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느니 담배요! 빠지느니 살이구나”
하지만, 역시 세상에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 ‘하였더이다’, ‘아니겠소’ 등 대사들은 거의 외국어처럼 느껴질 정도이고 그 분량도 만만치 않다. 거기다가 이 조원이란 캐릭터의 느물거림은 상상초월. 달콤한 대사야 수도 없이 해봤고 눈물도 많이 흘려보았지만 입으로는 순정을 고백하며 돌아서서 야비한 미소를 날리는 이자의 경지는 쉽지가 않다. 말수 적은 이재용 감독님도 속으로는 걱정이 많은 눈치다. 아아∼ 끊었던 담배에 자동으로 손이 간다. 따로 다이어트를 안 해도 살이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살빼지 않아도 될 것을 그랬다. 양수리 종합촬영소 세트장에서 부용정 장면을 한참 찍던 두달 중 언제 찍힌 사진인지는 모르지만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부담감과 중압감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려보내고 싶었을까….
“요씬에서 감독님은 참으로 야릇하더이다”
요씬… 사극의 베드신을 부르기에는 참 재치있는 작명이다. 조원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는 기생, 사촌누이인 조씨 부인의 남편이 들일 소실이자 옛 여자의 딸(쓰다보니 참 콩가루 집안이란 생각이…)인 소옥 등으로 그 수가 한두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요씬 촬영도 수차례…. 조원, 정말 여자도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연기도 연기지만 큰 화면에 비쳤을 때 어떨지, 거기다 여배우가 긴장하면 그걸 커버해야 하는 것도 남자인 내 몫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 또한 난생처음 찍어보는 장면들이 아니냔 말이다. 베드신이 처음이라 어색해할까봐 감독님이 일일이 몸으로 실연해 보여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묘한 신음 소리에 야릇한 동작까지. 엄숙하게 실연해 주시는 감독님은 거의 구세주처럼 보인다. 긴장감이 감도는 촬영장… 감독님과 피디 누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니터를 보며 누구에게 들릴세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괜스레 큰소리로 외친다. “아∼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제발 나도 들리게 큰소리로 이야기해줘!!!” 일순간 촬영장이 웃음바다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죄어오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나보다. 촬영장 한 귀퉁이, 고개를 모로 꼬고 인상을 쓰고 있는 요씬 막간의 모습을 보니….
“이미숙 누님, 형이라 불러도 되겠소?”
미숙이 누나랑 촬영이 있는 날이면 유독 마음이 편안하다. 훈련 조교를 자처해준 누나의 한마디한마디가 고맙기만 했던 건 누나의 깊고 넓은 인간성 때문이다. 현장에서 ‘제작부장’이라 불릴 만큼 누나의 시야는 누구보다도 넓다. 풍부한 경험을 아랫사람이나 동료에 대한 배려와 아량으로 풀어낼 줄 아는 누나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선배’란 어떤 존재인지 그 정의를 몸으로 보여준다. 가끔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정도니까…. 촬영 막바지에나 겨우 카메라를 들 수 있는 심리적인 여유가 생겨서 꽃피는 삼월에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영화 초반의 타이틀 시퀀스에서 나와 누나가 처음으로 묘한 시선을 교환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내 장면이 없는 막간에 찍었다. 흰색 대례복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피디 누나와 다음 컷을 의논하는 모습이다. 스틸이든, 동영상이든,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미숙 누나의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느껴진다.
“감독님의 연기재능이 아깝구려”
이재용 감독님이 꼼꼼하다는 건 소문으로 들었으나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유머러스한 것도 생각 이상이다. 얼마나 촌철살인으로 재치있는 말 한마디를 날리는지, 돌아서서 한두발짝 걸어가다보면 웃음이 나와 다시 한번 감독님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직접 연기를 해보일 때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촬영장의 재미였다. 날카롭고 요염한 조씨 부인의 표정, 능청스런 조원의 연기를 할 때는 물론이고, 숙부인의 조신한 걸음걸이를 해보이는 감독님의 모습은 왜 배우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나란히 서서 감독님의 손동작을 따라 하고 있는 내 모습. 같이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이렇게 해볼까, 혹은 저렇게 해볼까를 열심히 이야기하다보니 점점 우리 두 사람의 자세와 표정이 비슷해지는가 보다. 모니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감독님과 내 포즈가 키차이만 있을 뿐 거의 똑같은걸? 또 하나 감독님의 특징, 절대로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내가 찍은 사진 속의 감독님도 배경에 파묻혀 실루엣만 떠올라 있다. 마치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당신의 모습처럼.
“빨리, 어서 키스를 끝내시오!”
정절녀 숙부인 역을 맡은 전도연씨를 대상으로 계속 유혹 작전을 벌이던 도중, 결정타에 해당할 입맞춤 장면을 찍는 현장이다. 긴장감은 요씬 못지않다. 짧은 입맞춤이지만 숙부인에게는 최초로 사랑의 감정을 몸으로 접하는 의미고, 나에게도 여느 여인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 바람둥이의 웃음보다 더 어려운 게 이런 미묘한 감정의 표현이니 NG도 무척 많이 났다. 게다가 수염을 잔뜩 붙이고 하자니 NG가 날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수염을 다시 붙여야 했다. 날씨도 오락가락, 빗줄기가 흩뿌렸다가 갰다가를 반복하니 스탭들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표정의 두 배우를 둘러싸고 있는 그보다 더 심각한 촬영팀의 모습, 아마도 속으로는 ‘빨리, 어서 키스를 끝내시오!!! 비가 더 내리기 전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참으로 수고들 하시었소”
스탭들의 고생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듯하다. 준비기간도 길었지만 겨울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에 유독 스탭들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쳐야만 하는 사극이다보니 현장에서 일하는 스탭들의 모습은 저절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카메라에 걸리는 한옥의 구석구석에 콩기름을 먹이고 물을 뿌려 색깔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여념이 없는 미술팀. 어찌나 열심히들 하는지 가끔 촬영감독님은 앵글을 들여다보시며 이렇게 소리치시고는 했다. “아냐!! 거기는 안 나온단 말이야! 그만해도 돼!!!” 운림산방 뱃놀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실을 보트를 잡느라 하루종일 연못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했던 그립 팀. 때아닌 갈대를 하나하나 심고 있는 조감독. 아무런 예고없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얄미운 해님을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는 조명팀. 하지만 본인들은 모를 것이다. 매 순간,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말이다. 찰칵찰칵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들과의 추억을 내 마음속에 담았다. 길게만 느껴졌던 촬영의 시간들… 하지만 돌이켜보니 짧았던 찰나의 순간처럼 짜릿하게 느껴진다. 이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만든 사람들의 손을 떠났고 마지막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지겠지만 나에게는 한장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기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