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뒤발이 되어가는 배우들, 아… 감독들은 전부 지옥갈거다”
봉준호/ <살인의 추억> 감독
영화가 마술이라고? 과연 그럴까. 여기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만을 바라보는 관객이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있다. 우아한 듯 보이는 백조가 물밑에선 발을 X나게 저어야 하듯, 영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이면에는 힘겹고 뻐근한 스탭과 배우의 노동이 있다. 이곳엔 좌절의 허탈한 웃음과 성취의 기쁜 눈물이 교차하며, 서로간의 우애와 증오가 겹겹으로 꼬인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얼굴없는 범인을 쫓는 집념어린 두 형사의 이야기 <살인의 추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40여곳의 로케이션 장소를 돌아다녀야 했고, 한겨울 응달에서 쏟아지는 찬비를 맞아야 했으며, 동트는 광경을 보며 밤 촬영을 접어야 했던 6개월 동안의 강행군을 봉준호 감독이 정리했다. 촬영기간 동안 찍힌 이들 사진을 보며 그는 제작진들의 살내음을 그리워했고, 즐거운 사건들을 추억했으며, “죽으면 지옥에 갈” 스스로를 자학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억을 따라 스크린 안에선 절대 접할 수 없는 <살인의 추억>의 뒷면으로 즐거운 여행을 떠나자.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죽는다
뿌연 안개.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죽는다”라고 적힌 섬뜩한 허수아비가 보인다. 이 허수아비(정확히 표현하자면 ‘제웅’)는 실제 사건 당시, 2차 사건의 사체가 발견된 농수로에 세워져 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허수아비를 한맺힌 피해자 가족, 또는 동네주민들이 세웠던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당시의 사건 담당 형사들이 무당집의 조언에 따라 세웠다는 사실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시골 형사들은 바로 이런 형사들이다. 그런 촌형사들과 호흡을 맞춰보겠다고 터벅터벅 안개 속을 걸어오는 서울 형사 김상경의 모습. 이는 곧 영화의 도입부이자 험난한 영화촬영의 출발이기도 하다.
안개야 반갑다
바로 이 장면의 촬영현장. 이 많은 스탭과 장비들…. 이들 모두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화면 속에는 결국 배우 하나만 달랑 남게 된다. 화면 속을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고 화면 밖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신기한 사람들. 바로 스탭들이다. 어쨌든 안개장면을 찍으러 나간 새벽, 운좋게 실제 안개가 짙게 깔렸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곳이 원래 안개를 보기 힘든 곳이라는 동네 할머니의 증언까지 첨가되니 더더욱 신이 난다. 앞으로도 촬영마다 행운이 계속되기를… 하고 기도까지 해보는 나. 교회도 안 다니는 주제에….
연륜은 못 속여
본격적인 촬영. 9월 초의 뙤약볕, 논 한복판에 서 있는 김형구 촬영감독님과 나.이 상황은 두 가지로 기억 가능하다. 1) 연기를 직접 해보이는 감독을 뷰파인더로 보며 화면 사이즈를 체크해보시는 김형구 감독님. 또는, 2) 조감독들에게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젊은 감독을 느긋하게 뷰파인더로 보시면서 “허허… 뭐가 급해 저러나…” 하시는 김형구 감독님. 어쨌든 두 사람의 차림새를 자세히 보면 경륜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강렬한 자외선에 대비해 선글라스와 모자, 반사율 높은 흰색 티셔츠로 무장하신 김 감독님. 반면 쓸데없는 휴대폰만 덜렁덜렁 목에 걸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의 모습….
으갸갸, 헤드록!
그리고 고요하던 논에 수십명의 배우들이 돌진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백광호 현장검증신이다(사진 5). 용의자를 ‘헤드록’ 하고 달려가는 송강호 선배의 모습을 보니 문득 <반칙왕> 때의 한풀이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몸을 사리지 않고 완전 진흙뒤발이 되어가는 배우들. 테이크를 반복할 수록 배우들을 향한 안쓰러움이 점점 커져간다. 그러나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찍겠다는 나의 기본자세(?) 또한 확고하기 때문에…. 결국은 끝까지 찍고 또 찍고…. 아… 감독들은 전부 지옥갈거다.
변 선생니~ 임
그러나 한 장면을 끝낸 뒤, 찍어놓은 장면을 모니터로 보며 배우들이 기쁜 웃음을 터뜨릴 때는 왠지 모든 걸 용서받는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사진 하단을 자세히 보면 변희봉 선생님께서 무좀 양말을 신으셨다는 걸 알 수 있다. 난 초등학교 시절부터 변 선생님 팬이었다. <수사반장> ‘할렐루야 교주 편’에서 사이비교 교주로 열연하시던 그 그로테스크한 눈빛, 일일사극 <안국동 아씨>에서 장안을 휩쓸었던 점쟁이 역할…. 아… 그런 변 선생님과 내가 함께 작업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벌써 두 번째. <플란다스의 개> 이후 2년 만에 다시 촬영장에서 만난 변 선생님. 이날이 선생님의 촬영 첫날이셨다. 나는 괜히 변 선생님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떨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