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색- 레드, 블루, 화이트
<영웅>은 매우 현란한 영화다. 중국 일간지들이 12월15일치 기사에서 일제히 “색채와 이미지의 향연”이라고 표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라쇼몽>처럼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서술이 화자에 따라 달라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웅>은 ‘색’으로 이야기의 단락을 나눠 보인다. 아니, 색이 그 자체로 이야기다. 이는 장이모의 작품세계를 돌아보건대,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붉은 수수밭> <홍등> 등 중국의 역사적 서사를 탐미적인 영상과 스펙터클에 담아낸 장이모의 초기작에서도 색은 매우 중요했다.
<영웅>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매 에피소드의 정조와 인물의 심리를 색채로 표현하고 있다. 무명이 영정에게 전하는 파검과 비설의 이야기는 열정과 혼돈의 붉은색으로, 영정이 무명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푸른색으로, 마지막 이야기는 진실과 순수의 백색으로 표현된다. 색채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효과에는 일장일단이 있어서, 일반 관객이 에피소드를 혼동할 위험이 줄어드는 반면, 색채와 이미지의 화면 장악력이 너무 큰 나머지,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무력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장이모가 이처럼 색에 집착하게 된 배경에는 <와호장룡>이 있다. 그는 이번 시사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와호장룡>과의 차별점에 대한 질문공세에 시달렸고, 매번 “<와호장룡>은 남방의 특성이 드러난 영화라면, <영웅>은 북방의 특성을 보여준 영화”라고 선을 그어 보였다. 장이모가 북방문화의 특성으로 든 것은 강렬한 색채에 더해 액션의 박진감이다.
실제로 <영웅>은 <와호장룡>의 액션이 정적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하고 빠른 액션을 선보이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무명이 은모장천과 대결하는 장면은 그중 백미다. 은모장천의 거처로 찾아간 무명이 결투를 청하자, 이들은 나란히 검을 빼들고 심리전을 펼친다. 의식 속에서 격렬한 결투를 벌이던 그들은 눈 먼 악사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실제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근접해서 촬영한 이들의 결투는 배우들의 숨결과 검의 울림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다. 또 하나 경이로운 장면은 파검과 무명이 호수에서 결투를 벌이는 상황이다. 이들은 호수 위를 날고 달리며 검을 휘두르지만, 거울처럼 고요한 호수엔 그 발자취조차 남지 않는다. 검 끝이 물을 가르고, 검 끝에서 물방울이 듣고, 그런 순간을 물 속에서 잡아낸 영상은 탄성을 자아낸다. 대부분의 액션은 정소동의 지휘에 따라 춤사위처럼 연출됐고, CG에 의지하지 않고 생짜로 촬영했다.
<와호장룡> 넘어설까
장이모는 <와호장룡>과 다른 영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중국적인 것들을 ‘전시’하는 전략을 택했다. 색채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영웅>에는 무술, 서예, 음악 등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표현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풍부한 편이다. 파검과 비설, 그리고 월이가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서예학교의 수련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모래 위에 글을 쓰는 모습을 틈틈히 맛보기로 선사한다(파검은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부러뜨린 뒤 그것으로 글을 쓰고, 무명과 비설은 글을 쓰다 말고 밖으로 나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소맷자락으로 막아낸다).
탄 둔의 음악은 <와호장룡>과 그 기조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북과 징, 바이올린과 전통 현, 그리고 군사들의 함성을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영정과 파검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독특한 음향이 동원된다. ‘이얏호’ 하는 남자의 고성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데, 이는 이소룡의 기합소리 같기도 하고, 중국 경극의 추임새를 응용한 것 같기도 하다. 동양의 무협을 비롯한 동양문화에 경도돼 있는 서구 관객의 눈과 귀를 홀릴 만하다.
중국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겠다는 고집과 <와호장룡>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은 전례없이 화려한 영상을 낳았지만, 그 속내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영화로 남았다. 영웅이 없는 시대, 장이모는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무사를 영웅으로 내세웠다. 영상의 힘에 비하면, 그 이야기는 낡고 공허해 보인다. 그렇지만 <영웅>은 상업영화로서의 미덕은 제대로 갖추고 있고,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한국 기자단의 반응도, 중국 현지의 반응도 엇갈렸다. <베이징만보> <베이징청년보> 등 중국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중국 현지 관객 반응도 반반이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거나 “장이모가 왜 이 영화를 찍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하나라면, 또 다른 하나는 장이모의 시도를 높이 산다는 반응이다. “이러한 자본과 배우들로 이만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또 없다. 장이모만이 관객과 매체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장이모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장이모가 <영웅>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선, 한동안 설왕설래가 이어질 것 같다. <영웅>은 12월20일 중국 전국 개봉을 앞두고 있고, 한국에선 한달 뒤인 내년 1월 말 개봉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