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욱▷승완: 우리가 좋아했다니까 제작자가 실망하데
박찬욱 |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잖아. 대개 이런 영화에 그런 얘기가 들어갔을 때 거부감을 사기가 쉬운데 그런 건 전혀 없었어. 그런데 시사회에서 일부 젊은 관객은 병구의 과거가 나오자 ‘또 그런 거였어?’라고 했다는군.
류승완 | 실제로 제 동생 세대나 이렇게 보면 좀 다른 것 같아요. 아마도 내 또래 정도까지가 현실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박찬욱 | 그렇지. 요즘엔 시위를 해도 즐겁게 하니깐.
류승완 | 젊은 세대가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박찬욱 |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죽던데. 우리 회사 직원들도. 우리 회사 직원들은 <복수는 나의 것> 안 좋아하는 애들 많거든.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다 죽고 왔어. 결국 흥행이야 관객이 알아서 하는 거지만, 이 영화가 잘되면 우리야 편해지겠지. 이런 영화가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래도 은퇴, 아니 퇴출 날짜를 좀 미룰 수 있겠지.
류승완 | 스코시즈가 <천국의 문> 사태가 끝나고 한 얘기 있잖아요. 더이상 큰 제작비로 개인적인 영화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뭐 이렇게. 저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영화가 일종의 기호식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박찬욱 | 이 영화에서 가장 기분 좋은 점은 웃음이 폭력과 붙어 있다는 거야. 그게 또 슬픔과 그렇게 결합돼가는 거 말이야.
류승완 | 일방적으로 웃어라 해서 웃는 게 아니라 좋은 거 같아요. 끊임없이 계속 웃을 사람 웃고, 놀랄 사람 놀라고. 무책임한 게 아니라 재밌는 연출 같아요. 이를테면 김지운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도 그런 게 있잖아요. 포크로 이마를 찔렀는데 웃어야 하는지 아닌지, 달려가다 아파트 문짝을 맞고 쓰러졌는데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박찬욱 | 내가 시나리오 쓰거나 콘티 작업할 때 사람들이 이건 너무 잔인해요, 라고 할 때 내가 항상 드는 예가 있어. <반칙왕>을 봐라. 거 뇌의 시점숏, 포크가 푹 들어오고. 근데 그거 흥행만 잘되지 않았냐. 그래서 나는 아직 멀었다고 그러지. <지구를 지켜라!>가 잘됐으면 하는 것도, <반칙왕>말고 예를 들 사례가 있으면 좋은 거지, 나는.
류승완 | 하긴, 이태리타월로 밀고 물파스를 바르니…. 우린 아직 멀었다.
박찬욱 | 백윤식씨가 “난 마취됐어, 아프지 않아”, 이러면서 못 박힌 손을 빼고. 오우~.
류승완 |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하지만 영화로 즐길 수 있는,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영화적인 매력인 것 같아요. 너무 뻔하지 않게 가면서…. 그래서 상상력이라보다는 관점의 차이 같아요. 저는 이 영화가 상상력이 빛난다기보다는 아 참 골때리게 본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관점이 독특하다는. 말할 때 엄한 얘기 툭툭 던지는데 유쾌한 사람 있고, 짜증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장 감독이 전자 스타일이거든요. 영화가 그렇게 나와서 되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러면 웃기겠지, 식의 잔 계산 대신 그냥 딱 했는데 그게 웃겨 보이고. 즐겁고 슬프고.
박찬욱 | ‘이러면 웃기겠지’보다는 ‘이때 웃어도 할 수 없어’쪽이겠지.
류승완 | 관객이 포스터 문구를 보고 코미디 정도로 생각하고 본다면 ‘또 뭐야’, 이럴 수도 있는데, 그런 건 다 걷어버리고 극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냥 풀어놓고 보면 좋을 거예요. 분명 진심이 있는 영화잖아요.
박찬욱 | 근데 그날 차승재 대표의 반응은 실망스러웠어. 나하고 허진호하고 김지운, 류승완이 좋아했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그걸 비보로 받아들이더라고. 어쩌면 좋냐는 투로. 그런가 하면 최근에 김동주 대표 인터뷰에서는 곽경택하고 나하고 박기형하고 허진호 얘기를 하면서 최신작이 다 실패했던 감독들이라 반성하는 걸 기대한다고…. 한순간에 이렇게 되는구나…. (웃음) 잠깐이구나…. (웃음) 그렇게 생각했지.
류승완 | 그래도 감독님은 누가 얘기라도 해주죠. 저는 이제 얘기도 안 나와요. 영화나 찍어야지, 조용히.
박찬욱 | <지구를 지켜라!> 광고에 내 평도 실려 있잖아. 근데 그거 실패해봐. 투자자들이 날 또 어떻게 보겠냐고. 내 말을 인용해놓고 그때 가서 차승재 대표가 책임질 거냐고.
류승완 | 그러고보니 저도 이 대담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아, <시카고>에 붙을걸.
찬욱=승완: 고맙다, <지구를 지켜라!>
박찬욱 | 아무튼 내 영화도 앞두고 있는데, <지구를 지켜라!> 보고선 X됐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저는 남의 게 좋으면 가져다 쓰는 성격이라서, 뭐 별로…. 그냥 전화 한통 해주고 가져다 쓰는 편이라 그런 게 없어요. (웃음) 그런데 희한한 게 제가 한 건 표절이라고 하고, 장준환 감독님이 한 건 표절이 아니라고 하대요. 아니,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똑같이 해놓고, 오마주다, 이러고.
박찬욱 | (웃음) 솔직히 말해서 그 영화 보고 행복했어. 너무 유쾌하게 보고 6시까지 술 마시고.
류승완 | 어쨌든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은 좋지 않아요?
박찬욱 | 모처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영화를 만난 거고.
류승완 | 저는 시나리오 볼 때부터 잘됐으면 좋겠고 막 그랬는데, 내가 응원한 만큼 나와서 안심했어요. 나 이 영화 좋았어,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게 되게 고맙더라고요.
박찬욱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너도 바쁘지? 그럼 영화 열심히 만들자고.
류승완 | 네, 감독님. 그럼 저희도 <지구를 지켜라!>를 능가하는 주류 대중 흥행영화를 만들어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