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는 나에게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송화가 아이의 인도로 눈 내리는 길을 떠나는)에 나오는 아이는 내 딸 수연이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겨울방학 중이었다.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아이는 누구인지. 주인공 송화의 딸인지 아니면 그냥 동네 아이인지.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그 아이는 조감독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시나리오를 100% 완성하지 않고 계속 토론을 해가며 <서편제>를 찍었다. 촬영이 중반을 넘긴 1월. 영광에서 겨울장면을 찍는데 70년 만에 폭설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회의 자리에서 임 감독은 평소 당신 스타일대로 “앞 못 보는 송화가, 그래도 자리잡고 살던 마을을 떠나는데… 그, 인심이 그런 게 아니잖아 하다못해 버스 정류장까지라도 누가 바래다줘야…” 하고 느릿느릿 말을 꺼내셨고 연출부는 <넘버.3>의 충성스런 불사파처럼 “인심이, 그런 게, 아니다” 또박또박 받아 적다가 결국 여자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난제를 받아들었다. 어린아이를 찾기 힘든 시골에서 난감해하던 김홍준 조감독은 서울로 전화를 해 맏딸 수연이를 불러 내렸고 졸지에 그의 주업무는 연기 지도가 됐다. 영화촬영이 뭔지 모르고 엄마 손을 잡고 내려온 아이는 빠른 현장 이동을 위해 업어주고,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어주는 스탭들에 둘러싸여 신나는 방학을 보냈다. 걸음걸이가 너무 씩씩해서 나중에 스텝프린팅을 해야 했지만. <서편제>가 일본에서 개봉됐을 때는 수연이 출연한 장면의 사진이 포스터 컷으로 쓰이기도 했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몰랐던” 수연은 이제 고3이다. 수연에게 “너, 일본 가면 유명해”라고 안 먹히는 농담을 던지는 아빠는 지금도 딸아이의 일곱살 겨울이 담긴 <서편제>의 일본 개봉 포스터를 한장 구하고 싶어한다.
“내가 <서편제>에 나온 수연이 나이 때 아버님은 회사에서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어머님을 부르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님은 그날 신문을 가져와서 영화광고를 나에게 읽어주셨다. 그러면 나는 어머님이 읽어주시는 대로 극장 이름과 영화 프로들을 외웠다. 시내에 나와 아버님을 만나면 우리는 언제나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자마자 아버님은 내게 그날의 극장 프로를 물어보셨고 그러면 나는 외운 대로 대답을 했다. 그러면 그중 한편을 아버님이 선택했다. 그럴 때마다 택시 기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참 똑똑한 아들을 두셨네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말을 듣고 싶으셨는지 아버님과 어머님은 항상 이 일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렇게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극장 중 하나가 대한극장이다.”
소년이 뜻도 모를 ‘70밀리 6본 트랙’이라는 말을 외우며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도취됐던, 그리고 어른이 된 그가 처음 참여한 영화 <개벽>이 개봉됐던 그 대한극장은 그러나 이제 없다. 스카라를 빼면 명보극장도 단성사도 피카디리도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영화관’ 멀티플렉스로 개축됐거나 개축 중이며 국도극장은 건물이 헐림과 동시에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부천영화제라는 영화축제의 운영자로서 영화관람의 맥락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의미에 유심한 시선을 던져온 김홍준 감독에게 옛날 극장에 대한 그리움은 향수 이상이다. 그가 기억하는 1960년대의 극장은 일종의 라이브 공연장이었고 이벤트 공간이었다. 점찍은 영화가 매진되면 2관, 3관의 다른 영화로 눈길을 돌리는 요즘과 달리 그때의 관객들은 표가 다 팔리면 상영관 바깥 복도에 빽빽이 앉아 다음 회를 기다리며 극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다함께 가슴을 두근거렸다. 사람들은 천천히 영화라는 ‘의식’을 음미했다. 양복점이니 안경점이니 하는 광고가 끝나면 묵직한 비로드 커튼은 점잖게 일단 닫혔다가 본영화를 위해 다시 열렸다. 속치마처럼 반투명한 속커튼 뒤에서 MGM의 사자가 울고 유니버설의 지구가 돌아가고 나면 마침내 모든 장막이 열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할리우드 대작쯤 되면 자리를 정돈하라는 신호격의 서곡도 울려퍼졌다. 는 못내 아쉬운 듯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의 한 대목을 빌려 옛 대한극장을 보여준다. 제비족(신성일)을 사랑하게 된 부인(김지미)에게 자칭 약혼녀가 나타나 협박하는 육교장면의 원경에 대한극장이 어른거린다. 때로 영화는 이처럼 작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대를 기록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기록한다. 수십년의 시간은 배우의 얼굴에서 대한극장의 간판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기억한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한국영화들. 그리고 어른이 될 때까지 그것을 기억하게 만든 영화들. 나는 기억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조선 청년을 때리던 일본 군인들을,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눈 덮인 언덕을 내려오던 스키부대를, <연산군>에서 피묻은 옷을 움켜쥐고 울부짖던 연산을,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깡통을 들고 다니던 거지 윤복이를.”
