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헐크>와 리안,그리고 미국 [1]
2003-07-04
글 : 박은영
악성 루머와 혹평 뚫고 흥행기록세운 <헐크>, 그 음모 혹은 진실

누가 리안과 <헐크>를 모함했나

“리안은 틀림없이 그 만화를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모아서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건 한 미국인이 영화정보 사이트 ‘에인트 잇 쿨뉴스’(Ain’t it Cool News)에 올린 글이며, 그 만화와 영화의 제목은 <헐크>다. 이 미국인은 리안이 <헐크>를 만든다는 사실을 참기 힘들어 하고 있다. 수억이 모여사는 나라에서 이런 의견 하나쯤 있다 해도 파리 하나 쫓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와호장룡>의 리안이 <헐크>의 감독을 맡는다는 뉴스가 알려진 뒤로, 많은 미국인들은 동양에서 온 이 작은 남자가 자신들의 유년기에 깊이 새겨진 소중한 만화를 주물럭거린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헐크>는 리안이 처음으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든 블록버스터다. 리안이 종전에 만든 모든 영화의 제작비 총합을 능가하는 대작이자, 유니버설스튜디오 사상 가장 비싼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헐크>는 좀 이상한 블록버스터다. 연출자로 결정되면서부터 “대중 오락과 사이코드라마의 만남”을 의도했다는 리안은 만화책이 원전인 여름 블록버스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진지한 캐릭터 연구를 이끌어냈다. 그는 헐크의 잊혀진 기억, 억눌린 분노와 공포에 집중했고, 언제나처럼 가족을, 아버지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다.

자기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리안은 원작에서 별개의 캐릭터로 등장한 ‘업서빙 맨’(만지면 무엇이든 그 물건으로 변신하는 악당)을 아버지 배너의 캐릭터에 합성하는 ‘각색의 모험’을 시도했다. 형식적으로도, 원작에 충실하게 헐크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멀티 이미지”라 부르는 만화식 화면분할과 전환기법을 동원하는 것 이상 ‘코믹북 ’의 출신 성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또 하나, 리안은 스타에 구애하지 않았다. 그는 호주의 TV 코미디 출신으로, 인디영화 <차퍼>에 연쇄살인마로 출연한, 그러나 할리우드에선 무명에 가까운 에릭 바나를 주인공으로 낙점했다. 유니버설은 스타를 원했지만, 리안은 “잘 알려진 얼굴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매우 이상하지만 기묘한 매력으로 가득찬 블록버스터 한편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헐크>의 탄생은 앞의 예처럼 제작초기 단계부터 부정적 여론과의 기나긴 싸움을 거치고 나서야 가능했다. 주로 온라인 사이트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던 반 리안 여론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세졌다. 주로 악소문이 선두에 섰다. “캐릭터디자인이 심각하다더라. 그래서 개봉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 감독이 원작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악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돌아다녔다. 올해 초 슈퍼볼 기간에 첫 번째 트레일러가 공개되자 난리가 났다. 에인트 잇 쿨뉴스에 오른 가장 신랄한 비판은 “가발을 쓰고 보라색 팬티를 입은 슈렉 같다”는 것. 개봉 2주 전 <헐크>의 가편집본이 유출되면서 반대 여론은 극에 달했다. “영화의 성패는 관객이 헐크를 리얼하게 느끼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헐크>는 아니다”라는 평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런 부정적 여론이 전혀 근거없는 건 아니었다. 리안은 노무현 대통령처럼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헐크의 이미지는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의 루 페리뇨였고, 캐릭터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나 감이 거의 없다”고 입 밖에 내지 말아야 될 것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뿐 아니다. 무슨 배짱인지 몰라도 “나는 컴퓨터도 제대로 켜고 끌 줄 모르는 컴맹이며, CGI 작업 경험은 <와호장룡> 액션신에서 배우들의 몸에 연결된 와이어를 지우는 게 유일했다”라고 태연히 말했다. 그가 디자인팀에 그려준 헐크 스케치가 “영락없는 슈렉”이었다는 얘기도 근거없는 소문만은 아니었다. 이러니, 그에게 <헐크>를 맡긴 게 유니버설의 실수처럼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된다. 게다가 <헐크>는 유니버설 작품 가운데 최고가인 1억5천만달러짜리 영화가 아닌가.

