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지자. 이나영의 연기는 전형적이지 않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안정적이지도 않다.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 어떤 배우와 호흡하느냐, 어떤 상황에서 찍느냐에 따라 불안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진행형의 불완정성이 그의 힘이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일반 영화관과 시네마테크에 숨어들고, 하루가 멀다하고 비디오가게를 찾는 학생 같은 노력을 쏟는 것이 그의 현재다. “교과서적으로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해서 그저 영화를 많이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영화를 많이 봐도 영화 전체에 대해 분석하는 게 아니라 느낌들만 기억이 나요. <무쎄뜨>에서 소녀가 카페에서 노파에게 갑작스럽게 욕을 퍼부을때의 이상한 기운, 언덕을 구르던 처연한 느낌 같은 거요. 배우들의 걸음걸이, 옷의 감촉 같은 거요.”
“대중이 보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보는 나, 그리고 내가 보는 나가 많이 달라요. 그리고 그중에 뭐가 진짜 나인지 잘 모르겠어요” 세상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그는 그런 오해와 오해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다. 만약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오랜만에 언론에 얼굴을 비추는 이나영의 얼굴이 밝아 보인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영어완정정복> 촬영장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조심성도 많고 의심도 많은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일단 출연을 결심한 이후부터는 단순해지고 싶었어요. 코믹이라는 장르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김성수 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한번 풀어져보자고 생각한 것 같아요. 촬영끝나고 나니까 최근엔 내가 말이 많아졌구나, 많이 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결국 <영어완정정복>은 배우 스스로에게나 대중에게 ‘이나영의 발견’이라고 말할 만한 영화다. “화면을 보면 가끔 나한테 저런 표정이, 저런 모습이 있었던가 놀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건 결국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현장 스탭의, ‘우리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사 외우는게 고작이었는걸요 뭐….”
“난 찰흙 같아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던 이나영이 말한다. 읽은 책, 본 영화,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자신이 마치 조물락거리면 다른 형태가 되는 찰흙 같다며, 문득 깨달은 듯이 읊조린다. “인생이 사춘기야, 늘 ‘질풍노도’고. 늘 ‘주변인’이에요. 헷갈리는 게 많고 좋아하는 취향도, 스타일도, 가치관도 늘 바뀌는 것 같아요. 마스터플랜을 세워서 이번에 이런 것 했으니까 이미지를 생각해서 다음엔 저런 거 해야지, 그런 게 잘 안 돼요. 그 순간 꽂혀야 뭐든지 하거든요. <후아유>의 인주도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도 <영어완정정복> 영주도 그 캐릭터에 꽂혀서 결정했어요. 그래야만 불만이 있더라도 바꿔갈 수 있고 설득당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여자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콧대 높게 배우라는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고,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는 허영도 없으며, 촬영현장에서도 스탭들 계란프라이를 부쳐주는 “하녀 같은” 배우지만, 사실 이나영은 무섭다. “폭발력보다는 지구력이 나의 힘”이라는 이 끈질긴 여자는 뭉쳐질지언정 깨지지 않고, 변형될지언정 속성을 잃지 않는 무서운 찰흙인형이다. 그리고 이나영은 그런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