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4]
2003-07-18

요 속물기지배,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

김은형/ <한겨레> 기자

그녀는(솔직히 그년은) 밥맛이다. 약속에 늦은 주제에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너 이거 집에서 한 거지?” D.I.Y. 방식으로 공들여 물들인 머리꼭지에 재를 뿌리고,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유학은 아무나 가니? 돈이 있어야 가지” 염장을 지른다. 게다가 또래의 회사 동료들에게는 만날 튕기면서 상사에게 생글거리는 꼴이라니….

뒷담화는 지금도 나의 특장이기는 하지만 스무살 무렵 혜주를 만났다면 나는 허구한 날 다른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과 모여 혜주의 ‘뒷담화’를 ‘깠을’ 거다. “쟤 진짜 재수없지 않냐?” “그렇게 잘나서 얼마나 잘되나 보자.” 그러고는 혜주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나 또한 ‘티나지 않게’ 개발에 땀나듯 종종거리고 살았겠지.

그러나 서른살 무렵 우리는 ‘본의 아니게’ 친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부가가치 인생”과는 상당히, 꽤, 실은 한참 먼 자리에서 말이다. 돈도, 결혼도, 성공도(성공이 무엇이더냐, 새로 나온 과자이름이더냐), 동미나 나난이 가진 한 자락의 자신감도 쥐지 못한 채 오로지 비어가는 술병을 쥐고 차라리 이렇게 외쳤겠지.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끌어안고 울고 싶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는 이기주의자에 속물이다. 그에 비하면 태희는 품성도 훌륭하고 이상도 원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나는 혜주를 보면서 더 마음이 짠하고 얄미운 이 친구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었을까. 나에게 태희가 아름다운 꿈이라면 혜주는 고단한 현실이다. “코도 높이고 영어공부도 하고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다짐하는 그는 복사, 팩스, 커피 심부름에 다리가 퉁퉁 붓도록 하루종일 종종거리지만 정작 증권회사에서 하루 중 가장 바쁘다는 파장 무렵에는 ‘엘리트’ 동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운좋게 대학교육을 받고 사회인으로 출발한 나는 혜주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년생 무렵 “뽀다구 나는 글발로 스타기자가 되겠다”던 나의 야심은 직장생활 8년만에 “어떻게든 살아봐야지”로 대폭 수정됐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나처럼 전략수정을 한 인간(여성)들이 많이 있다. 물론 니가 못나서 그렇지라고 말하면 달리 할말은 없다. 어쨌든 내가 체감한 세상은 만만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았으니까. 혜주가 코 높이고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나이 사십에 <나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자서전을 쓰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아이가 앞으로 부딪히고 넘어야 할 벽은 너무나 많다. 골백번 좌절하고 골백번 상처입으며 그는 서른이 되겠지. 할리우드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그녀의 삶 역시 전략수정이 불가피하겠지. 하지만 친구들이 먼 나라로 떠날 때 혼자 남았던 혜주는 그 욕심과 당돌함이 마모되면서도 ‘똥이 되든 된장이 되든’ 버티어나갈 것 같다.

혹시 우리, 스물에 만나 서른에 친구가 됐더라도 여전히 “니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넌 아직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 서로를 야리며 다툴 것이다. 그래도 열받는 일 터지면 서로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야, 뭐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다 있니?” 씩씩대며 같이 흥분하고 같이 ‘뒷담화’를 할 친구로 남을 것 같다.