끝없는 루머 속 관객이 낳은 대역전극

리안

일반인들만 그랬던 건 아니다. 좀더 차분할 수 있는 언론도 호의적이기는커녕 부정적 여론을 부추기는 뉴스를 전했다. 리안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불려놓았다는 악소문은 부정확한 보도 때문이었다. 리안이 <헐크>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2001년 1월. <아마겟돈>의 작가 조너선 헨슬레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2천만달러를 탕진해 해고되고, <엑스맨>의 작가 데이비드 헤이터가 “빼어나다”고 소문난 <헐크>의 초고를 완성한 직후였다. 문제는 리안이 헤이터의 시나리오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것. 리안이 한 인터뷰에서 시나리오의 전면 수정계획을 밝히면서부터 <헐크>는 ‘방황하는 프로젝트’라는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연예지 <라이트 아웃 엔터테인먼트>가 “<헐크> 제작전선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 시가지 촬영을 목격한 제보자가 리안이 500여명의 엑스트라를 데리고 우왕좌왕하며, 번번이 촬영계획을 바꾸거나 취소하더라면서, 스탭과 배우들을 피로와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건 분명히 악의적인 보도였다. 리안은 유니버설에서 제시한 스케줄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작비 과지출은 스튜디오가 묵인할 수 있는 한도 내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악소문을 뚫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니 리안이 마음 편했을 리 없다. 천신만고 끝에 작업을 끝낸 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무식하고 용감했다. 그래서 천만다행이었다.” 그와 동고동락한 프로듀서 래리 프랑코는 조금 더 비장했다. “우리 모두 리안과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절벽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미국 비평가들이었다.

<헐크>의 제작과정을 미심쩍은 눈으로 주시하던 평단은 6월20일 미국 개봉 시점을 전후로 <헐크>와 리안에 맹공을 가했다. 리뷰의 2/3 정도는 혹평이며, 요지는 리안이 코믹북영화의 미덕을 해쳤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원작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거나 완전히 무시”한 결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길고, 지루하고, 부풀려진 영화”가 됐다고 혹평했다. <타임>도 “종교적 심리학적 서브텍스트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여느 코믹북영화와 달리 “십대 소년들에게 어필할 특수효과도, 소녀들에게 어필할 로맨스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LA타임스>는 조금 완곡하게 “팝(pop)이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인 이유, 재미와 활기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마지막 관문은 바로 관객. 여기서 대역전이 벌어졌다. <헐크>는 개봉 첫주에 6212만 달러를 벌어들여, 역대 6월 개봉작 중 최고를 기록했다. 그리고 악평보다는 적지만 호평도 제출됐다. <뉴스위크>의 믿을 만한 베테랑 데이비드 앤슨은 “코믹북영화가 일회성 휴짓조각 같은 시대, 오래 기억될 열정적이고 따뜻한 영화”라고 썼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저명한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코믹북의 다이내믹한 스토리텔링 테크닉을 절묘하게 활용한, 색다른 코믹북영화”라고 자신의 엄지손가락과 함께 리안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국에서 시사를 가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앤슨이나 에버트의 의견에 좀더 공감하게 된다.

“당신이 미국을 알아?”

리안의 <헐크>에 가해진 악소문과 반대여론은 워낙 지속적이고 광범해서 마치 어떤 음모의 산물처럼 보인다. 정말 음모를 꾸민 주체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이 악소문들의 뿌리에 오래된 반감이 자리잡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게 단순히 돌려 말하지 못하는 리안의 화술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리안과 오우삼을 비교해보면, 그 반감의 정체가 좀 드러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에 이식된 동양 감독이라는 점만 빼면, 두 사람은 거의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해야 맞다. 오우삼은 미국인들이 환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오우삼은 자신의 스크린 페르소나 주윤발과 함께 일찍이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도 많은 홍콩누아르 신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마이너리티였지만, 그 속에 90년대 미국영화의 기린아인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 등 쟁쟁한 감독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미국 영화계를 이끌어갈 미완의 거장들이 20대 시절에 홍콩영화 특히 오우삼의 액션에 매료됐고, 그들은 할리우드에 이르렀을 때 서슴없이 홍콩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경배를 자신의 영화에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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