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매트릭스3 레볼루션> 세계 첫 시사회에 다녀오다 [1]
2003-10-31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매트릭스>의 마지막 장이 열리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이 11월5일 밤 11시 세계 동시 개봉이라는 초유의 일정을 잡았다. 이걸 오만한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기말의 1999년, <매트릭스>가 개봉되자 세상은 이 영화가 일으킨 ‘소란’을 ‘문화 현상’이라고 일컬었다. 철학자, 종교학자, 과학자들이 <매트릭스> 따라잡기에 뛰어들었다. 그 최종 마무리를 어느 한곳에 먼저 풀어놓지 않겠다는 건 흥미로운 배려다. 오만한 건 2편의 마케팅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니. 이야기의 진폭을 넓혀가다 툭 멈춘 듯한 영화에 일부에선 혹평을 쏟아냈다. 최종편을 앞두고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안에 마련된 세계 첫 시사회도 어둠이 내려앉은 뒤 조용하게 열렸다. 다음날의 인터뷰 역시 조그마한 소란도 없이 나직이 진행됐다. 그러나 영화는 조용하거나 움츠러든 기색이 전혀 없다. <스타워즈>의 무게에 비견될 법한 SF 3부작답게 육중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 소식을 미리 전한다.

검은 재킷의 보안요원들에게 두 차례 가방 검사를 받고, 11월3일까지 리뷰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서야 입장이 허락된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의 스티븐 J. 로스 극장. 10월18일 오후 7시30분(현지시각) 예정이던 <매트릭스3 레볼루션> 시사회는 세계 각지에서 초청된 기자들이 고요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20분가량 늦게 시작됐다. <매트릭스>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화려한 첫 액션 시퀀스와 달리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사막의 현실’에서 조용히 그러나 긴박한 대화로 출발했다. 네오 일행을 태운 호버크래프트가 행방이 묘연해진 니오베(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로고스호를 초조하게 찾는 중이다. <…리로디드>의 마지막에서 네오는 달려드는 센티넬(살인기계)을 향해 “뭔가 변했어”라며 손을 번쩍 들어 마치 매트릭스 내부인 것처럼 가볍게 처지해버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코마 상태의 네오는 시온 병사 베인과 나란히 누운 채였다. 베인은 시온으로 몰려드는 수십만의 센티넬을 길목에서 지키며 기습작전을 펼치려던 시온 저항군의 작전이 누군가의 방해로 실패한 뒤 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3부작은 종결되었나

3편의 뼈대는 2편에서 던져진 힌트와 공개된 3편의 예고편을 토대로 놀랄 만큼 완벽하게 추리됐다(인터넷에 떠도는 그 추리는 <씨네21> 423호 씨네스코프에 소개됐다). 베인의 몸이 매트릭스에서 현실로 파고든 스미스 요원의 ‘분신’이라는 점이 드러나기 직전, 네오는 미지의 공간에서 눈을 뜬다. ‘모빌 애버뉴’(Mobil Ave)라 쓰인 전철역. 네오는 그곳에서 <…리로디드>의 ‘키메이커’ 같은 새로운 인물 ‘트레인맨’을 만난다. 모빌 애버뉴는 현실과 매트릭스 사이의 중간세계다. 이곳을 관할하는 트레인맨은 사악한 프로그램 밀매업자 메로빈지언의 수하. 전철을 타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이 닫힌 공간에서 네오는 매트릭스 3부작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실마리(혹은 깨달음)를 얻게 된다.

행방불명된 네오의 정신을 찾으려는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는 예언자 오라클을 지키는 세라프의 안내로 메로빈지언의 클럽 ‘헬’(Hell)을 찾아간다. 첫 액션신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데 매트릭스의 팬이라면 이 순간 잠시 향수에 빠질 법하다. 1편의 정부청사 로비신을 패러디한데다가 트리니티의 그 유명한 ‘더블 이글’ 동작이 모처럼 다시 등장한다. 공중에 떠서 독수리 자세로 상대를 가격하던 발차기 말이다. 로비신과 다른 점이라면 상대방이 천장에 거꾸로 붙어 매끄럽게 움직이며 총탄을 피한다는 것과 이 신이 격렬한 총격과 사방으로 튀는 파편에도 불구하고 마치 먹먹한 진공상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충분히 예고된 바 있는 시온의 최후 결전은 전반부에 펼쳐진다. 수십만의 센티넬과 시온의 기갑부대 ‘APU 군단’의 충돌은 <…레볼루션> 스펙터클의 핵을 이룬다. 프로듀서 조엘 실버가 아주 끔직스러웠다는 표정으로 수많은 돈을 잡아먹었다며 혀를 내두른 긴 시퀀스다. 현실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신인 만큼 (매트릭스 내부의 디지털적 스펙터클과 비교해) 아날로그적 스펙터클이지만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몰려드는 센티넬들은 수없이 덧씌워진 CG로 생명력을 얻었다. 그들이 징그러운 진풍경을 연출한다.

