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황홀한 초상, 우리들의 기쁜 연대기
김소영의 <황홀경>
모던한 머리 매무새와 양장을 한 부인이 거리를 배회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내려가고 서대문 건널목에 서서 기차를 지나 보낸다. 전차에 오르더니 자리에 앉을 염도 내지 않고 선 채로 손잡이를 의지 삼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마치 머릿속에 괸 상념을 흘려 보내기라도 하듯이. 갈 곳이나 있는 걸까. 아니, 혹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일부러 미루고 있는 것일까. 허술한 난간이 세워진 길을 터벅터벅 걷던 그녀가 소스라치듯 뒤를 돌아보는 순간, 화면이 멈춘다. <귀로>(1967)에서 서울을 배회하던 문정숙. 그녀의 시선이 꽂힌 자리에 극장이 서고 은막 위에 <자유부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번>의 세 여인이 나타나 그녀를 말끄러미 응시한다.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황홀경>의 시작이다.
이애림 감독이 제작한 <황홀경>의 타이틀은 무녀(巫女)의 붉은 부적을 연상시킨다. 눈부시다는 듯 연신 깜박거리는 타이틀 속에서 ‘황홀경’의 ‘경’자는 ‘境’에서 ‘經’으로 다시 ‘鏡’으로 자꾸 재주를 넘는다. 한국 여성들에게 황홀한 경지, 황홀한 거울, 황홀한 기도문, 혹은 몸을 푸는 달거리마냥 마음을 푸는 의식으로 기능해온 한국영화의 자취를 더듬는 프로젝트임을 드러내기 위해 김소영 감독은 자신의 장편영화를 위해 마련했던 ‘경’이라는 제목을 큰맘먹고 꺼내들었다. 그녀는 이만희 감독의 <귀로>를 몇 가지 이유에서 한국영화 속 여성의 ‘황홀경’을 열어젖히는 영화로 택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되는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여성의 방황이 갖는 근거는 굉장히 추상적이다. <자유부인>만 해도 1950년대 후반에 묶여 있는데 <귀로>에서 그녀의 방황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낯선 밤 거리로 나섰던 유부녀 이응경의 외출보다도 강렬하다.” 그리고 <황홀경>의 프롤로그에서 <귀로>의 그녀는 갈 곳 모르는 혼돈에 휘말린 채 한국영화 황금기의 복판에 서서 앞뒤의 영화사를 바라보고 있다.
“기생과 여학생들은 초창기 한국영화의 중요한 관객이다. 당시 극장은 여성들이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출공간 중 하나였다. 극장을 가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떨림이요 흥분이었다. 은밀한 위반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영화구경, 그곳에는 여자들의 웃음과 눈물이 있었다. 분노와 비명이 있었다. 영화관에서 여자들은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위안했다.” (-<황홀경> 중 김소영 감독의 내레이션 )
카메라를 나비채 삼아, 김소영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여성들이 경험한 무지갯빛 절정의 모멘트들을 채집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1950년대, 60년대 객석을 메웠던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부터 만났다. 전쟁 직후의 한국영화는 봉건적 정절녀 춘향과 자유부인의 초상을 동시에 그리며 포상과 징벌을 분배했지만 내러티브의 ‘심판’이 내려지기 전까지 컴컴한 극장 안 축제의 주인공은 여자들이었다. <황홀경>은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에 대한 당대 언론의 보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 순간 반드시 질식할 듯한 외마디 소리가 부인석에서 돌발한다.” 스크린을 지배한 가장 화려한 얼굴이자 격동하는 감정의 주체였던 여자들. 극장을 나선 여성 관객은 벅찬 심장을 안고 눈물을 훔치며 그녀들의 이미지를 곱씹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아들을 떼어놓던 미혼모의 애달픈 모습이 눈앞에 삼삼해서 결국 재개봉관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는 자갈치 시장의 아주머니들, 망막에 남은 잔상에 가슴이 먹먹해 길가에서 파는 사과를 베어 물고는 사과 속살과 함께 온갖 감정을 깨물어 삼키며 집으로 힘주어 발길을 옮겼던 추억을 들려주는 중년 부인.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김소영 감독은 종로 단성사 길목을 바라보며 현인의 <서울야곡>을 뒤편에 깔았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똑같은 노래를 여자가수 전영의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바꾸어 들려준다.
