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고괴담 동창회에서 생긴 일 [3]
2003-08-08
글 : 박혜명

2기생들의 대빵 두 머리 귀신은 당시 두 머리가 번갈아가며 정신을 잃곤 했다. 다섯명의 말만한 여고생들을 휘어잡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과로로 쓰러져 다음날 눈도 못 뜨는 일을 사이좋게 반복했던 두 머리 귀신.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첫쨋날, 김 감독님이 쓰러지셨다… 둘쨋날, 민 감독님이 쓰러지셨다….”

3기생인 지효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2기 때의 두 머리 귀신이 합쳐져서 우리 감독님 귀신이 된 거 같아요.” 한쪽 귀신은 연기지도 및 상황설명, 의견묻기 등의 행동 패턴을 보였고, 다른 한쪽 귀신은 “그걸 내가 아니∼ 니가 알잖아∼”라는 말만 하고 다녔다는 두 머리 귀신의 특징을 지효 학생이 듣고, 이 상반된 현상이 3기 감독 귀신에게서는 모두 나타났다며 추론해낸 것이었다.

지효 | 저도 혼자 생각하고 정리 다 해서 감독님 귀신이랑 얘기하고 나면 더 불어나기만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피해다니고 그랬어요. (웃음) 촬영이 점점 시나리오랑 달라지더니, 나중에는 콘티도 안 나왔어요. 귀신이랑 저희들이랑 모여서 다같이 콘티를 짜기도 했구요.

한별 | 상황만 듣고 간 적도 있어요. 한번은 감독님이, “한별아, 오늘은 소희가 이런 상황이거든. 네가 만약 소희라면 어땠을 거 같아?” 그러셨어요. 그래서 하루종일 생각해가지고 가서 얘기했더니, “그래, 그거야!” 하시더라구요.

지효 | 저흰 리허설만 평균 20번씩 해서, 진짜 슛 들어갈 땐 진이 다 빠졌었어요.

지연 | 감독님 귀신이 똑같은 장면을 계속 찍으세요. 결국엔 처음 걸로 갈 거면서…. (웃음)

지효 | 우리 귀신은 고집이 정말 세고 자기 주장도 강하세요. “미안해, 소희야…”라는 대사가 있는데 자꾸만 “소희야”를 빼야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전 대사치기 어렵다, 그리고 소희 이름을 불러야 관객을 울릴 수 있다, 그랬거든요. 그래도 빼야 한다고 하셔서 결국은 제가 귀신 앞에 무릎을 꿇었죠.

리얼괴담 #3 초짜의 악몽이거나 분장의 악몽이거나

효진 | 조소실에서 찰흙 뒤집어쓴 장면, 대단하더라. 고생 많이 했지?

지효 | 그거요, 지연 언니 몸 본떠 실리콘 재질로 만든 시체에다 찰흙 붙인 건데요, 안 마른 상태에서 찰흙을 붙였더니 다음날 촬영 들어갔을 때 냄새가 정말 심했어요. 걸레 냄새 같은 게 안에 꽉 차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어요.

지연 | 그때는 본뜨느라 고생하고, 진성이가 계단 올라가는 신에서는 얼굴을 돌처럼 분장하고 계단에 붙어 있었어요.

한별 | 소희가 떨어지는 장면 있잖아요, 팔다리 이렇게 꺾이고 눈 이렇게 부릅뜨고 있는 거요. (재연 중- 섬뜩함) 저는 그거 본뜬다고 두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어요.

지효 | 저말고 세명은 다 한번씩 그런 본떠봤거든요. 나중엔 저도 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애들 얘기 듣고 나니까 겁나는 거예요. 안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결국 안 했어요. (웃음)

효진 | 우린 예진이만 딱 한번 얼굴에 피범벅하고 사물함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많이 놀렸어. (웃음)

지연 | 저도 머리가 피범벅인 채로 촬영했는데, 끝나고 씻으려니까 물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만 대충 씻고 그대로 집에 갔더니 수위아저씨가 졸고 계시다가 절 보고서 얼마나 놀라던지….

한별 | 그 미술실 장면 찍은 데가 폐교라서 물이 잘 안 나와요. 화장실에도 아예 안 나왔어요.

영진 | 우린 연기가 뭔지 영화를 어떻게 찍는지 정말 하나도 몰랐어. 운동장 뛰는 신 찍을 때도, 카메라가 이쪽을 보고 있으면 이 앵글 안에만 내가 잡히는 건데, 왠지 뒤쪽까지 다 찍힐 거 같은 거야. 그래서 반 바퀴만 뛰어도 될 걸 한 바퀴 다 뛰었다니까. 그렇게 몇십 바퀴 뛰었다.

효진 | 어떻게 해야 예쁘게 나오는지도 몰랐고. 화장도 해봤자 날이 더워서 어차피 다 지워지니까 나중엔 신경도 안 썼어.

