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할리우드 속 TV,미국의 분열을 말하다 [2]
2003-07-2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땡쇼>

<오토 포커스>를 <컨페션>과 연이어 말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텔레비전의 아이콘에 미국이라는 이름을 덧입혀 이중적인 잣대를 재보는 영화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텔레비전 쇼의 주인공들이 그 대부분이다. <시네아스트>가 “<호건스 히어로>가 역사적 외설로 공격받았다면, 척 배리스의 플릭 쇼는 문화적 역병으로 경멸받았다”고 두편의 쇼에 대해 비교분석을 할지언정 두편 모두 인기를 얻었다. 대중은, 미국은, 여기에, 이들에게, 광분했다. 대신 그 주인공들이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연하자면, 텔레비전 쇼의 주인공들을 불러들이는 영화에는 다른 이유의 한축이 있다. 텔레비전 ‘쇼’ 자체를 부정하고, 쇼 비즈니스 산업으로서의 텔레비전을 비판하는 영화들이 있다. <트루먼 쇼>는 텔레비전의 기획된 세트장 안에 갇혀 일생 동안 양육된 남자를 주인공으로 텔레비전의 관음증에 비판의 칼날을 세웠고, <퀴즈쇼>는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텔레비전 퀴즈쇼의 시스템을 비판했다. 또는 밀로스 포먼의 <맨 온 더 문>은 앤디 카우프만이라는 걸출한 실제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여, 오히려 텔레비전 쇼에 보내는 대중의 욕망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컨페션>은 그 프로그램의 질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 또는 텔레비전이 어떤 문화적인 중요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대중의 놀이인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적, 공적으로 이중적인 관계에 얽혀 있는 한 인간의 분열적인 정체성이 중심이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유명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쇼프로의, 가장 기괴한 프로듀서.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이기에, 그가 정부의 지시에 의해 33명을 죽였다고 말하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미국이 숨겨둔 분열의 호흡을 전달한다.

텔레비전을 영화의 중심 소재로 삼는 <캐치 미 이프 유 캔>, 쇼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를 주인공으로 하는 <컨페션>은 둘 모두 텔레비전의 ‘작품’은 아니다. 그런 점들이 소재가 되었을 때 얼마나 근접하여 미국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서 역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을 영화로 가져오는 직접적인 하나의 방법이 있다. 이미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시리즈들을 직접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최근, 가장 손쉬운 예는 시리즈의 영화화가 있다. <아담스 패밀리> <플린스톤> <로스트 인 스페이스> <샤프트>가 이런 성향에 의한 텔레비전 시리즈 영화화의 전초전이었다. 각양각색의 이유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화화된 모든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미국의 분열증을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무엇을 보여주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올해 개봉한 두편의 영화 <미녀 삼총사: 맥시멈 리스크>와 <헐크>가 바로 그런 작품들이다.

<미녀 삼총사> vs 강하고 섹시한 미국이라고?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

<미녀 삼총사> 1, 2편이 보여주는 미국은 보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미국이다. 우선 팔등신의 미녀들이 70년대를 훌쩍 지나 2000년대에 안착하면서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신세기 액션을 선보인다. 그런 액션이 아니어도 단지 이 세 미녀가 스크린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쇼다. 놀라운 속도로 한꺼번에 볼거리를 무진장 쏟아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의 쇼다. 그런데 이 쇼는 미국주의에 관한 가장 긍정적인 호응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또 요구하는 쇼다. 그런 점에서 병적이다. 1편에서 그들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피상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적인 미국주의를 상징할 때 동원대는 요소들. 미녀들은 돈을 따가는 퀴즈쇼에 나와 승승장구하고, 우주복을 입고 당당하게 전진한다. 또는 그런 오프닝 시퀀스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온몸에 휘장처럼 두르고 있는 성조기와 그것으로 도배한 날씬한 스포츠카가 이들의 미국에 대한 긍정을 대변한다. 찰리가 누구인가는 상관없어 보인다. <미녀 삼총사>의 원제목 찰리의 천사들은 곧장 미국의 천사들로 대치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력과 풍모를 갖춘 백만장자라는 거대성에 의해.

말하자면 미국주의 홍보하기 쇼는 ‘강한 미국과 섹시한 미국’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악당을 만났을 때 그녀들은 세상 누구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자들이다. 그러나 연인을 상대할 때는 그 누구보다 섹시함을 발휘한다. 미녀들이 갖고 있는 그런 양면은 가히 최첨단의 군국을 자랑하는 미국주의 그 자체의 강대함과 풍족하고 자유로운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 손색이 없는 섹시한(매력만점인) 미국의 미끈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1976년 처음 시작하여 1981년까지, 그러니까 척 배리스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한숨 쉬고, 레이건이 새로운 람보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텔레비전 시리즈 찰리의 천사들은 방영됐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그 70년대를 ‘분열증의 시대’(Schizo Time)라고 말하면서 텔레비전 베스트 모멘트를 뽑았고, 찰리의 천사들은 거기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분열증의 시대를 살아남은 텔레비전 시리즈 중 하나인 찰리의 천사들은 영화로 들어와서도 그 분열증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녀 삼총사>
<미녀 삼총사>

양립된 미국의 긍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중증이라는 것은 영화가 가져오고 있는 복고적인 스타일과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쓰이는 오리엔탈리즘이 서로 뒤섞인다는 사실에서 진단해볼 수 있다. <미녀 삼총사> 1, 2편은 미국의 복고풍을 의상과 춤 등을 동원하여 맵시있게 가져온다. 그리고는 영화와는 상관없이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지나가버린 미국의 향수를 상기시키는 의상과 춤의 한편에는 ‘동방’에 대한 습관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있다. 흑인 여성이 아니라 루시 리우가 천사들 중 한명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미녀 삼총사> 1, 2편은 ‘강하고, 섹시한’ 아름다운 미국의 두 모습에 사로잡혀 분열증을 앓고 있다.

