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옥이 왔다. <영웅>과 함께, 좁다란 홍콩의 골목에서 빠져나와 중국의 산하를 비상하며 ‘날으는 눈’(飛雪)이 되어. 1984년 데뷔한 뒤 20년간 스쳐간 수많은 영화 속 편린에 비쳐진 장만옥에 대하여, 뜨거운 완탕국수를, 기름묻은 닭고기를, 파인애플이 끼워진 소시지 꼬치를, 무언가를 오물거리며 먹을 때 가장 사랑스럽던 그녀의 입술에 대하여. 그 치명적인 매혹에 대한 보고서.
순수의 수동, 거부할 수 없는 몸짓
주성치가 한 영화에서 “내 소원이 장만옥의 가슴을 보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을 만큼, 영화 속의 장만옥은 늘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존재다. 마른 편이지만 나약해 보이지도 여성적인 선을 잃지도 않는 그녀의 육체는 주물처럼 부어넣은 듯 온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라텍스 의상을 입고 파리의 지붕 위를 달리는 <장만옥의 이마베프>에서 그 ‘고혹한 보석’(慢玉)의 진가를 발휘하지만 좀처럼 검은 코스튬은 그녀의 살갗을 떠나지 않는다. <영웅>에서 하늘로 치솟는 듯 아이라인을 강조한 눈매로 처음 등장하는 ‘비설’ 역시 붉게 휘날리는 휘장 사이에 가려져 어른어른 그 모습을 허락할 뿐이다.
<열혈남아>를 찍을 당시 왕가위는 “연기가 미숙했던 장만옥에게 많은 대사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거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사를 지우는 대신 “장만옥이 온전히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집중할수 있도록” 지도했다. 쫑알거리는 대사 대신 아무런 의지없는 손놀림으로 60년대 젊은이의 허무와 무료를 드러내며 단련되기 시작한 장만옥의 ‘보디랭귀지’는 실로 매염방, 양자경 등과 3인의 여협으로 등장했던 두기봉의 <동방삼협>를 비롯해 발레 동작에 가까운 무술을 보여주는 많은 무협극에서나 성룡표 오락물에서도 몇백 마디 대사보다 더 확실히 그녀를 표현하는 무기로 자리잡았다.
특히 <화양연화>에서의 장만옥은 서양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도저히 분석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리듬감을 몸 안에 품은 채 걷고, 말하고, 웃는다. 마치 오우삼이 주윤발의 우아한 거동에서 신화적 기운을 발견했던 것처럼 왕가위는 장만옥 몸에 흐르는 기묘한 리듬감을 간파해낸 것이다. 플루트같이 긴 목선에서 떨어지듯 흐르는 팔의 선, 뻗은 종아리에서 무릎으로, 다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며 굽이치고 휘감기는 그 아찔한 선의 매혹은 마릴린 먼로식의 뇌쇄가 아니라, 장만옥만의 고혹적인 자태로 자리잡아 우리의 시선을 그녀가 사라져가는 골목 끝까지 눈이 시리도록 응시하게 만든다.
1983년 미스홍콩으로 발탁되고 대회 2주 뒤에 첫 번째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은 장만옥의 배우인생은 시작부터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가속을 품은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배우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때였어요.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비서 같은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을 뿐이죠. 오히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헤어 드레서였어요.” 귀여움을 발산하던 <개심귀3-개심귀당귀> 같은 코믹물이나 늘 찡찡거리는 성룡의 장식품 같은 여자친구로 등장했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꽃병처럼 예쁘게 놓여 있는 역”이나 “입을 크게 벌리고 토끼처럼 놀란 표정의 리액션만 반복”했던 그녀를 두고 평론가들은 ‘감정의 부족상태’라고 비난했다. 예쁜 얼굴로 잠깐 피었다 한철이 지나면 지고 마는 여느 아이돌 스타들의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특별히 좋아했던 기억은 없어요.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영화에 대해 관심을 두진 않았었죠. 진짜 진정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배우가 된 지 3, 4년 뒤 왕가위를 만난 이후였죠.” 자신의 영화적 스승을 꼽아달란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왕자웨이”(왕가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내 속에 있는 일종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어요. 연기란 그저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퍼올리는 작업이란 것을 일깨워주었죠. 내가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무언가를, 단지 얼굴과 눈이 아닌 모든 몸이 따라가는 연기 말이에요.”