그 뜨거운 삶에의 열망!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사방지>의 사방지

정희진/ 경희대 강사

평소 ‘영화광’ 소리를 듣는 편이지만, 남성감독의 젠더적 상상력 빈곤에 분개해온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문제적인, 정치적인, 감정이 치열한 인물인데 그런 여성 캐릭터는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몰역사적, 탈정치적 존재로 재현된다. 즉, 고정화된 기표인 경우가 많다. ‘성역할=여성’이라는 남성 작가의 인식 때문에 여성 인물은 ‘어머니’, ‘창녀’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여성 캐릭터가 역동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그들은 대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섹슈얼리티와 연애, 가족에서만 활약할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글의 가독성(可讀性)에 대한 담당 기자의 당연한 우려를 뒤로 하고, 송경식 감독의 1988년작 <사방지>(舍方知)의 사방지(이혜영)를 내가 사랑하는 ‘여자’로 골랐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그(녀)를 여성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성기는 남성이고 젖가슴을 비롯한 외모는 여성인 양성구유자 사방지는 조선 세조 때 실존 인물로, 이 영화는 지난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새롭게 주목받았다. 제작 당시 ‘사극 에로’로 분류되었던 이 독특한 ‘퀴어’영화는 과부 이씨(방희)와 사방지의 사랑, 매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음양의 섭리’로 포장된 엄격한 성별사회에서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그녀의 존재를 설명하는 해석 체계는 부재했을 것이다. 고통받는 여성 캐릭터는 흔하지만, 여성은 생각하는 존재가 못 된다는 고정 관념 때문인지 고뇌하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성별 제도의 억압에 반대하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다. 극단적 하위 주체, 사방지의 스스로를 규명하려는 몸부림, 절망, 투쟁, ‘정상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나는 사랑한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고 여성이어야 하는 성별 집착 사회는 분명, 성별이 사회를 조직하는 중요한 원리이거나 성의 구분을 통해 여성을 착취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성의 구분이 ‘자연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실증적으로 실존적으로 파열 내는 양성구유자나 트랜스젠더는 ‘체제 전복 세력’인 것이다. 사방지는 사회가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과 폭력을 안다. 모든 이로부터 거부당한 사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방지는 자신의 존재성에 의문을 품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욕망과 감정, 생존을 위해 협상과 고투를 거듭한다. 이 캐릭터의 역동성은 상당 부분은 배우 이혜영의 매력에 빚지고 있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냐!”라는 사방지의 대사는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숨막히는 장면이다.

수상한 승리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손톱>의 두 여자

김유리/ <옥탑방 고양이> 원작자

<손톱>은 사이코스릴러다. 정상적이지 않은 성격의 두 여자주인공은 얼핏 비현실적이지만, 둘을 사이코로 만드는 원인들은 사람들이 함부로 입방아 찧는 ‘여성적 습관’에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난 매우 불편했다.

혜진(인테리어 디자이너)과 소영(조각가)은 같은 미대를 나온 동창이다. 둘은 서로를 미친 듯이 질투하고 경쟁한다. 대학 다닐 땐 실력으로, 사회에 나와선 직업으로, 월수입으로, 사회적 지위로, 경쟁의 연속이다. 둘의 불안한 시선만 카메라에 잡히면 관객은 긴장이 된다. 둘이 서로를 보는 시선도 불편하기 짝이 없고, 서로에게 하는 사소한 행동도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으로 불편한 원인은, 여성 특유의 민감함과 경쟁의식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이코들이 나오는 영화인데 과장되는 게 당연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싸우고 질투하는 일들은 또 디테일하다. 슬쩍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말이 상처가 되고, 작은 행동 하나도 크게 생각하는 등, 등장인물들은 ‘속 좁은 여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자세한 부분들에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공감이 가면, 그땐 ‘여자들이 정말 저런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소영은 혜진과 남편이 자신의 험담을 하는 것을 훔쳐 듣는다. 그리고 혜진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하나씩 빼앗기 시작한다. 혜진은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경쟁은, 순수한 경쟁의 의미를 벗어나버린다. 처음엔 자신들의 능력으로 경쟁했지만, 점차 남편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소영은 혜진의 남편과 자고, 아이를 가진다. 불륜 사실을 알게 된 혜진은 소영과 격투를 벌이고, 소영은 유산하고, 진짜로 미쳐버려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는 평화를 되찾는다. 남편과 화해도 하고, 아이도 가진다. 물론 모든 스릴러영화에 반전이 있듯, 정신병원을 탈출한 소영이 혜진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의는 아이 엄마의 편이다. 정신병자는 아이 엄마의 손에 격퇴된다.

누구는 이 영화의 주제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고 했다. ‘남의 흉을 보기 전에는 반드시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수상하다. 여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모습의 질투와 시기와 왜곡된 욕망. 그리고 항상 승리하는 모성.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유쾌하게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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