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1]
2003-07-18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싱글즈> <바람난 가족>에서 만개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그 현상을 들여다보다

맛있는 섹스를 즐기는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역사와 삶이 일관된 의미나 방향을 갖고 있다는 믿음에 소극적인 시대이지만, 그래도 만약 한국 영화사를 굳이 한줄로 꿰어보자고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영화 속 여성들의 모습이다. 남성감독들의 시선을 통해 빚어지고 남성주인공들의 고뇌와 욕망에 따라 부침하면서도, 그녀들은 지금 여기 내 삶의 기원을 서글프게, 때로는 매혹적으로 재구성해준다.

근대 이후, 그러니까 영화 속에 삶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 여성이 문제적 존재로 되는 것은 늘 육체로부터 비롯되었다. 지적이고 도전적인 신여성의 삶을 살았던 초창기 여배우 복혜숙은 영화 속에 종아리가 노출되고 남자배우와 대낮에 손을 잡는 장면 때문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비너스다방의 마담으로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일제 당국에 보내는, 말하자면 육체의 욕망을 공인하라는 정치적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유혹과 봉쇄를 동시에 뜻하는 한복 아래로 그 아름다운 육체를 감추고 있던 최은희는 <지옥화>(1958)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선보인다. 어느 날 UFO가 떨어뜨린 낯선 세계 같은 미군기지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의상과 언어, 사고방식, 특히 섹슈얼리티를 향유하고 표현하는 형식까지도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소냐는 매혹과 저주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늪 속으로 가라앉았다.

김지미의 등장은 한국 멜로드라마 속 여성의 역사에 전환적인 의미를 가져왔다고 일컬어진다. <자유부인>(1956)의 주인공이 한복에서 양장 투피스로 갈아입었을 때 경제적인 독립성과 함께 성적인 자유에도 눈을 뜬, 즉 타락이 시작된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과 달리 김지미는 서양식 의상을 입고도 긍정적인 여성으로 표상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60년대는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사실을 영화 안에서 수긍한 셈이었다.

<영자의 전성시대>(1974)는 영자(염복순)의 육체 안에 1970년대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새겨넣었다. 가난한 가족/농촌의 희생적 구원자, 사회적으로 값싸고 유용한 노동수단, 착취적인 남성 성애의 대상,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의 증거, 거기에 해탈과 구원의 모성 이미지까지 중첩되어 있다. 여성의 육체는 이 모든 의미가 생성하고 활동하는 장이었다.

섹스의 해방, 정치적 검열의 지속이라는 반쪽짜리 민주화를 맞이했던 1980년대의 영화는 <애마부인>과 <매춘> 시리즈로 특징지어진다. 관음증과 사회비판이라는, 80년대 남성 자아의 모순된 욕망을 하나로 우겨넣은 이 시리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도입되는 계기였다.

여성의 삶이 외적인 무거운 의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순전히 사적인 영역 안에서, 특히 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문제화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결혼 이야기>(1992)의 지혜(심혜진)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고 성적으로도 아무런 억압이 없는 건강함을 능동적으로 추구한 첫 번째 여성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또 다른 10년이 지난 지금, 바야흐로 한국영화 안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만개하고 있다. 뭇 여성들이 가정을 떠나거나 이중 살림을 하거나 아예 가정 꾸리기를 포기 혹은 유보한다. 그녀들의 여정은 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저러한 경험과 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여성의 삶에 동반자적 시선을 유지하려는 남성 필자가 쓴, 집을 떠나 길 위에 선 여성들의 오디세이를 일별하면서, 우리가 쪼개진 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제 진정으로 단독자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맞아봐야 내가 누군지 안다”

