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돈이 둥둥 떠 있지요?”
이재용 감독, 정구호 미술감독, 임재영 기사님…. <정사>를 같이 할 때도 익히 겪었던 그들의 안목과 디테일을 누가 따라가랴. 게다가 김병일 촬영기사님도 ‘원칙’을 중요시하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의상과 소품, 세트. 조명… . 무엇 하나 쉽게 되는 법이 없었다. 주·조연배우들의 의상을 일일이 손염색해서 평생 한복만 만들어오신 분이 손바느질로 하나씩 만들었다. 꽂이와 노리개 등 장신구도 박물관에서 거의 훔쳐오다시피 빌려오니 흠집 하나라도 나면 안 되고, 화각장, 자개장, 자수장을 비롯한 소품가구들은 ‘장인’들이 몇달에 걸쳐 만든 고가의 작품들이었다. 협찬은커녕 분위기는 거의 “너희들이 나의 장인정신과 예술세계를 알기나 해?”였다고나 할까….
1세트 500여평에 꽉 차도록 조씨 부인의 안채 ‘부용정’을 지었다. 연꽃이 떠 있는 연못에 누다리와 마당까지 있는 양반집을 짓고 나니 그럴듯했지만 그 넓은 규모의 세트를 조명하려니 어마어마한 장비가 필요했다. 루나 벌룬에 20여개의 젬볼이 천장에 주렁주렁 달리고 20m 높이의 아시바 위를 징검다리 뛰듯 뛰어다니는 조명부들을 보면 행여 사고라도 날까봐 조마조마했다. 가끔 세트장을 찾은 손님들이 천장에 매달린 조명기들을 올려다보며 감탄이라도 할 때면 나는 망연자실 이렇게 맞장구치곤 했다. “천장에 돈이 둥둥 떠 있지요?”
게다가 그 공들여 만든 세트와 소품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느라 김병일 촬영기사님과 임재영 조명기사님의 작업도 덩달아 느려졌다. 촬영장에서 밤새는 날은 점점 많아지고 현장에 도착하고 나면 감독님의 컷 수도 콘티보다 늘어만 갔다. 정해진 예산과 일정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나던 나는 주요인물들을 쪼기로(?) 하지만 다들 농담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감독님, 여기서는 컷 수를 조금 줄이는 건 어때요?” “그럼 영화가 지루해질걸?” “뭐? 비녀 하나에 얼마?(음… 역시 예쁘긴 하군 하지만 미술비가 위험해…) 좀 싼 걸로 하죠, 미술감독님.” “그럼 가짜처럼 보일 텐데?” 아… 웬수들이 따로 없다.
“남자들만 남고 여자들 다 나가시오!!!”
세트 안에서 크고 작은 노출(?)이 있는 신들을 6∼7회차에 걸쳐 찍었다. 베드는 없으니 요씬이라고 통상 우리가 지칭한 신들을 찍는 날이면 다른 촬영보다 몇배는 더 힘들었다. 배우들이 긴장하면 스탭들은 더 긴장하고, 나는 그날의 당첨(?) 여배우의 자신감(?)을 북돋워주며 토닥이느라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촬영장을 중심으로 검은 천을 두르기 시작하면 대다수의 스탭들은 ‘소외되는 날’임을 안다. 감독과 촬영감독, 소수의 여자 스탭들만 현장의 출입이 허용되었으니까.다행히 여자 스탭들이 꽤 돼 진행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준이 옷을 벗으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소리친다. “에이, 뭐야, 남자들만 남고 여자들 다 나가!!!” 긴장감이 감돌던 촬영장 안이 갑자기 웃음바다가 된다.
“뭐? 코가 무너졌다고?”
노심초사하던 부용정 세트 3주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는 날, 꼬박 밤을 새면서 마치고 나오니 아침 9시. 한숨도 못 잔 터라 비몽사몽간이었지만, 얼른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 핸들을 잡았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데 졸음이 사악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미숙 언니였다. “세트 다 끝났니?” “네… 밤새고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근데 우리 영화 개봉일이 언제지? 내 촬영분량 아직도 좀 남았지?” 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요?” “유진아, 어떡하니… 코수술한 게 내려앉았다 얘.” “….”(잠시 할말을 잊은 나) “어젯밤에 콧망울이 내려앉았지 뭐니. 이를 어째.” 갑자기 어지럼증이 났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하게 더듬으며) 저, 정말이요? 어, 어쩌다가… 그런 일이… 근데 언니가 수술한 코였나?…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사고난 거예요?” 횡설수설하며 정신이 없다. “당분간 촬영 못할 듯하니 감독하고 상의해봐.” “얼마나 걸리는데요?” “꽤 걸리지. 얘, 하도 오래전에 한 터라 일단 의사부터 찾아야지….” “당장 낼 모레 촬영 있잖아요.” “감독하고 의논해서 코를 빼고 카메라에 잡든지….” “아우, 언니, 코를 빼고 어떻게 얼굴을 잡아요!!!!”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나고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숨이 가빠오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들려오는 깔깔깔 웃음소리. “아유, 얘, 너 계속하단 울겠다 울겠어, 오늘 만우절이야.” “….”(또다시 할말을 잊은 나) 밤을 꼴딱 새고 날짜가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 채 세트장에서 막 나온 피디를 골탕먹이고 이렇게 즐거워하는 배우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참, 이미숙씨는 성형수술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넘어가야겠다.^^
“이것도 안 되오, 저것도 아니되오!”
이 땅에서 사극을 만든다는 것은 관리아저씨들과의 투쟁이다.
