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2]
2003-07-18
글 : 박혜명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화려한 싱글? No, 쿨한 싱글!

섹스를 제대로 알게 되서 쿨해지는 걸까, 쿨해서 섹스를 잘하는 걸까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여성의 섹스에 대한 온전한 성찰은 5년 전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처음 제기됐고, 할 만한 말을 죄다 해버렸다. 이 기념비적 작품에서 연(진희경)은 가장 ‘쿨’하지 못한 캐릭터여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연은 섹스를 사랑과 분리하지 않으며 당연히 결혼과도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그가 섹스를 할 때면 불감증이다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랬던 그가 비로소 오르가슴에 오른 순간은 그의 꿈이었던 ‘가야금 연주론’(남자를 가야금처럼 눕혀놓고 애무와 삽입의 타이밍과 방식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것)을 실행할 때였으며, 그 시기는 결혼을 전제로 집착했던 남자(조재현)와의 관계에서 ‘쿨’해졌을 때다. <밀애>의 미흔은 쿨해지면서 섹스를 즐기게 된 연의 경우와 반대다. 미흔은 윗집 남자에게 어떤 매력을 느꼈다는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은 채 그가 제안한 게임을 갑자기 받아들인다. 그의 정성스런 애무에 힘입어 미흔의 몸은 흥분하기 시작하고, 미소를 되찾으며, 새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미흔의 변화는 멋진 섹스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관계에서 ‘쿨’해지고, 연인이 죽은 다음에도 아픈 과거를 헤집어가며 슬프게 사는 여성이 아닌 ‘쿨’한 싱글로 살기 시작했다. 섹스에 눈뜨기 전, 미흔은 “난 더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런데도 왜 난 이 집에서 네 옆(남편)에 붙어 살고 있을까”라며 식물인간처럼 살지 않았던가.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호정(강수연)과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는 그 기원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등장부터 ‘쿨한 싱글’들이다. 자유롭게 섹스를 즐기는 건 물론이고 관계(결혼 혹은 사랑)의 자장력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놓았다. “벗지 말고 그냥 넣어”, “안에다 하지마”. 태연하게 섹스를 주도하지만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엄정화)는 좀 다르다. 그는 결혼이란 관계에 집착한다. 결혼에 의욕적인 여느 여자캐릭터와 다른 건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거의 동시에 두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이제 두집 살림의 주체는 여자이기도 하다. 연희는 어떤 파국도 응징도 맞지 않는다.

‘쿨한 싱글’을 가장 단아하게 보여준 건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다. 은수는 한번 결혼을 했고, 그게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인지 늘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 비록 “넌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라고 면박받기는 했으나 “차 마시고 가실래요?”(<싱글즈>의 나난) 같은 표준어법을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응용할 줄 알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넌 영원히 내 거 아니었니?’로 즉각 해석해 적절히 대처한다. 비록 감독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상우쪽이 행복해 보인다. 돌아볼수록 은수가, 그 애가 안쓰럽다”고 했지만, 은수가 상우(유지태)와 헤어진 뒤 불행을 느끼며 살았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불행의 기운은 상우의 닮은꼴 같은 할머니에게서 느껴지지 않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좋았던 것은, 이 여자가 영악하고 능력있어서 두 남자를 거느리는구나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기존의 사랑관과 결혼관을 뒤집었다는 점에 있었다. 보통은 연인과 스테이크를 먹고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그게 당연하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연희는 남편에게 케이크를 구워주고 준영한테는 콩나물비빔밥을 해준다. 모두가 생각하는 바람의 기본원칙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람마다 비밀이 있다. <엄마에게 새 새인이 생겼어요>라는 영화의 카피를 만들면서 ‘그 여자의 사랑을 인정한다’라고 썼는데 어떻게 그런 말로 불륜을 조장하느냐면서 남자들로부터 항의전화가 왔었다. 정말 놀랐다. 여자들은 숨기는 것뿐이다.”(정승혜 <씨네월드> 이사)