묘하게도 <My 충무로>의 인용구가 된 옛날 영화들은 예스럽거나 촌스럽지 않다. 어린 날 극장 나들이에 대한 김홍준 감독의 회고가 깔리는 <귀로>의 서울 거리에서는 금방이라도 내레이션 속의 다정한 가족이 걸어나올 것 같고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지친 김진규의 얼굴로 다가드는 카메라는, 카메라의 공중제비가 흔해빠진 지금도 여전히 도발적이다. 유행 지난 패션과 낯간지러운 후시 녹음 대사에 뜨악해져 우리가 눈감았던 옛날 영화들이 존경이 아닌 공감을 청하며 현재진행형 시제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이 과거의 영화들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는 김홍준 감독의 목소리는 방송에서 그가 들려주는 명석한 해설자의 음성과 달리 어딘가 수줍고 쓸쓸하다. ‘한국영화 걸작’이 아닌 ‘나의 한국영화’를 호명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짤막한 러브레터를 받을 수취인의 주소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탓일까?
“언제까지 사람들이 충무로란 말을 쓸까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기억하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충무로라는 이름을 불러줄까. 그때 한국영화는 또 다른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
나는 왜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들게 되었나
60분짜리 3부작 할까, 스코시즈처럼 해볼까
촬영 2일 후반작업 5시간 제작비 40만원(후반작업 시설 이용료)으로 6년 만에 필모그래피를 늘리는 쾌거를 올렸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김홍준 감독은 의 <한국영화 걸작선>을 진행하면서 ‘나의 한국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했다. 처음에는 60분짜리 3부작을 할까, 형식실험을 해볼까, 마틴 스코시즈의 <마틴 스코시즈와 함께하는 사적인 미국영화기행>처럼 영화광으로서 개인사와 미국 영화사를 동시에 풀어나는 프로젝트를 해볼까 욕심도 솟았다. 그러나 학교, 영화제, 영진위로 분주하기 짝이 없는 나날 속에 1년이 실천없이 흘러가자 반성이 찾아왔다. 비디오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전도사처럼 말하고 다니면서 정작 왜 나는 행동하지 않는 걸까. 좋아하는 한 감독의 “당신 이야기부터 하지 않으면 잘난 척밖에 더 되겠냐는”는 실용적인 조언을 듣고 첫 번째 에피소드는 ‘My 충무로’로 정해졌다.
작업방식은 수필의 그것이었다. 틈틈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굴리며 숙성시킨 다음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찍었다. 내레이션은 자연스럽길 원했기에 이야기 주제만 적어 녹음실 마이크 앞에서 즉흥적으로 말을 만들었다. ‘에피소드1’이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이 암시하듯 <나의 한국영화>는 30부작이 될지 50부작이 될지 모른다. 이제 자기고백으로 운을 뗐으니 잘난 척도 해보고 귀여운 척도 해보고 싶고 <포가튼 실버>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에도 관심이 간다. 그래서 50편쯤 되어 장편영화 앞에 붙여 상영하게 되면 ‘아, 그 영화에는 에피소드 1, 7, 8, 13이 어울리겠네’ 하는 날이 올 지도! 1월 중에 <에피소드2>의 크랭크업을 예고하는 김홍준 감독은 <나의 한국영화>를 목공을 업으로 삼는 목수가 어느 날 바닥에 앉아 그저 자기가 좋아서 깎고 있는 목각품에 비유한다. “제 세 번째 상업영화가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작업을 하는 나와 이걸 꼼지락꼼지락 만드는 나는 좀 딴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일이라면, 이건 유희인 거죠.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