세트를 짓지 않는 다음에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한옥이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남산 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양동마을… 그리고 용인 민속촌…. 게다가 이재용 감독님은 낡은 느낌의 한옥보다 새것처럼 보이는 한옥을 원했기 때문에 섭외할 수 있는 한옥의 범위는 더욱 줄어들었다. 카메라를 조금만 들어도 전봇대가 걸리고 현대식 건물이 보이는 것도 문제였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촬영지를 관리하시는 분들과의 마찰이었다. 촬영허가를 어렵게 받아내고 사용료까지 꼬박꼬박… 게다가 아저씨들의 수고비까지 얹어주면 무엇하랴. 첫째, 휴관일은 안 된다. 둘째, 주말엔 관람객이 많아서 안 된다. 셋째, 카메라 및 기자재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넷째, 밤 12시가 넘어서 촬영하면 안 된다. 아, 정말 그들은 안 되는 너무 많았다. 민속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우선, 주차장부터 촬영지까지 10분 넘게 걸어야 하는 거리를 차도 못 들어가게 한다. 밤에는 심지어 한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해서 귀신나올까 무서울 정도다. 화장실을 찾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다. 손전등을 비춰가며 어렵게 찾은 화장실, 하필이면 서낭당 도깨비집 옆에 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스탭들 사이엔 한옥마을 섭외하다가 섭외베테랑인 조능연 제작실장이 거의 폐인되어 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면 다시는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감독은 역시 독한 인종이라고, 사람 좋은 이재용 감독도 제작부에게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뒷정리 잘하고 나가자, 또 올지 모르니까.”
“아니, 아니, 그렇게 멋있게 말고”
조원이란 인물은 무에도 능한 사람이어서, 소소한 액션신들이 있었다. 배용준은 워낙 운동으로 단련된 유연한 몸에 액션연기도 한 적이 있어서 걱정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잘해서 문제랄까. 감독님은 아주 화려한 액션을 바라지 않으셨다. 무술감독과 배우는 이왕이면 화끈하고 역동적인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합을 짰지만 언제나 감독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너무 화려해.” 한번은 발차기로 상대방을 치는 컷을 찍었는데 배용준의 날렵한 발차기는 보는 사람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와… 우리는 입이 벌어졌고, 용준도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순간 이어 나오는 감독님의 말. “아니, 아니, 그렇게 멋있게 말고 그냥 앞발로 슬쩍 밀라니까.”
“하루 방문객 만명?”
전라도 담양 소쇄원에서 조원이 술값으로 기녀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신을 찍을 때였다. 우선, 소쇄원은 당대의 문인들이 학문과 사상을 교류하던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정원,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어렵게 촬영허가를 받은 것에 감사하며 우리는 아침일찍부터 촬영을 서둘렀다. 기녀 역할의 배우에게 속살이 드러나는 속곳을 입히고, 주안상을 차렸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용준은 카메라를 들고 담양의 대나무숲이며 스탭들의 모습을 찍고 전라도의 아름다운 풍광은 스탭들의 기분까지 달뜨게 해주는 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막 촬영에이 들어가려고 하는데 줄이어 들어서는 소쇄원 방문객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수십명이 넘는 단체관람객들이 끝없이 걸어들어왔다. 심지어 하루에 만명이 넘게 다녀간다는 주변 음식점 주인들의 설명을 듣고는 허걱,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저 요염한 포즈의 속옷차림의 여인네를 관람객을 향해 하루종일 서 있게 해야 한다니!!! 공무원연수단, 학생단체학습단 등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들어왔다. 부랴부랴 여인네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이 무에서 저 나무로 검은 천을 둘러대고, 큰길 초입에서부터 제작부가 단체관람단의 발목을 잡았지만 역부족. 제작부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빨리 걸어가다가도 여인네 근처를 지날 땐 발걸음들이 느려지고 있었다. 심지어 몸싸움이 오고 갈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음은 급한데 맑았던 하늘마저 구름이 오락가락, 슛 들어가려고 하면 구름 나오고, 정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용준이 찍은 하늘만 목이 부러져라 쳐다보는 스탭들의 사진은 모두 그날 나온 것이었다.
“진흙바닥에 뒹구느라 참으로 욕보셨소”
조원의 엔딩신은 재촬영을 했다. 겨울분량부터 찍는 바람에 초반에 준비없이 찍었던데다가 찍다가 해가 지는 바람에 장면들의 톤이 맞지 않았다. 한겨울 차가운 진흙바닥에 처박히는 연기를 몇 시간이나 한 용준에게 재촬영을 하자고 하기가 미안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본인도 더 좋은 그림을 위해 흔쾌히 동의하면서 우리는 장소를 다시 섭외해 재촬영이자 마지막 촬영을 했다. 안개가 한치 앞을 안 보일 정도로 자욱하게 끼어 있던 태안반도의 바닷가는 엔딩신을 찍기에는 적역이었다.
다시 한번 용준이 차가운 바닥에 처박히기를 수십여 차례. 저러다 뺨에 멍이라도 드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배우의 눈(eye)도 깜빡여서는 안 되고, 동시에 눈(snow)도 적절히 날려야 하고, 쉽게 찍힐 리가 만무했다. 배우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고 스탭들도 지쳐갈 무렵 드디어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은 떨어졌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그리고 <스캔들…>의 기나긴 촬영여정이 끝났다는 생각에…. 나도 괜스레 허탈해졌다. 도저히 끝이 안 보일 듯하더니 이제야 끝났구나…. 4개월 프로덕션 예정으로 출발했으나 날씨와 섭외 일정 등으로 조금 늦어지면서 70회차의 촬영은 4개월 2주 만에 드디어, 무사히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