영진 | 나중에 우리 영화 보는데, 나 왜 이렇게 어색한 거야?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겠더라.

효진 | 지금도 쑥스러워서 못 보잖아.

지효 | 우리 영화 볼 때 저는 꼭 남의 거 보는 기분이었어요. 떨리고 창피하기보다는 낯설었어요.

한별 | 그래요? 전,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이고 저만 보이더라구요. (웃음)

더 많은 괴담들이 나오기 전에 자리는 서서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듣고보니 오늘 모인 학생들끼리 공유한 짧은 리얼 괴담들은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것이, 다음 동문회 때까지 ‘동문 괴담’으로 남으면 딱 좋을 듯 보였다.

Table 03. 여우야, 여우야 늑대들의 소원을 들어줘

<여우계단> 시나리오 작가 4인방의 즐거운 상상, <남고괴담 첫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1. 원예과, 종자 개량실 / 밤

새로 배양한 종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인봉. 배양액에 담긴 종자가 움찔하고 움직이더니 갑자기 툭 소리를 내며 둘로 갈라진다. 미세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종자.

인봉 홀딱 벗고 여우계단을 뛰어가면 소원이 이뤄진다더니…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어…! 이 울트라초강력 장미나무가 성공하면, 대학가는 건 따 논 당상이지. 수철이 놈한테 매번 뒤지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나… 일등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놈들은 언제나 착한 것도 도맡아 한단 말이야. 낸들 되고 싶어서 이등이 되고, 악역을 맡은 게 아니란 말이지. 다 설정이야, 설정!

인봉이 혼자 중얼거리던 사이 종자는 어느덧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기 시작한다. 힘찬 뿌리가 배양통을 뚫고 시멘트 바닥으로 뿌리를 박는다. 슉슉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가지를 뻗는 장미나무. 줄기마다 작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빼곡하게 솟아오른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뻗어가는 가지. 이어서 핏빛 같은 붉은 꽃봉오리를 머금는다. 흐뭇한 얼굴로 뻗어가는 가지를 바라보는 인봉.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인봉.

2. 축산과, 실습 축사 / 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영배. 자기가 낳은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큰 눈을 끔뻑이며 축사벽에 머리를 찧고 있는 암소. 바닥에는 도저히 송아지라고 볼 수 없는 괴상한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준 | (눈치를 보며) 그러게 내가 팬티도 벗고 뛰라고 했잖아….

영배 | (고통으로 벌게진 눈으로) 너 같으면 여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홀딱 벗 고 계단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어? 썩는 냄새 나니까 내 앞에서 입벌리 지 마!

정준 | 나, 나, 나는… 미안해… 나 소원 빌어봤어. (자기 바지 사이즈를 보여 주며) 니가 몰라서 그렇지. 나 살빼달라고 빌고 난 다음에 엄청 많이 빠졌어.

영배 | 개새끼, 구라치고 있네. 너 화장실에서 쫙쫙 피똥 뽑아내는 거 모를 줄 아냐? 새끼 나 골탕먹이려고 작정했지? (정준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른 다) 아님 또 저걸로 바비큐라도 해먹을 거야?

정준 | (목이 졸려 컥컥대며) 이, 이거 놔…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득달같이 달려드는 영배를 뿌리치려고 애쓰는 정준. 더듬더듬 손으로 뭔가를 찾는다.

3. 영화예고, 여우계단

여우계단 앞에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하는 수철. 진지한 자세로 단추를 하나씩 끄른다. 달빛 아래 준비운동을 하는 수철.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합! 숨을 멈추고 계단을 우다다다 뛰어올라간다. 단숨에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온 수철

수철 | 하아악… 휴…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 나는 계속 내 자리를 지키고 싶다. 지금 내 자리… 음하하하!

4. 기숙사, 어느 방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서 벌거벗은 수철의 외침을 듣고 있는 소희, 진성, 윤지, 혜주.

소희 | 어때?

진성 | 몸매 90점, 얼굴 85점, 목소리 10점… 음… 거시기 40점.

혜주 | 저 정도면 괜찮은데 뭐…. 저렇게 소원이라는데 들어줘.

윤지 | (시건방떤다) 유치해!

말을 마치고는 스르르 사라지는 네 사람.

5. 다음날 영화농업과학고 종자 개량실.

인봉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꾸엑꾸엑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인봉의 머리를 천천히 먹고 있는 변종장미꽃.

6. 축사실습실

영배가 갈고리에 난자당한 채 축사에 피범벅이 되어 뒹굴고 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정준, 그 옆에 앉아 기형송아지를 꼬챙이에 꿰어 바비큐를 만들고 있다.

7. 영화예고, 여우계단

여우게단 위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음하하 웃던 자세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수철의 모습.

이 글은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여우계단>의 시나리오 작가 이용연·김수아·이신애·이소영 씨가 공동 패러디한 것입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