가족은 꾸리기 나름이다

각광받는 싱글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섹스의 부산물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임신이다. 이 대목에 관한 한 여성캐릭터들의 입장은 아직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임신에 대한 예방조처를 뜻밖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례(<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신아는 콘돔을 알아서 착용하려는 남자에게 이물감 운운하며 거부하는 놀라운 행태를 보여준다)가 있지만 대체로 무방비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들은 낙태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다. 하여 이상한 방식으로 아이를 정리해버린다. <마들렌>처럼 교통사고를 일으키거나 <처녀들의 저녁식사>처럼 등산사고를 내서 자연유산시킨다(그렇지만 <처녀들의…>에서 응급차에 실려가는 순이와 친구들은 유산된 사실을 알고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별다른 회의없이 낙태를 선택한 <색즉시공>의 은효(하지원)나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차력 개그쇼를 벌이며 지원사격을 해준 은식(임창정)은 낙태에 대한 응징으로 얼룩진 <폰>과 의 저주를 받을지 모른다.

처녀의 임신 대처법으로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한 게 싱글맘이다. <싱글즈>에서 동미(엄정화)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한다. 당연히 아이 아버지와의 결혼계획 따위는 없다. 아버지 구실이 필요하다면 여자친구 나난(장진영)이 떠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바람난 가족>의 호정(문소리)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한다(비록 그가 처녀는 아니지만). 쿨한 여성 싱글들의 섹스는 일종의 대안가족 만들기에 이르렀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에고이스트가 결혼 자체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혼 외에도 남녀의 동등한 결합의 형태가 나타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연희 같은 발칙한 여성 에고이스트들이지 않을까. 그런데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일수록 이 영화를 불쾌해하기에 의외였다.”(<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유하 감독)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판타지?

<싱글즈>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웬만해선 ‘선뜻 자주면 저 남자가 더이상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지 몰라, 아마 날 차버릴 거야’라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쿨한 싱글들의 쿨한 섹스는 대체로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런 의구심이 고개를 내밀 법도 하다. 쏟아지고 있는 ‘쿨한 섹스를 즐기는 여성캐릭터’들은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남성 리버럴리스트들의 판타지가 반영된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쿨한 여성캐릭터들이 대체로 개인주의자이고 그들에게 사회적 진보를 꿈꿀 여지가 없다는 점도 의혹을 키운다. 싱글맘이라는 결론에 대해 혼자서 일도 잘해야 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연애도 즐겨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또 다른 ‘슈퍼우먼 판타지’로 해석해볼 여지도 많다. 여성의 자기 욕구를 그리는 데 충실한 영화들은 한가롭게 섹스와 연애를 추구하기에는 골치 아프게 쌓여 있는 다른 문제들이 버거워 버둥거리는 현실의 여성들까지 포괄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고양이를 부탁해>가 있지만 그들은 ‘스무살, 섹스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며 아예 섹스 자체를 추방해버렸다).

이건 과도한 트집일 수 있다. “도대체 형사와 검사들이 언제부터 내 아랫도리를 감시해왔니? 간통죄가 뭐니? 국가보안법도 아니고”라며 한탄하다가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가버린 호정(<처녀들의 저녁식사>)에게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말하기에는 아직 주저함이 앞선다. 성공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는 남성은 야심찬 에너자이저로 수용되지만 돈 밝히는 여자는 싸가지 없는 속물로 치부된다. 무엇보다 간통죄는 여전히 유효하며 호주제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영화가 현실을 앞질러가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호정은 망명 5년 만에 <바람난 가족>을 통해 ‘굉장한 유부녀’로 돌아온다. 어떤 형태의 섹스도, 시어머니와 남편이란 관계도, 멈춰서버린 꿈도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여성캐릭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하는 유부녀 호정은 험한 현실과 만나 어떤 파열음을 낼까.