“여배우가 감독을 하니 자칫하면 자기 연기에 치중해 감독으로서 치우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그런 생각보다 남자들만 뭐 감독하나, 여자도 할 수 있어! 이런 게 강했어요…. 그 영화(<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없으니까 사랑한다는 감정 표현을 할 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고안해낸 것이 그 장면이었어요.” (배우 최은희 인터뷰)
<황홀경>의 제2장 ‘불어라! 바람’은 구태여 욕망을 가두지 않은, 그래서 더러는 추방되고 살해됐던 한국영화의 여인들을 진혼한다. 사랑의 번민을 다소곳이 피아노 건반에만 털어놓던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사랑방 손님 중절모의 냄새를 맡고 코를 찡그렸다가는 그제껏 보이지 않았던 환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비뚜름하게 모자를 쓰고 귀엽게 미소짓는다. 김소영 감독의 인터뷰 요청에 곱게 차린 위엄 있는 모습으로 응한 최은희는, 그 빛나는 사랑의 장면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노라 들려준다. 장군의 무용담을 들려달라며 일어서는 체하다 그의 품에 쓰러지는 <천년호>의 요염한 여인, 신성일에게 핀셋을 내밀며 털을 뽑아달라고 요구하는 <맨발의 청춘>의 도도한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섹스 뒤 잠든 남자를 어깨 뒤로 하고 홀로 일어나 앉은 <정사>의 원숙한 여인. 희귀하지는 않으나 합당한 만큼의 눈길을 받지 못했던 한국영화의 장면들은 한줄로 꿰어져 영롱한 목걸이가 된다. 능동태로 사랑하고 희열도 파멸도 스스로 선택하는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모아 간추린 <황홀경>의 컬렉션은 <해피엔드>의 한 장면에 이르러 ‘전유’(專有)의 전략을 구사한다. 남편의 손에 죽은 전도연이 발코니에서 담배 연기를 깊은 한숨처럼 내쉬다가 날아든 근조등을 향해 무심히 손을 뻗는 장면을 취해 김소영 감독은 음악을 바꾸고 바람의 사운드를 새로 넣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미지는 죽은 아내가 더이상 살지 않는 방에서 아이와 깨어나는 남편이 아니라, 박명천 감독이 찍은 <시월애>의 예고편에서 강가의 버드나무처럼 바람에 긴 머리를 날리며 울고 있는 소녀다. 누구의 시선에도 갇히지 않은 채 자기의 감정과 독대하고 있는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이다.
“요즘 여배우 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너무 매력있었고 <플란다스의 개>의 누구죠 배두나,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워요 배우들은 제일 힘든 게 걷는 거 손 움직이는 걸 자연스럽게 하는 건데 이 여배우는 그냥 자기 세상이에요.”(배우 윤정희 인터뷰)
“제가 여성이니 다른 여성들과 공감하고 같이 즐기고 위로가 되는 연기를 하고 싶죠. 언제나 제 느낌에 따라 충실히. 역할은 레즈비언 그런 역 최근 본 오래된 한국영화 중에서는 윤여정 선생님 나오는 김기영 감독님의 <화녀> 보면서 다시 한 번 존경하게 됐습니다.”(배우 배두나 인터뷰)
영화의 작가는, 영화의 창작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영화의 작가로 남성 감독만 말하고 여배우들을 호명하지 않는가 영화와 우리의 어설픈 연애는 대개 배우에 대한 매혹에서 봉오리를 틔우지 않았던가 <황홀경> 속에서 원로 여배우는 후배에 대한 존경을 말하고 다시 젊은 여배우는 선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김소영 감독은 영화를 사이에 둔 여자와 여자의 만남을 장르를 뛰어넘어 중재한다. 화가 윤석남과 사진작가 박영숙은 그들이 한국영화에서 경험한 황홀경을 들려준다. 그들이 말하는 영화 속 여성의 이미지들은 인터뷰 도중 연꽃 줄기가 되어 하늘을 바라는 윤석남의 여인상과, 칼을 들고 벗은 가슴을 드러낸 더운 피의 여인들을 찍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와 병치된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작업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라는 김소영 감독의 말은 해설과 교훈을 주는 정통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음향과 심상이 충돌하는 역동적인 체험으로서의 기록영화를 의도하는 ‘판타 다큐’를 표방한 <황홀경>의 형식적 지향과 직결된다. “야마가타영화제 같은 곳에 갈 때면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이 왠지 내겐 어려웠어요. 그래서 다큐이면서도 다큐가 아닌 방식으로 이탈해나가고 싶었나봐요.” 오정희의 <불의 강>의 한 장면처럼 어느 영화의 촬영장을 강기슭에 선 소설가가 바라보고 그 위로 여성 가수의 노랫소리가 흐르고, 그 풍경을 여성 화가가 그린다. 이것이 <황홀경>에서 깨어난 다음 김소영 감독이 꾸는 다음 영화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