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감독은 좀처럼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부류다. 후덕한 인상 그대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무료 강의를 도맡곤 한다. 그런 그도 <송환>(가제)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아껴왔다. 인터뷰 제의를 한 것만 해도 지난해만 수차례. 모두 “다음에 하자”고 미루었다. 세 번째는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인지 “만나서 이야기나 나누자”는 승낙까지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세 악화로 만남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새해 들어 그가 다시 미완성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편집 작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독립영화계의 대소사를 맡아왔던 자리도 이미 후임자를 물색한 뒤 <송환>의 편집 작업에만 몰두할 것이라는 전언도 함께 들려왔다. 10년 동안 대상이라기보다 가족처럼 지냈던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송환>. 그동안 완성하지 못한 채 품고서 서성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30여년 동안 가슴에 적갈색 수인표를 달고 0.5평에 몸과 정신을 의지해야 했던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과의 만남이 그에게 남긴 흔적들을 뒤쫓아본다.
옥살이 30년, 다큐멘터리 10년, 테이프 500개
새해 들어 금연하라고 여기저기서 요란들이다. 그런데 김동원(48) 감독은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루 흡연량도 한갑 이상으로 전보다 늘었다. 빈틈없는 감시자를 자처하는 7살 난 막내딸 푸른이가 예고없이 작업실인 푸른영상을 습격할 때는 피우던 담배를 서둘러 비벼 끄기도 해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느새 한 개피를 꺼내 문다. 푸른이도 그런 아빠가 안쓰러운지, 뒤늦게 역한 냄새가 피워 올라도 ‘한번 눈감아준다’는 식으로 모르는 척 넘어간다. 그런 딸의 배려를,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흡연을 시작한 건 고민이 늘어서다. 요즘 그의 머릿속은 뿌옇다.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송환>(가제) 작업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 얼마 전 푸른영상 전체회의에서 그는 1월 말까지 가편집을 끝내겠다고 했다. 적어도 5월까지 완성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남은 편집에 몰두하기 위해, 4년 전부터 맡아오던 이사장직을 내놓겠다는 뜻도 한국독립영화협회쪽에 건넸다. 석달 전부터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계신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것말고는 지난해 부친상 당한 이후 한동안 손놓고 있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할 만한 환경은 다 마련됐다. 이제 그의 다짐대로,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막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좀처럼 해답을 구할 수가 없다.
그의 답답함은 일단 “그동안 촬영해둔 테이프 수가 500개”라는 말만 들어도 대강 어림짐작 된다. 이중엔 2시간 분량인 것도 끼어 있으니, 환산하면 도합 800 시간은 너끈히 되는 방대한 기록이다. 어디에 어떤 내용의 인터뷰가 들었는지 확인하는 데만 반년이나 걸렸다. 이쯤 되면 “촬영만 해도 10명이 넘는다. 엔딩 크레딧이 걱정이다”라는 그의 농담이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제작 기간을 따지면 10년을 넘긴 푸른영상의 역사와 맞먹을 정도다. 그동안 들고 난 이들 거개가 <송환>과 질긴 인연을 맺었다. 그의 표현대로, <송환>은 김동원 개인뿐 아니라 푸른영상에도 어쩌지 못하는 ‘애물단지’인 셈이다.
1992년, 프로젝트 알을 깨고 나오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송환>의 첫 촬영은 1992년 봄.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가깝게 지내던 송경용 신부로부터 ‘어딜 좀 같이 다녀오자’는 부탁을 받았고, 촬영장비를 싣고서 현장을 누비던 봉고차를 몰고서 송 신부와 함께 대전의 한 요양원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그곳에 기거하던 김석형, 조창손씨는 1960년대 남파됐다 붙잡혀 30여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던 비전향 장기수. 대전교도소에서 출감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송 신부는 신원보증을 선 다음 서울로 모셔오고자 했다.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사전지식이라곤 거의 없었다”는 그는 처음엔 ‘남파 간첩’이라는 말만 듣고 “겁도 조금은 났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카메라를 챙겼던 것은 순전히 ‘습관’ 때문이었다. 무조건 챙겨들긴 했는데, 막상 촬영을 하려고 보니 난관이 만만치 않았다. 공안기관으로부터 요주의 단체로 찍혀 있어 이 일로 “감시가 심해지겠구나” 하는 부담도 있었고, 무엇보다 요양원쪽에서 이들을 놓아줄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촬영으로 인해 혹여 일이 꼬일 수도 있는 위험이 컸다. 그러나 일행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킬 때까지 찍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임했던 건 30년 수형생활을 꼿꼿이 버텨낸 인간들의 의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처음 뵀을 때부터 경외심, 호기심, 뭐 이런 게 뒤범벅돼서 머리가 복잡했다. 다만 한 가지. 뭔가 오랜 인연이 시작됐구나 싶었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신접 살림을 차렸던 봉천동 산동네에 조창손 선생(이들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선생’이라는 경어를 썼다. 이들의 언어에 적응하지 못했던 김동원은 조 선생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아 한동안 불편했다고 한다)이 머물게 되면서 첫 대면의 예감은 현실이 됐다. “인간적으로 끌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아이들을 자신의 손자처럼 귀여워했다. 그가 빈농 출신의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느꼈다.” 더없는 이웃으로 오가는 동안 같이 활동하던 김태일 감독은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1995), <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1996) 등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두 작품을 내놓았지만, 그는 언제나 보조자의 역할로 만족했다.
그러던 그가 그동안 찍은 영상을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맘먹은 것은 1999년. 비전향 장기수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길을 밟게 하자는 송환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송환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성사 여부는 불투명했다”고 판단한 그는 그동안 기록해둔 자료를 바탕으로 여론 환기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을 앞질러 갔다. 이듬해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송환을 원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명단이 발표됐다. 이로 인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작품을 도중에 그만둘 순 없었다. 어차피 판문점을 넘으면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없는 건 분명했다. “다큐멘터리의 일차적인 목표가 ‘기록’ 아닌가. 송환이 결정된 선생들 모두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선생들의 해방 전후 개인사까지 충분히 담지 못했지만, 송환된 장기수들의 음성은 따로 부록으로 만들어 끼워넣을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