<헐크> vs 서부영화의 공간에 우두커니 서다

<헐크>
<헐크>

이안이 바라보는 미국은 미쳐버린 과거로서의 미국이다. <헐크>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가장 고대되던 말은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였고, 언제나 그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가 더 시선을 끌었다. 아마도 미국의 관객은 영화로 펼쳐지는 ‘헐크 쇼’의 재연을 다시 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리안은 가장 값비싼 작가주의를 동원하여 무척 심심하고, 괴상한 쇼를 만들었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는 이제 “나를 슬프게 하지 마라”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헐크>에는 그가 녹색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헐크의 슬픔이다. 군부대에 쫓겨 그랜드 캐년과 유타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다니던 헐크가 잠시 시선을 던져 바라보는 썩어가는 녹색 풀 한 포기. 베티를 찾아간 순간 나무 옆에 서 있는 헐크는 나무와 차이가 없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이지만, 황토색 절벽과 사막에서는 오직 그만이 녹색공처럼 얼룩져 있다. 리안은 왜 헐크가 녹색인가에 의미를 부여했다. <헐크>의 녹색을 자연친화적인, 혹은 우주적인 친화성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대구로 서 있는 아버지의 변이이며, 그가 헐크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과거로서의 무서운 아버지가 쇳덩이의 무력과 친화력을 갖는다면, 헐크는 이제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자연들과 친화력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괴물이다. 뒤틀린 과거 때문에. 때문에, 그의 아슬한 기억에 ‘핵 버섯’이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헐크>가 <와호장룡>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은 외면할 길이 없다. 대나무를 타고 설 줄 아는 우주의 음양에 대한 이해가 헐크에게로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바로 미국이다. 녹색의 헐크가 마치 미국 서부영화의 공간 같은 절벽과 사막으로 들어오자, <와호장룡>의 친밀한 경외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대신 외로운 도주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시아적 정서를 지닌 리안, 그가 미국의 분열성을 이해하는 태도에서 온다. 리안은 그 분열적 사회에, 그 내부에서 가장 분열적인 인물을, 가장 쓸쓸하게 만들면서 반면교사한다. 그래서 <미녀 삼총사>를 볼때 오리엔탈리즘이 자신들의 복고풍을 화려하게 뒷받침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분열적인 긍정은, 자신들의 서부영화 역사의 공간에 아시아적 정서의 색을 지닌 괴물이 들어서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것이다. 리안의 <헐크>를 둘러싸고 벌어진 찬반은 이런 점에서 바라보아야 좀더 이해가 가능해진다.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뿐만이 아니라 <캐치 미 이프 유 캔> <미녀 삼총사>와 <컨페션> <헐크>의 그 모든 인물들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내가 아닌 나’로의 동행, 또는 방황.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는 그 다른 나를 여러 개 바꿔가면서 사용한다. <미녀 삼총사>는 섹시함과 강함의 양날 선 모습에 푹 빠져 있다. <컨페션>의 척 배리스는 정부 요원과 대중 쇼 프로듀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프랭크 에비그네일 주니어와 척 배리스와 헐크는 영화 속에서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미국의 분열증을 말해온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여기, 이곳의 분열증이 무엇인가 고민한다. 그렇게 텔레비전은 영화로 다시 들어온 것이다.

1960~80년대 초 미국엔 무슨 일이?

75년 베트남전 끝나고 다음해 <미녀 삼총사> 방송

<캐치 미 이프 유 캔> <컨페션> <미녀 삼총사> <헐크>는 대략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이 영화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 때, 미국은 어떤 시간을 살았을까? 모두가 들어 알고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그 시간에 방점을 찍어본다.

1968년, 프랭크 에비그네일 주니어 프랑스 감옥에 수감생활 중 -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주인공 프랭크 에비그네일 주니어는 이 시기 프랑스의 감옥에 투옥 중이었다(한 가지 잡설, 실제 인물 프랭크 에비그네일을 마지막으로 잡은 건 유능한 FBI 요원이 아니라 길가에서 핫도그를 먹고 있던 두명의 경찰이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고, 이때 미국에서는 비폭력주의자이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승리로 이끈 마틴 루터 킹이 제임스얼 레이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이 암살의 배후는 CIA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해 닉슨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76년, <미녀 삼총사> 시리즈 시작(1977년에는 빌 빅스비/루 페리뇨 주인공의 <헐크> 시리즈 시작) -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가 처음으로 정규군을 파견한 이후 1965년 북폭을 개시했고, 1968년부터는 ‘파리회담’을 통한 평화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전쟁은 캄보디아, 라오스로 확산되었고, 1975년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군에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종식되었다.

1981년, <컨페션>의 척 배리스가 허름한 모텔에서 인생을 되돌아보다 - 1980년 영화배우 출신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이듬해 취임했으며, 같은 해 암살위협을 받았지만 목숨을 유지했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