연인(아버지)을 향해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다

<바람난 가족>

또 하나의 군홧발이 광화문을 점거했던 1980년대 초 배우 정윤희는 연거푸 새가 되어 뭇 남성의 맘을 뒤흔들었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에 이어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정윤희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들은 그러나 에로영화가 아닐 수 있다. 정진우 감독은 <앵무새…>를 “반체제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종의 영화를 촬영하던 그는 야외 로케이션 현장에서 기관원들에게 연행돼 몹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에서 쓰라는 여배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정 감독은 군부 정권을 응징하고자 <앵무새…>를 기획했다. 그에 따르면, 얻어다 키운 ‘가짜 남매’ 문이(정윤희)와 수련의 애절한 사랑을 강압적으로 저지하는 홀아비 최 영감은 군부를 상징한다. 최 영감은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폭탄 파편으로 성불구가 됐고, 그뒤 ‘제복’을 입고 철도청의 선로반장으로 일한다. 과연 <앵무새…>를 반체제영화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문이가 여성캐릭터의 퇴행성을 온몸으로, 에로틱하게 보여주는 건 분명하다. 문이는 틈만 나면 수련과 몸을 섞지만 길러준 아버지의 지엄한 분부에 따라 자기 욕망을 놀랍게 억제해버린다. 그토록 사랑하는 수련이 아무리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고 설득해도 소용없다. 그리고는 늘 얼굴에 구슬픈 표정을 유지하면서 ‘한맺힌’ 한국의 여인상을 체현한다. 그에게는 자기 주장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벙어리로 만들어버렸으니까. ‘기필코’ 그는 강간당하고 만다. 그 ‘죄진 몸’으로 인해 연인과 아버지를 코앞에 두고 일말의 회의도 없이 스스로 생명을 거둔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났으나 ‘문이’는 계속 부활한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일매와 태일이는 문이와 수련 같은 ‘유사 남매’로 아버지의 지엄한 분부에 따라 입맞춤조차 지연하며 비극적 사랑을 만들어간다. 태일과 아버지의 연합작전에 부응하는 일매의 주체성은 문이보다 못하면 못했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성에게 원죄처럼 ‘한’을 부여하는 보편적 기제는 뒤틀린 가정이거나 강간이다. 가족사의 굴곡이나 강간의 기억이 어떤 콤플렉스를 만들어내는지 그 심리적 과정을 현미경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게 김형경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다. 장선우의 <거짓말>에서 Y(김태연)는 그 두 가지 기제에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도전했다. Y가 아버지뻘의 J와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에 빠져드는 계기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큰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고, 둘째언니는 강간당한 뒤 자신에게 그 짓을 저지른 남자와 결혼해서 브라질로 이민가버렸다. “난 내가 스물살 되기 전에, 강간당하기 전에 (섹스를) 하고 싶었어.”

주목할 만한 건 Y가 자기를 감시하며 아버지 노릇을 하는 오빠를 계획적으로 제거한다는 점이다. “드디어 보내버렸어. 나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오빠,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대.” 오토바이 사고는 Y의 유인작전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J의 성기가 때리거나 맞아야 단단해지는 이유는 J가 아버지로부터 ‘밧따’를 맞으며 성장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어렴풋이 설명된다. 군홧발에 짓밟혀온 남자(아버지)들은 대체로 그 운명을 여자(어머니)에게 되풀이했다. 어느 순간, 일방적으로 맞던 Y는 맞기를 원하는 J에게 몽둥이를 든다. “내가 너 만나서 안 때리면 무슨 재미냐. 마치 엄마가 된 기분야.” 이혼할 테니 자기하고 결혼하자는 J에게 Y는 단호하게 말한다. “너 이혼하면 안 만나. 언니(J의 아내)한테 그러듯 나한테도 그럴 수 있어.” 영화 끝, Y는 브라질의 언니에게로 가면서 파리의 J에게 들러 곡괭이 자루로 마지막 쾌락을 안겨준다. 아마도 Y는 J와의 관계에서 어떤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다. 그가 브라질의 언니와 형부에게 날아가 어떤 ‘가르침’를 전수했는지 알 수 없으나 Y의 자아찾기 방식에 우리 사회는 펄쩍 뛰었다. 두 차례의 등급보류가 보여주듯.