‘처녀’씨 가문의 가계도 앞으로 더욱 ‘바람’하시라!

1998년, ‘처녀’씨 성(性)을 가진 세명의 여인들이 이 땅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호정, 연, 순이라고 불린 이들은, 야한 농담과 발칙한 삶을 저마다 특색있게 즐겼다 해서 여성의 성 생활사에 한획을 긋는 인물들로 평가받게 되었다.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도 적극 활용, 자손을 퍼뜨리는 의무 또한 다했다. 그 후손들은 부모세대와 같고 또 다른 삶을 각자 영위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여성의 삶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이 위대한 세명의 시조가 세웠고 날마다 그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처녀’씨 가문의 가계도를 펼쳐보려 한다. 이제 겨우 3대째에 접어든 가문이지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형태의 자손들이 배출되어 조상의 훌륭함을 잇고 모자람을 극복해 나갈 것이며, 이로서 가문의 영광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녀호정 프리섹스주의자. 간통죄로 고소당함으로서 분방한 자유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다.

큰딸/연희(<결혼은, 미친 짓이다>) 어머니의 대담함과 미모를 물려받아 두집 살림을 차렸으나, 결혼 잘할 궁리만 했다는 점이 문제시됐다.

쌍둥이 손녀 동미(<싱글즈>)와 연(<바람난 가족>) 할머니의 배짱이 흐르는 핏대를 세움. 동미는 싱글맘 선언.

작은딸/은수(<봄날은 간다>) 결혼에도 관심없고 매사에 쿨한 것이 엄마를 빼다 박았지만, 섹스 자체를 즐기진 않는다.

처녀연 남자친구에게 몸과 마음과 돈을 바쳐가며, 사랑과 결혼과 섹스의 삼위일체를 추구한 여자. 진정한 오르가슴 획득.

큰딸/정연(<선물>) 가게 운영으로 남편 뒷바라지에 충실, 삼위일체 추구. 엄마와 달리 다른 남자 경험은 없다.

손녀/은효(<색즉시공>) 남자친구 애를 임신, 피임도 안한다고 구박받고 낙태. 그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품에 안겼다.

작은딸/미흔(<밀애>) 사랑과 섹스를 뜨겁게 일치시켰고 홀로서기에 성공.

손녀/신아(<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엄마처럼 격렬한 섹스를 통해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에 충실했으나, 이별 앞에서 쿨해졌다.

처녀순 싱글맘의 의지를 보인 용기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추구하려는 열정이 강하다. 자연히 남자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외동딸/금순(<굳세어라 금순아>) 남편을 구출해내는 용기, 일에 대한 열정에서 엄마를 빼박았다.

큰손녀/나난(<싱글즈>) 할머니의 독립심을 물려받아 조건좋은 결혼을 제 발로 찼다.

작은손녀/수완(<동갑내기 과외하기>) 역시 씩씩하고 독립적. 돈 많은 남자친구를 얻었지만 과외로 용돈벌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세상의 여자들이 어디 ‘처녀’씨 가문 출신뿐이랴. 처녀호정보다도 더 섹스에 미쳐, 일이고 나발이고 그것밖에 모르던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Y다. 두들겨 맞는 재미에서 두들겨 패는 재미까지, 섹스가 주는 순수하고 극단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다 종족번식 시기를 놓쳤다. 이렇게 Y의 가문은 1대에서 씨가 말랐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알게 모르게 남긴 자손들이 음지에서 B급 형태로 융성하고 있다 한다.

그러고도 어디 이뿐이랴. 성경험 없는 처녀순도 호기심은 있었는데, 인천 출신의 고양이 3자매는 호기심조차 없었다. 섹스를 무시한 채 자기 일을 찾는 것만이 생의 중요 과제였던 태희, 혜주, 그리고 지영. 이들 역시 1대에서 씨를 말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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