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은 돈 그리고 관리아저씨들과의 투쟁이라오
1998년 겨울 “지금, 사극이라고 하셨소이까?”
추석시즌에 <정사> 개봉을 하고 딩가딩가 놀고 있을 때였다. 이재용 감독님과 다음 영화 아이템을 이야기하다가 감독님이 ‘사극’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허걱, 웬 사극? 그러나 우리만의 독특하고 스타일리시한 사극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감독님의 설명에 재미있는 도전일 것 같은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제작환경에서 제작비가 많이 드는 시대극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가 어려웠다. 이재용 감독님은 <순애보>를 준비하고, 가끔씩 만나 “우리 그 사극은 언제 하는 거야?” 농담 삼아 이야기하면서 내러티브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 18세기 프랑스 쇼데를로스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를 각색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 지구반대편 조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안 일어났으리란 법은 없지 않을까? 2001년 여름, 아이디어가 나온 지 3년 만에서야 드디어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2001년 여름 “역사야, 질펀하게 놀아보자”
우선 <위험한 관계> 속의 인물들, 배경, 설정 등이 과연 조선시대에 유효할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영상원 심광현 교수님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매주 역사공부를 6개월여 계속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건너갔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마치 팔을 넣고 난 뒤 꿰맨 듯이 꼭 끼는 짧은 저고리는 지금의 쫄티나 배꼽티의 유행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양동마을, 안동의 옥연정사 등 한옥마을을 두루두루 견학해보니 똑같이 지은 한옥은 단 한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독락당’ 같은 집은 그 독특한 구조가 놀라울 정도였다.
2002년 봄 “스캔들 한번 내보겠소?”
역시 제목을 짓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후보 가운데 ‘조씨음행기’가 가장 유력한 제목으로 떠올랐지만 나는 기존의 사극과 같은 이미지를 주는 제목을 짓고 싶지 않았다. 문득 머릿속에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조선시대의 이런 사랑 이야기라면 희대의 스캔들이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 게다가 영어제목을 사극에 붙인다면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의 남녀상열지사’라는 부제까지 만들어 붙이고나니 왠지 그럴듯했다. 낯설어하며 반대하는 주변사람들에게 제목이 얹힌 시안포스터까지 급조해서는 설득당할 것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제목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2002년 겨울 “배용준이 사극을 한다니…”
캐스팅의 최대 이슈는 역시 배용준이었다. 미숙 언니야 <정사> 이후 두 번째 작품에 대한 몇번의 교감이 있었고 팔색조 배우 전도연이 사극을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TV만 해오던 젠틀맨 나이스가이의 영화 첫 데뷔가 사극이라니…. 심지어 신문에 난 캐스팅 기사가 오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종 결정을 앞두고 우리는 테스트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안경 대신 수염을 붙이고, 갈색웨이브머리를 감춘 채 상투를 틀어보았다. 서로 반신반의하던 우리는 분장을 마친 용준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주변의 우려를 무릅쓰고 첫 데뷔작으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그가 합류하면서 드디어 첫 촬영의 닻을 올렸다.
“이 톱이 네 톱이더냐?”
시나리오상의 계절은 늦여름에서 초겨울인데 2월에 크랭크인을 했으니 겨울 부분을 미리 찍어야 했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 도연에게 물었다. “얼음물에 빠지는 장면을 넣을까 하는데, 이 한겨울에 할 수 있을까?” “언니, 나 풍금할 때도 강물에 뛰어들었잖아. 문제없어.”" “음… 역시….” 새삼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나리오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막상 촬영장소인 홍천저수지에 도착했을 때는 도연이가 뛰어 든다고 해도 두팔 걷어붙이고 말려야 할 판이었다. 끝이 안 보이게 펼쳐져 있는 저수지. 두께가 30cm는 족히 돼보이는 얼음을 1시간이나 걸려 전기톱으로 잘라 구멍을 뚫으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물이 넘실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순간부터 도연이도 나와 눈 마주치기를 피했다. 도연이 매니저 박성혜 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 “도연이가 혹시라도!!! 직접 하겠다고 해도 언니가 꼭 말려줘!!!” 예비로 대기시켰던 스턴트맨조차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얼음보다 차가운 물에 갑자기 풍덩 뛰어들면 심장마비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고 들어가야 했고 뛰어내리는 순간 한복 치마가 휘감겨 올라가 얼굴을 가리면 숨이 막힐 수도 있으니 물속에 스킨 스쿠버요원도 대기시켜야 했다. 인근병원에 연락해 앰뷸런스까지 대기시켰다.
분명 꽁꽁 얼어 있는 듯한데도 스탭들이 무거운 장비를 옮길 때면 여기저기서 쩍∼ 쩍∼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소리지른다. “한 군데 모여들 있지마!!!” 이 위험한 곳에서 지미짚까지 동원해서 찍어야 한다니… . 한숨 쉬고 있는 내 귓가에 저수지 한가운데서 열심히 얼음을 자르고 있던 특수효과팀의 드드드 소리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더니 순간 풍덩 소리가 들린다. 아, 엎드려서 얼음구멍을 뚫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했었는데…. 너무 놀라 질끈 눈을 감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에 들려오는 제작부의 보고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짓는다. “저… 어떡하죠? 전기톱을 강물에 빠트렸는데요.”
“감독님 한번만 써보라 그래”
시대물을 찍는다는 것은, 그것도 공들여 찍는다는 것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제작비와 시간문제는 촬영 내내 나를 괴롭혔다. 사극이다보니 배우 한명당 분장부터 의상을 갖추어 입는 데까지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렸다. 그나마 쪽머리에 의상만 갖춰입으면 됐던 숙부인 도연은 양호한 편이었다. 조씨 부인 미숙 언니는 가체를 올렸는데 좀더 고급스런 질감을 위해 진짜 머리를 사용했다. 보기엔 참으로 좋았으나 반대로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니…. 가체를 올리고 나서 30분만 지나도 언니는 정수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우리는 위로를 하다가도 나중에는 짐짓 못 들은 척 외면했다. 급기야는 언니가 가체를 벗어들고 울부(?)짖었다. “감독님이랑 이 피디랑 제발 한번만 써봐, 얼마나 무거운지!!!”
용준은 상투를 틀고 하루종일 촬영을 하고나면 이마에 굵은 줄이 나 있었다. 거울 속의 조원, 주름을 쓰윽 만지며 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협박(?)한다. “이러다 주름 생기면 영화사에 손해배상 청구해도 되는 거지?” 게다가 매번 분장할 때마다 조원의 수염을 하나씩하나씩 손으로 붙였으니 완성하는 데만 1시간이 족히 걸렸다. 그뿐이랴. 밥먹고 나면 떨어지고, 자고 나면 떨어지고…. 슛 들어가려고 하면 가체 다시 올리고, 수염 다시 붙이고…. 배우들과 스탭들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가 좀처럼 촬영에 속도가 붙지 않으니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