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동원,장기수,그리고 <송환> [3] - 김동원 인터뷰
2003-01-27
˝선생들과의 만남에 대한 고백록˝

혹여 꿈길에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면, 문 앞 돌길이 닳아 모래가 되었을 것을(若事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砂).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의 꿈길을 따르기에 김동원 감독에게 10년은 부족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명절 때면 선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는 그로부터 <송환>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동안 찍었으니 카메라 기종도 가지각색이겠다.

=맞다. 방송용 유메틱부터 VHS, 베타, 6mm까지 안 쓴 게 없다. 기종만 놓고보면 열댓 가지 될 거다. 편집 과정에서 화질 조정하는 데 애먹고 있다.

-첫 만남에서 두려움도 느꼈다고 했는데.

=내 나름대로 진보를 맛보기 시작했고, 또 많이 태를 벗었다고 생각했었던 때였는데. 남파 간첩이라는 말을 듣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내 의식 속에 레드 콤플렉스가 남아 있구나 했다.

-조창손 선생에게 더 이끌린 이유가 있나.

=아무래도 집이 가까워서 뵐 기회가 더 많아서였을 것이다. 성격은 두분이 많이 달랐는데 김석형 선생은 명석한 당 간부 출신이었고. 조창손 선생은 이들을 남쪽으로 안내한 부기관장으로 빈농 출신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구성이 여러 번 바뀌었다.

=별다른 계획없이 찍어서, 나중에 상황으로 인해 구성을 바꾸려고 하다보니 이쪽 저쪽으로 다 막힌다. 내용이나 인물은 풍부한데, 작품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다.

-조 선생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포커스를 바꾸면서 적절한 거리두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휴먼다큐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 입장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신념을 포함하여 직접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수월치 않았다. 그들은 갇혀 있었던 분들 아닌가. 그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그들에게 수령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따져 묻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생명보다 더 소중히 했던 신념 아닌가. 정작 물었다고 해도 취할 수 있는 정치적인 입장의 한계나 프라이버시 때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직접 겪지 못한 시대를 살았던 데다 한동안 현실에서 유리됐던 이들과의 만남이라 힘들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상황판단에 익숙한 우리로선 지독한 황소고집을 가진 노인네로 볼 수도 있고, 그들의 신념을 오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30년을 차디찬 반평 크기의 감옥에서 버틸 수는 없다. 강제 전향에 대한 거부는 개인적으로 인격의 총체성을 지키는 행위였다고 본다.

-편집하면서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났을 것 같다. 월남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 고향이 평북 강계인데, 한국전쟁 전에 월남하셨다. 대부분 월남하신 분들이 북쪽에 대한 증오가 있지 않나.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상계동에 들어가서 생활할 때부터는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그러다 선거철만 되면 언쟁을 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아버지를 모르는구나 싶어 대화를 많이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한때 아버지가 우익단체이던 서북청년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한 것도 알게 됐다. 그때 월남해서 먹고살려면 선택의 길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처음 뵜을때 남파 간첩이라는 말에 두려웠다고 했는데, 북한에 대한 반작용의 일부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조창손 선생과는 연락이 계속되나.

=한번 방북한 지인의 손에 카메라를 들려보냈는데 달랑 안부를 묻는 영상편지만 돌아왔다. 처음엔 애초 부탁한 것과 달라 실망도 많이 했다. 안부 인사 중에 날 보고 남쪽생활하면서 아들 같다고 말하더라. 그 말 듣고 내가 정말 아버지처럼 모셨는지 돌이켜봤는데 죄송스럽더라.

-<송환>의 의미를 찾는다면.

=<상계동 올림픽>부터 지금까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을 찍어왔다.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과 존경을 담았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이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주관적인 시점의 다큐가 많이 나오지만, 형식적으로 내 입장에서 시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다소 생소할 수 있다. 등장인물에 기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해야 하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선생들과의 만남을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 정도로 여긴다. 고백록 정도로 봐줬으면 좋겠다.

-<송환>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나.

=완성까진 아직 멀었는데. (웃음) 도시 빈민들에 관한 후속 기록도 내놓아야 하고, 내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도 천천히 해볼까 한다. 얼마 전 어머니에게서 북에 두고 온 누님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는데 지금껏 숨겨왔다는 서운함 이상의 서글픔이 들더라.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니 앞으로도 다큐 찍으면서 계속 배워야겠지.

-언제까지 다큐작업을 할 건가.

=하루에도 몇번씩 흔들린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절대로 배신할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날 잡아준다. 하긴, 이제 딴 짓 할 나이도 지났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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