아버지의 또 다른 얼굴은 남편이다. 남편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여성은 대체로 바람을 피운다. 한국영화에서 바람피우는 여자는 응징당해왔고,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은 번번이 좌절했다. <밀애>에서 미흔(김윤진)의 결말은 시간제 일용직, 싸구려 음식, 단칸방 신세이지만 그는 성공했다. 미흔은 “당신 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던 남자를 어이없게 잃었지만 홀로 독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것 같다. 활력은 불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그가 굳이 누군가로부터 처절하게 배반당하고서야, 누군가로부터 뜨겁게 사랑받고서야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됐는지 따진다면(충분히 따져야겠지만) 이런 답변도 가능할 듯싶다. “맞아봐야 내가 누군지 안다.”(<파이트클럽>에서)

<정사>

어쨌든 미흔은 바람을 피우면서 비로소 자신을 찾았다. <정사>의 서현(이미숙)이 그랬듯이. 비록 “바람피웠으니 죽어도 싸지”란 소리를 듣긴 했으나 <해피엔드>의 최보라(전도연)도 바람피우는 아내의 새로운 캐릭터를 열어 보였다. 그는 자기 일에 당당하며,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일관되게 주도권을 행사했다. 심지어 아이와의 관계에서 희생 일변도였던 질긴 모성애를 과감히 떨치고 자기 욕망을 더 앞세웠다(비록 이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바람피우는 건 이제 응징의 대상이 아닌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됐다.

<거짓말>은 단순히 새로운 세계를 봤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 상식의 경계선을 확 허물어뜨리는, 삶이 확장되는 듯한 경험을 줬다.”(심보경 <명필름> 이사)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 감독 임상수 인터뷰

“‘바람난 처녀’도 ‘바람난 유부녀’의 경지에 오르길”

임상수 감독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바람난 가족>에 이르기까지 섹스, 특히 여성의 섹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좀 상투적이지만 꼭 필요한 질문이라서. 대답도 상투적이라 미안하다. 기왕에 어차피 하고 살아야 하는 섹스라면 잘(!) 하고 살자는, 정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만큼 신선하고 명쾌하게 여성의 성을 다룬 작품은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는 여성의 성만을 다루느냐 아니냐의 차이점이 있겠지만,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가 특별히 진전되고 있지 않은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 한국 관객의 삶, 감독들의 삶, 비평자들의 삶이 그만큼 진전되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리하여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건 나에겐 즐거운 일이지만.

<바람난 가족>의 화두는 섹스가 아니라 몇 가지 섹스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보조수단으로 쓴 듯한데. 친구들에게 난 ‘떡감독’으로 통한다. ‘떡감독’이라는 지위를 즐긴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솔직히 지겹다. ‘떡신’ 찍기도 징글징글하고. <바람난 가족>은 내 일련의 ‘떡영화’의 완결편이다. 이제 ‘떡감독’의 지위를 반납한다.

<바람난 가족>에서 바람난 처녀 김연(백정림)은 섹스를 주도할 뿐 아니라 충분히 즐기고 있고, 또 굉장히 쿨하다. 이런 캐릭터는 이제 한국영화에서 새롭지 않다. 그러나 호정(문소리)은 좀 다르다. 섹스에 대해 쿨할 뿐 아니라 섹스에 ‘해탈’한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섹스를 삐딱하게 보거나 거부하지 않지만(심지어 남편의 바람도 네가 즐겁다면야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는 태도) 내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건 다른 데 있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건 입양아와 친아들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데, 호정의 시야는 어디에 닿아 있는 걸까? 바라건대 ‘바람난 처녀’도 언제가 ‘바람난 유부녀’의 경지에 오를 수 있기를. 사실 ‘바람난 할머니’를 포함한 이 세 여자의 삶은 경로는 달라도 모두 한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 하루를 살아도 솔직하게 살아야지, 그렇지 않은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싱글맘으로의 결말이 마치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혼자서 일도 잘하고, 아이도 키우고, 연애도 즐기는 건 자유로워 보이지만 가혹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건 아닐까. 인생은 원래 가혹한 거다. 일 하면서 먹고살기도, 가족을 꾸리며 애를 키우기도, 연애를 즐기며 살기도, 다 가혹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그만큼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제목도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가치를 공공연히 밝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임상수 감독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왜 그런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여자가 남자의 미래다’라는 얘기를 할 거라고 보이지는 않고…. 내게 한국 남자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며 불안하고 허세투성이며 유치하게 보인다. 마치 바깥 세상을 두려워하는 우물 안의 깡패 개구리처럼.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이제 또 다른 질적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섹스에 쿨한 여성캐릭터는 긍정적이지만 여기에는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판타지가 반영돼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환상이- 남성 마초나 남성 쇼비니스트의 환상보다는 여전히 나을 것이다. 그런 환상 속에서 어떤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환상 속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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