1999년 5월에 시작해 2003년 11월에 완결되는 3부작이나 시온의 혈전을 어떻게 매듭짓느냐는 모두 네오에게 달렸다. 네오는 트리니티와 함께 니오베의 로고스호를 타고 머신시티로 향한다. 싸우러 간다기보다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인간 전지를 재배하는 거대한 ‘농장’ 너머에 있는 머신시티가 호락호락하게 인간의 접근을 허용할 리 없다. 머신시티를 지키는 센티넬 군단이 새까맣게 달려들고 로고스호가 그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혁명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네오의 선택은 머신시티와 시온의 공존이다. 그렇다면 변한 건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최종 결말은 끝없이 지연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매트릭스 시리즈가 다시 이어지더라도, 조엘 실버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네오와 트리리티가 재등장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워쇼스키 형제의 장난스러우면서도 난해한 게임을 수용하려면, 3부작의 진정한 주인공일지 모르는 오라클과 스미스 요원을, 그리고 ‘매트릭스’의 등장(1편)과 ‘매트릭스의 재장전’(2편)을 거쳐 어떻게 ‘매트릭스 혁명’(3편)에 이르렀는지 그 긴 여정을 매트릭스의 시선으로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매트릭스의 위상을 네오가, 아니 워쇼스키 형제가 실은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추측해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편 <매트릭스>에서 해커 네오이기도 한 컴퓨터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은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라와 시뮬라시옹>(1981)을 이용해 불법 프로그램을 거래한다. 모피어스가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라며 매트릭스의 정체를 직시하게 된 네오에게 건네는 인사도 보드리야르의 인용이었다. 이는 “원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현실을 모형에 의거해서 만들어내는 것, 즉 과도현실”의 시뮬라시옹이 현실을 대체해버린 진실을 가리킨다. 현실은 “단지 사막 위에 여기저기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의 네 가지 단계에서 과도현실이 승리한다는 ‘염세주의’를 펼쳤다. 1편 <매트릭스>는 그 염세주의에 역행하는 듯 했다. “진실을 볼 수 없도록 우리 눈을 가려온 세계”라며 매트릭스의 정체를 일갈하고 네오에게 인류 해방의 메시아적 기능을 부여했으니까. 뜻밖에도 <…리로디드>에선 혼란과 또 다른 출구의 가능성을 던져줬다. 네오와 모피어스에게 길을 밝혀주던 예언자 오라클은 인간심리 연구용 프로그램이었다(이에 반해 인공지능 로봇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최초의 SF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다).

오라클의 애초 기능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는 건 1편이다. 스미스 요원은 포로가 된 모피어스에게 씹어뱉듯 입을 놀렸다. “매트릭스가 처음에는 인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을 아는가? 고통도 없고 모두가 행복했지. 그런데 그게 재앙을 불렀지. 아무도 프로그램에 적응을 못했어. 농작물이 몽땅 죽어버렸어. 프로그래밍 기술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희 종족은 고통과 불행을 통해서만 현실을 인식하는 거야.”

인간은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지만 고통과 불행이 없으면 죽어버리는 이상한 ‘농작물’이었다.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바로 오라클이었다. ‘매트릭스의 어머니’라는 오라클에 이어 <…리로디드>에 등장한 ‘매트릭스의 아버지’ 설계자는 네오도, 모피어스도, 심지어 관객도 허탈하게 만들 만한 놀라운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시온이 파괴된 건 5번째였고, 네오는 6번째 파괴를 막아보려 나선 6번째 ‘그’일 뿐이라는. 메시아라던 네오는 매트릭스가 만든 불규칙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3편에서 오라클이 네오에게 “너의 목적과 나의 목적은 같다”라고 말하는 건 당연지사일망정 배신은 아니다. 오라클은 네오를 돕다가(그게 매트릭스를 돕는 길이기도 했겠지만) 재프로그래밍되는 수난을 겪는다(2편 촬영 뒤 오라클 역의 글로리아 포스터가 지병으로 숨지는 바람에 비슷한 인상의 매리 앨리스로 대체된 게 실제 이유이지만). <…레볼루션>은 1편에서 부정했던 보드리야르의 염세주의 옆으로 돌아왔다. 좌표를 달리한 채 열린 시선으로 문제를 수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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