“미스홍콩에 뽑힌 장만옥을 보고 당시 많은 감독들은 그녀가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가 좋은 배우가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관금붕)
데뷔작 <열혈남아>로 장만옥과 처음 인연을 맺은 왕가위는 장만옥에게 영화적 식견을 넓혀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또한 그동안 액션, 코믹물의 밝은 조명 아래 편편하고 귀엽게만 느껴오던 장만옥의 얼굴 역시 왕가위의 어두운 공간에 놓이면서 툭 불거진 광대뼈와 거칠게 꺾인 턱선이 동그란 눈매와 볼선을 따라 묘한 긴장와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었다. 결국 상업적인 큰 성공을 얻진 못했지만 왕가위의 <열혈남아>를 거쳐 장만옥을 “재발견”한 관금붕은 1989년 자신의 작품 <인재뉴약>에 그녀를 캐스팅하기에 이른다.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공기에 눌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홍콩 출신 레즈비언 아교 역으로 출연한 장만옥은 그해 대만 금마장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내고 이어 매염방으로 내정되어 있던 <완령옥>의 주인공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종종 그레타 가르보에 비교되기도 했던 무성영화 시대 중국 최고의 여배우였지만 황색 저널리즘의 오해속에 스물다섯살 나이에 자살한 ‘완령옥’의 짧은 인생을 담은 이 영화를 위해 장만옥은 실존 인물들을 만나 스스로 인터뷰하고 <신여성>을 비롯한 완령옥의 출연작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연기를 분석했다. 결국 그러한 과정을 거쳐 관금붕과 장만옥의 대화로 이루어진 <완령옥>의 인상적인 첫 시퀀스는 아무런 시나리오 없이 완성되었고, 나아가 장만옥은 <완령옥>으로 홍콩 여배우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홍콩영화가 오락성 위주의 뻔한 판박이만을 생산해내며 점차 쇠락의 길로 향해가던 순간, 한 여배우의 연기인생은 아주 다른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기가 결국 배우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장만옥의 심장은 이별에 익숙해야 했다. 그녀의 눈은 세상 모든 것들이 결국엔 자신을 떠나버릴 것을 아는 자의 것이다. 부두를 서성이며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는 남자” 소화의 호출을 기다리던 아화였을 때도 (<열혈남아)>, 체육관 매점에서 이제는 세상에서 발을 떼어버린 아비를 기다리던 수리 첸이었을 때도(<아비정전>), 사막으로 서독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자애인이었을 때도(<동사서독>), 영국인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가짜 롤렉스 시계와 “마지막 식민공기”까지 팔아대는 억센 홍콩 여자 진이었을 때도(<차이니스 박스>), 불가능성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는 수리 첸이었을 때도(<화양연화>),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자리에, 누군가를 보내야 하는 자리에 늘 그녀가 있었다. “단 1분만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어”라고 외치는 거리의 사내들 속에서, “천하”를 위해 칼을 빼어드는 협객들 속에서(<영웅>) 장만옥은 그렇게 끊임없이 기다렸다. 심지어 <신용문객잔> 같은 무협물에서조차 그는 선택받지 못한 여자로 남았다. 그러나 인내의 시간은 그녀에게 단련된 심장과 함께 능동을 자극하는 위대한 수동성의 힘을 허락해주었다.
“장만옥은 아무 생각이 없다. (웃음) 장만옥은 연기론이랄 게 없는 배우다. 그러니까 훌륭한 배우다. 예를 들어 로버트 드 니로는 연기론이 너무 많다. 이런 성격의 인물과 저런 성격의 인물을 연기할 때 각기 다른 많은 방법론이 있다.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기가 막히게 해내지만 그건 드 니로의 연기이지 등장인물의 삶이 아니다. 장만옥은 그렇지 않다. 그냥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래서 제일 좋은 연기자는 많이 배우지 않은 사람이다. 지식이 없고 생활경험이 많은 사람이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다.” - <첨밀밀> 진가신
1984년 왕정의 <청와왕자>로 영화에 데뷔한 뒤 벌써 2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면서, 덤프트럭에 실려온 쓰레기처럼 무더기로 쏟아지는 홍콩영화 속에서 압사당하지 않은 채 생존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장만옥의 답은 간단하다. “ 그저 누군가 끊이지 않고 나를 캐스팅하니까 출연하는 거죠. (웃음) 늘 한편의 영화를 끝내고 나면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 다음 영화에서는 더욱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그 욕심이 계속해서 연기를 하게 만드는 동력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는 비켜가지 않았다. “내 몸이 용문객잔이에요”라며 사내를 향해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는 <신용문객잔>의 안주인 연옥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타고난 매력에 상응해 끊이지 않았던 스캔들 속에서 황색언론의 표적이 되었던 장만옥은 이동승과의 염문설에 이르기까지 지친 마음과 93년 한해에 11편의 영화를 필모그래피에 올리면서 탈진한 몸을 더이상 가동할 의지를 잃었게 되었고, 1994년 <청사>를 마지막으로 연기활동을 중단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왜 영화를 계속해서 찍어야 하는지 자문했는데 답을 찾을 수가 없었죠. 그냥 많은 것들이 무의미했고 지겨워졌어요.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난 거의 8주에 한편꼴로 영화를 찍었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한심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심지어 자신조차 영화관에서 보기 싫은 영화도 있을 정도로 무분별한 출연과 정신적 공황상태까지 겹쳐지며 최악으로 달리던 장만옥은 이후 2년 동안 어떤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은 채 지친 심신을 달랬다. 그런 그에게 진가신이 <첨밀밀>을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배우생활을 시작했을 때 영화를 대하는 그녀의 모든것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첨밀밀>을 찍고 난 이후부터는 1년에 한편 이상의 작업을 안 하는 편이에요. 대단한 변화죠.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작업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