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병든 게 변명이 되니?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주일매
박은주/ <한국일보> 기자
(얼굴 모자이크 처리, 음성 변조) “처음엔 그 여자가 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체육관에서 결혼한다는 게 제 스타일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참았죠. 그런데 그 여자, 죽을 병에 걸리고도 아무 말도 없이 저랑 결혼을 하려고 했다니 말이 됩니까? 부모님은 그날 충격을 받고 아직도 매일 아침 공복에 우황청심원을 두알씩 복용하고 계십니다. 이거 결혼사기 아닙니까?”
“일매는 지가 지키겠심더.” 여자친구에게 손끝 하나 안 대는 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손태일(차태현)이나, “니만 믿는다”는 선생 영달(유동근)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육체와 정신의 합일점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설교하거나 ‘가부장적 틀을 온존시키려는 구시대적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다. 이른바 ‘대박’영화, 혹은 멜로영화에서 제대로 여성성이 구현된 것이 있었던가.
신세대, 엽기, 발랄, 당대 코드, 당당한 여자 등 수많은 수식어를 남겼던 <엽기적인 그녀>조차 ‘그녀의 엽기성은 알고보니 아픈 사랑의 상처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식으로 설명되는 마당에 다른 멜로성 코미디영화가 여성을 표피적으로 묘사한다거나 가부장적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주장은 철지난 표어처럼 진부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주일매(손예진)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낡고 진부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울며 돌아서는 태일의 뒤통수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바람둥이니까. 바람둥이니까. 바람둥이니까.” 무수한 ‘바람남’이 있었으나, 결혼으로 보복당하는 바람남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것 같다. 게다가 곧 죽게 될 (것이라 믿는) 일매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람남과 굳이 결혼하려 한 것일까. 게다가 그 아버지란 작자는 왜 그런 무모한 시도에 동참함으로써 ‘부녀 결혼 사기단’을 결성하게 된 것일까.
바람남이란 무엇인가. 만나는 여자마다 매 순간 사랑에 빠지며, ‘그걸 거부할 어떠한 물리적 힘도 갖고 있지 않는’ (<세기말>의 차승원처럼) 이가 바로 바람남 아니던가. 더 큰 문제는 수많은 멜로영화 주인공이 그랬듯, 일매 역시 ‘투병권’을 포기하고, ‘그냥 죽는 것이 아름답다’는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와중에 대형 결혼 사기극까지 벌였다.
그럼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일매가 결혼을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1. 처녀 귀신이 될까 두려워 2. 아버지에게 결혼 부조금으로 한 재산을 만들어주기 위해 3. 직장의 바람남에게 ‘결혼 잘못하면 신세 망친다’는 교훈을 주려고 4. 체육관에 서 보는 게 꿈이어서. 아무래도 3번 같지만, 그건 불치병에 걸린 일매가 할 일은 아니었다. 병든 여성 캐릭터도 좀 진화하면 안 될까?
남성 판타지의 복화술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신아
박민희/ <한겨레21> 기자 minggu@hani.co.kr
“나는 이물질이 들어오는 게 싫거든요.”
콘돔을 쓰려는 동기에게 신아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래도 신아가 ‘당당하고 쿨한’ 여자라는 평론가들의 만장일치 비평에 진도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임신하면 문제를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이 99%인 남자와 섹스하면서, 남자들이 콘돔 쓰기를 거부하면서 가장 흔히 내놓는 변명을 ‘주체적인 현대 여성의 입으로’ 선언하는 장면 아닌가. 나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곳곳에 그런 위험이 숨어 있다는 혐의를 떨칠 수 없었다. 남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남자들이 당당한 여성이라고 내세운’ 신아의 입을 빌려서 얘기하는 복화술 영화.
“당신은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할 수 있습니까?”라는 홍보문구를 내세운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신아는 사뭇 당당한 듯하다. 처음 여관에 같이 간 남자가 속옷을 보고 멋있다고 하자 “비싼 거예요”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애인 있냐”고 묻자 “많아요, 그럼 어쩔 거예요”라고 남자의 소유여부에 대한 질문을 비웃는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점점 이 여자가 아까 그 여자인가 싶다. 아픈지 좋은지 모를 신음소리를 계속 내면서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남자의 무리한 요구는 다 들어준다. 섹스판 <봄날은 간다>를 의식한 듯한 감독은 남자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사랑이 점차 어긋난다는 변명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신아는 공원의 공중화장실과 시외버스에서 억지로 섹스를 할 때나 항문섹스를 강요당하면서 참고 또 참아낸다. 그리고,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알아서 떠나준다.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의 당당함이란 딱 이런 것 아닌가. 현모양처형 여자는 솔직히 매력없다. 적당히 도도하고 도발적인 여자가, 관계가 시작되면 말로는 싫다면서도 남자 뜻대로 다 해주다가 남자의 마음이 식자 “책임지라”고 구질구질하게 울고 불고 안 하고 알아서 떠나주는 놀라운 판타지 말이다.
