이룬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중국에서는 창이 모든 무기의 으뜸이다. 그래서 칼이 아닌 창을 사용했다. 찌르는 동작에서 인물의 정신세계가 창 끝에 집중되는 형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색채에 정서적 의미가 있을 텐데.

=중국의 독특한 미적 감각과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을 사용했다. 이야기 전개가 적에서 청으로, 다시 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야기를 단락지어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적은 비설과 파검의 관계가 불안정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청은 그들의 순수한 애정을, 백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초록도 썼는데, 여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남은 색을 그냥 쓴 거다. (웃음) 또 진나라의 색을 흑으로 정했는데, 이는 진이 나라의 색을 흑으로 정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전 작품들과 전혀 다른 시도를 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무협을 원래 좋아해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몇편 더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다. 물론 예전처럼 소박한 영화들도 많이 만들고 싶다.

=일부에선 이 영화로 당신이 영웅이 되려 한다는 비판도 있다.- 비판도 많고 말도 많은 걸 알고 있다. 할리우드의 대작에 맞설 만한 스케일이 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들 하면서, 누구도 몸소 시도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비판은 신경 안 쓴다. 할리우드에 대적해 관객을 유치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이런 영화를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큰 자본을 투자하고 좋은 배우들을 불러모으는 작업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평화를 추구하는 액션에 끌렸다"

무명 역 배우 이연걸 인터뷰

할리우드에서 사악한 악당으로 전락하거나 CG에 짓눌린 액션을 구사하고 있지만, 중화권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연걸은 여전히 ‘영웅’이다. <영웅>의 이연걸은 단순히 몸의 액션이 아닌, 의식의 액션까지 선보이는, 액션의 새로운 경지에 도전하고 있다. “액션영화의 도구로 소모되거나 잊혀지지 않겠다”는 이연걸의 각오가 무(武)가 아닌 협(俠)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장이모 감독의 결단과 때를 같이한 것은 행운이다.

-<영웅>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게 벌써 두 번째다.

=스케일이 큰 액션영화에는 전룡, 영웅, 투호 같은 단어가 종종 제목으로 쓰이곤 한다. 내가 그런 영화의 주인공을 맡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직접 무술을 한다는 메리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에 출연했던 다른 액션영화는 어쩌면 청소년층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다른 각도의 액션물이면서도, 반폭력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스타일과 주제의식에 끌렸다. 평화를 추구하는 액션은 흔치 않다.

-<동방불패>는 특수효과를, <와호장룡>은 와이어액션을 도입했다는 측면에서, 액션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영웅>을 통해서도 그런 변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액션의 기술적 측면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와이어액션은 30∼40년 전부터 존재해왔고, CG 등의 특수효과도 액션의 보조수단으로 활용돼왔다. 중요한 건 스토리다. <영웅>이 기존 액션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의식 속에서 결투를 벌인다는 설정을 영상으로 풀어냈다는 사실이다. 또한 수양을 쌓은 자객들의 액션이라 기품있고 멋스럽다는 차이가 있다.

-호수 위에서 양조위와 대결하는 신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찍은 장면인가.

=사천성에 있는 호수에서 촬영한 것인데, 영화상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열흘 넘게 찍었다. 장이모 감독은 호수의 느낌이 거울처럼 맑고 잔잔하길 바랐는데, 그 호수가 고요해지는 것이 하루 2시간뿐이어서, 결과적으로 여러 날이 걸렸다. 배경과 액션을 따로 찍어 합성한 것이 아니라, 호수 위에서 실제로 와이어 액션을 해 보인 것이다. 호수 양쪽에 대형 크레인을 설치해놓고 와이어를 걸쳐 촬영한 것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후로, 영화 속에서 잘 웃지 않는다. 홍콩에서 활동할 때보다는 어둡고 음울한 역을 맡고 있는데, 어떤 결핍감은 없는지.

=미국에서는 관객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해서, 관객의 요구에 따라 캐릭터를 만들곤 하는데, 발랄하고 활기찬 역할보다는 쿨한 역할을 더 많이 원한다고 한다. 나는 맡겨진 배역에 충실하게 연기하는 것뿐이다. 아쉬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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