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찬욱-류승완,<지구를 지켜라!>를 권하다 [3]
2003-04-11
글 : 문석
사진 : 조석환

승완▷찬욱: 뻔한 장면인데도 왜 좋지?

류승완 | 저는 <지구를 지켜라!>가 걸작이라기보다는 간만에 보는 에너지가 충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다소 거친 CG장면들이 튀어나와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잖아요. 그 영화의 미덕이 거기인 것 같아요. 너무 세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너무 세서 좋은….

박찬욱 | 난 좋아. 형사들 나오는 게 좀 재미없었고, 나머지는 더 바랄 게 없어. 팀 버튼이 쓴 시나리오를 존 랜디스가 연출한 것 같아.

류승완 | 크으~.

박찬욱 | 특히 생각나는 장면이, 백윤식씨가 여자 옷 입고 환풍기 뜯고 도망가려다가 감전돼가지고…. (폭소) 엎어져서 울다가 웃다가 막 그러잖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송강호도 그러더라고. “저건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 백윤식씨가 ‘씨발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나. 내 인생 왜 이렇게 풀렸나’, 이러는 거”라고. (폭소) 난 거기가 백미였던 것 같아.

류승완 | 제가 꼽는 백미는 액션장면이죠. 약국에서 나와서 벌어지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장면이지만. (웃음)

박찬욱 | 내가 아쉬웠던 건 형사들 에피소드가 너무 길게 느껴지더라는 거야. 영화를 보다가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이제 산으로 가죠,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병구나 강 사장, 순이는 안에서 뭔가 분열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형사들은 딱 자기 역할만 있는 것 같아요. 서울대 나온 형사, 막 치고 올라가는 반장, 주방에서 일하는 추 형사 이렇게. 그러니까 역할만 있지, 캐릭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박찬욱 | 난 형사들보다는 순이를 좀더 보여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좀더 보고 싶더라. 병구와 헤어진 다음에 순이가 어떡하고 있는지, 순이가 서커스하는 장면이나 왜 순이는 병구와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아, 그런데 나는 백윤식씨가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너무 웃겨가지고…. (웃음) 그 아무 포인트가 아닌데도…. 대사가 없어도 돼. 아으으, 그러기만 해도 죽겠더라, 진짜.

류승완 | 배우도 배우지만, <지구를 지켜라!>에서 굉장히 좋았던 게 미술인 것 같아요. 그분이 우리 영화 미술감독(장근영)이기도 하죠. 음악도 굉장히 좋았어요. <오버 더 레인보우>를 계속 변주해서 쓰는 것도.

박찬욱 | 난 <오버 더 레인보우> 쓴 것은 좀 진부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어.

류승완 | 미술감독에게 들어보니 같이 콘티 작업을 했는데, 밝은 장면에서는 밝은 <오버 더 레인보우>, 어두운 장면에선 어두운 <오버 더 레인보우>, 빠른 장면에선 시끄러운 <오버 더 레인보우>, 이렇게 종류별로 틀어놓고 콘티를 그렸대요. 다른 인터뷰에선가 봤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냐’고 물으니까 장준환 감독이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대요. <오즈의 마법사>를 자세히 보고 있으면 주디 갤런드가 미쳐서 그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웃음)

박찬욱 | 그러니까 미친 병구와 잘 맞는다? 그래, 너무 잘 맞아서 재미없다는 얘기지. 그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미쳤다고 볼 수도 있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도 이혜영, 전도연, 그리고 수십명 다 미쳤지.

류승완 |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게 정상적이진 않죠.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발목 끊고…. (웃음) 아, 감독님, <2001 이매진> 보셨나요? 이 영화가 그것과 되게 흡사해요. 캐릭터가 함몰되는 방식 같은 게. 주인공의 존재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언가에 영향받는다는 것도 그렇죠. <2001 이매진>에선 주인공이 존 레넌이라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아이콘에 필이 꽂히죠. 이 영화도 보면 거기서 농담같이 얘기하지만, 병구가 추 형사에게 “저도 이 책 안 만났으면 평생 화만 내고 살았을 거예요”라고 하잖아요. (웃음)

박찬욱 | (웃음) 그 대사 진짜 예술이야.

류승완 | 그렇죠? 어쨌든 병구가 완전히 산골에서 사니까 현대문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돌파구가 없으니까 그런 책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