주체적인 여자는 ‘Yes’라고 할 자유만 있고, ‘No’라고 말할 자유는 없는가. 섹스에만 국한된 여성의 자유는 여성 삶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남성의 성적 자유를 위한 (대부분의 이성애 섹스에서 꼭 필요한 상대인) 여성의 범위만 넓히게 되는 함정은 없는가. ‘당당한 여자의 조건’마저 남성들에게 전유됨으로써 그런 위험은 한층 커진다. 수천년 동안 몸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이 다시 성적 욕구와 몸으로만 재단된다.
이 영화는 수없이 반복되는 섹스장면으로 그런 혐의를 증명한다. 여성이 주체가 된다면 당연히 등장해야 할 대화를 통한 소통, 다양한 성감대에 대한 탐색, 충분한 대화나 전희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초콜릿을 남자의 성기에 바르는 장면이 유일할 뿐이다. 대신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남자는 삽입하는 남성 중심의 성기 삽입, 후위, 오럴섹스 장면이 영화 내내 지루하게 반복된다.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소제목으로 감독이 자신있게 붙인 ‘성기로 사과하고 사정으로 위로받는다’는 식의 남성 중심 오르가슴 공식 역시 <맛있는 섹스…>를 맛없게 만든다.
신나는 불경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싱글즈>의 동미와 나난
황진미/ 영화평론가
서른이 되던 해 자작시를 썼었다. “어찌할까// 이토록 막막하고/ (중략)//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서른 살의/ (중략)// 여전히 가진 것 없고/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여전히 갈 곳이 없는(후략)….” 그랬다. 좀더 살면 편해질 거라고 누군가 귀띔해주었지만 곧이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지도 못하고 저렇게 죽지도 못할 때 서른살은 온다”던 최승자의 시구만 떠올랐다. 누구나 그 나이가 그런가보다. 그래서 영화도 많다. 그러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노총각의 고독감을 그리는가 싶더니 ‘나도 나 좋다고 알짱거리는 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드러내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노처녀의 사실감 넘치는 독백으로 시작되더니 ‘알고보니 저 썰렁한 놈이 진국일세!’가 결론이다(집안끼리 아는 ‘오빠’와의 ‘안전 만빵’ 중매! 흉물스런 보수회귀!) 참.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라는 원색적인 제목의 영화도 있었지. 노처녀 앞에 어른거리던 놈의 선문답 몇 마디에 그녀의 고민이 일순간 해결되던… 결혼정보회사 찌라시 같은 영화였지. 그 나이의 막연함을 <오! 수정>의 자막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으로 미봉하려 들지 않는 진지한 영화는 <파니핑크> 정도인가보다.
<싱글즈>는 짝찾기 전형을 비껴가며,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이분도식도 피한다. <처녀들…>에서 강수연은 프리섹스주의자이고, 진희경은 결혼에 집착하는 여자였다. 둘의 차이는 경제여건에서 기인한 듯하다. 강수연은 애초에 돈 많은 사업가이고, 진희경은 얹혀사는 호텔직원이었다. 그러나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는 자유로운 의식을 지녔지만, 결코 가진 게 많아 누리는 허영이 아니다. 그녀는 일에 재능과 의욕이 있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부모도 신임하지 않는다. “우리 나이에 목돈 쥘 방법은 결혼밖에 없다… 그래야 노인네들도 돈을 풀고… 그 돈으로 창업이나 할까?” 현실적인 상황인식이다. 나난(장진영)의 상황은 더 미묘하다. 고전 여성영화라면, 나난이 디자이너로 재능과 열정이 있고 인정도 받고 있는데, 조건(만) 좋은 남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물위를 걷는 여자>처럼. 그러나 그녀는 잘 나가지 않고, 그도 조건만 좋은 놈이 아니다. (그녀를 위한 그의 행동들은 충분히 사랑스럽다.) 그의 제안에 “당분간은”이라는 단서를 달며 거절하는 것이 ‘조건은 좋지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느니,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혼자 살겠다’는 정치 선언이 아니다. “내 인생이 똥인지 된장인지 더 살아봐야겠다”는 것은 ‘자기 배려’의 윤리 선언에 가깝다. 그녀는 모호한 의지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호박을 걷어차는 불경(不敬)을 행한다. 불경은 동미의 입을 통해 확장된다. “내 애니까 낳는다.” ‘여성의 신체적 권리로 낙태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권리로 모성권’을 온몸으로 주장하기 위해 힘든 길을 가고자 한다. 여기에 나난은 “아빠노릇…” 운운하며 레즈비언적(!) 동맹을 선포한다. 가부장제는 엿이나 먹어라. 불경의 극치이다.
흔히들 ‘화려한 싱글’을 논한다. 철든 이들은 싱글이 결코 화려할 수 없다고 진실을 말한다. 요는 “화려한 싱글이면 괜찮다. 그러나 그럴 자신 없으면 관둬라”이다. 그런데 독신으로 살지 결혼할지 여부가 이해득실, 수지타산을 통해 결정되는 문제이어야 할까? “남의 손 빌려 밑 닦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주체적 각성과 ‘내 삶의 결정권을 섣불리 양도하지 않겠다’는 실존적 자각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화려할 자신 눈곱만큼도 없고, 실현할 자아를 아직 확실히 찾지도 못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번번이 호박을 놓치는 우(愚)를 범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