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에 바치는 두편의 필름 에세이 [1]
2003-01-11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나는 기억한다,한국영화를

누군가 한탄했다. 음악을 글로 분석하는 일은 건축물에서 얻은 감상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가망없는 짓이라고. 이 말에 서린 깊은 고심을 이해하고 영화를 돌아본다면, 영화야말로 영화를 논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근사한 요리를 대접받은 감격을 다시 스스로 정성들인 요리로 표현하고 사례하듯이, 김홍준 감독과 김소영 영상원 교수는 한국영화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아담한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들었다. ‘나의 한국영화’라고 이름 붙인 열린 프로젝트의 ‘에피소드1’에 해당하는 김홍준 감독의 <My 충무로>는 6mm카메라를 들고 예전 극장과 영화사가 사라진 충무로를 소요하며, 그에게 영화의 날카로운 첫 키스를 남긴 과거 한국영화의 장면을 통해 필름 속 정지된 삶을 추억한다. 김소영 교수의 <황홀경>은 좀더 확대된 1인칭을 구사한다. 여성들이 한국영화를 창조하고 소비하며 경험해온 다양한 황홀경들이 과거 영화의 한 장면, 여자들의 인터뷰를 빌려 다물었던 입술을 연다. 이번 서울독립영화제와 서울아트시네마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두 정평난 영화광의 다큐멘터리는 한국 영화사 강의가 아니라 사적으로 선택한 하나의 앵글로 시도된 근접 조우다. 그들은 경어체를 쓰지 않고 한국영화에 말을 건다. 여기서 한국영화는 의무적으로 탐구해야 할 유산이 아니라 한국 관객, 우리만이 은닉된 아름다움을 간파할 수 있는 정겨운 비밀의 화원이다. 당신이 영화의 연인이라면 이 자그마한 문을 통과해 새해 영화 여정의 첫발을 딛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다. 결국 우리가 상정하는 영화라는 거대한 실체는, 수많은 영화의 연인들의 마음속에서 솟은 샘과 강들이 흘러넘쳐 이루어진 바다일 테니까.

그 시절 극장들은 사라졌어도…

김홍준 감독의 <나의 한국영화-에피소드1: My 충무로>

‘한국영화’와 ‘나’라는 두개의 키워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결심과 관련된 메모들을 쌓아올린 지 1년. 김홍준 감독의 머릿속에 뭉쳐 있던 실타래는 어처구니없이 평범한 계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충무로 지하철역을 지나가던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충무로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면 안성맞춤일 공간 활력연구소를 보는 순간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척척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어릴 적 부모님과의 영화 나들이, 그리고 지금은 없는 추억 속의 영화관들, 연출부 생활을 시작한 첫 직장, 본의 아니게 그와 가족의 모습을 새긴 영화들. 충무로는 바로 그 모든 이야기의 교차로였다. 추석날 해질 무렵. 김홍준 감독은 휴일의 쓸쓸한 충무로 거리로 나섰다. 대학 2학년 시절 난생처음 영화를 찍던 그날과 똑같이, 친구에게 빌린 6mm 카메라를 손에 들고,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좋을지 어리둥절한 채.

“그때(부모님과 영화구경을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몰랐지만 결국 그 영화들이 만들어진 곳 충무로로 가서 충무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충무로 사람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충무로는 더이상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충무로라는 단어만 한국 영화판을 가리키는 말로 남았을 뿐이다.”(<My 충무로> 중 김홍준 감독의 내레이션)

13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My 충무로>는 훔쳐보는 이의 눈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적어 내려간 일기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짧은 영화가 아주 사적인 독백인 동시에 영화와 연을 맺고 살아온 특정한 사람들의 공감을 자극하고 넓게는 과거 한국영화에 대한 집단적 기억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김홍준 감독은 그 세대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그랬듯 그곳이 충무로인 줄도 모르고 충무로에서 영화를 처음 영접했다. 하지만 영화와 해로하는 그의 ‘장밋빛 인생’은 정확히 말해 한국영화의 품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김홍준 감독이 속한 이른바 ‘문화원 세대’는 한국영화에 대한 동경이 영화에 인생을 걸게 만든 세대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화적 ‘위인’들은 신상옥이나 유현목이 아니라 고다르, 코폴라, 파스빈더였다. 그리고 마침내 현장에 뛰어들기를 작심하고 1991년 임권택 감독의 <개벽> 연출부로 충무로 사람이 되었을 때 충무로의 화려한 시절은 이미 페이드 아웃하며 한국 영화사의 다음 장면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그는 옛 충무로의 끝자락과 새로운 한국영화 시스템 사이에 낀 세대였다. 다큐멘터리의 제목 <My 충무로>의 소유격 표기를 알파벳으로 고집한 데에는 그처럼 뒤늦게 제 사랑을 알아본 연인의 쑥스러움이 배어 있다고 김홍준 감독은 귀띔한다. 의 한 대목에 인용된 이만희 감독의 <귀로>에서 젊은 남자의 사랑에 흔들렸다가 결국 속 깊은 남편의 곁으로 돌아오는 아내처럼, <My 충무로>의 카메라는 연출부 초년병 시절 촬영 준비를 하며 오고갔던 특별할 것 없는 충무로 골목길을, 엑스트라들과 새벽밥을 먹던 식당 앞을 천천히 소요한다. 그러다가는 불쑥 식당에 들어가 죽이 담긴 그릇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내가 연출부로 일한 첫 작품은 <개벽>이었다. 제작사는 충무로에 있는 춘우영화사였다. … 지금 그 회사는 이사가고 건물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개벽의 촬영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 연출부에 합류했다.… 처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담배꽁초를 줍고 마루를 닦는 것밖에 없었다. 얼마 뒤 어깨 너머로 이것저것을 배우고 눈치껏 일을 찾으면서 소품과 의상을 나르고 엑스트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게 됐다. 나의 충무로 생활은 그럭저럭 적응할 만했다. 그래도 고달팠는지 가끔 배탈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회사 옆의 죽집에서 죽을 사먹었다. 그 죽집은 거의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My 충무로>는 오늘날 충무로 풍경과 옛날 충무로 영화의 인용으로 구성된다. 김홍준 감독은 <개벽>(1991), <장군의 아들2>(1991), <장군의 아들3>(1992)에서 연출부로 일했고 <서편제>(1993)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감독을 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개벽>부터 김홍준 감독은 스스로 한국 영화사의 일부가 됐다. 한국영화 속에 그가 기록됐다는 뜻이다. <My 충무로>는 네편의 영화 엔딩 크레딧의 한줄을 차지하고 흐르는 김홍준 이름 석자를, 전봉준을 두들겨 패는 포졸 김홍준의 뒷모습을, 전투장면에서 엑스트라 한 부대를 이끌고 전장을 달리는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콩알만한 모습을 모아 보여준다(자세히 보면 짚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뛰는 특혜를 누리는 병졸들이 연출부다). 특기할 만한 발견은 <개벽>에서 교지를 낭독하는 대사까지 있는 도승지 역. 이 장면은 극장 개봉된 최종 편집본에서는 잘려나갔으나 비디오 회사에는 우연히 기술 시사 프린트가 넘어갔는지 출시 비디오를 보면 꽤 당당한 도승지 김홍준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념 발명하는 데 선수인 김홍준 감독은, 엄연히 감독이 잘랐는데 저절로 되살아났으니 ‘언디렉터스 컷’ 아니겠냐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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