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매혹적 액션영화 <킬 빌>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 [1]
2003-10-31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세상 모든 복수담 모아 재창조한<킬 빌>

매혹적 액션영화 들고 온 쿠엔틴 타란티노를 도쿄에서 만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6년 만에 새 영화를 만들었다. 이소룡의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우마 서먼의 사진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았던 영화 <킬 빌>이다. 인용한 영화는 세다가 지칠 정도고,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장르도 빠짐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킬 빌>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한 계단 도약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액션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타란티노를 만났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에서 칼에 벤 사무라이는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추운 겨울 찬바람이 스치는 소리군. 항상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사무라이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는 핏줄기가 서걱거린다. 사막 같았던 그 비장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이미 30년 전에 사라진, 피묻은 원한은 피로 갚아야만 하는 세계. 쿠엔틴 타란티노는 검을 든 두명의 여전사를 눈밭에 세워 바로 그 세계를 현재로 이끌어냈다. 그의 네 번째 영화 <킬 빌>은, <타임>의 표현에 따른다면, “가장 순수하고 영화적으로 독창적이었던 옛 영화들을 재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 영화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마카로니 웨스턴, 사무라이영화, 쇼브러더스의 쿵후영화가 <킬 빌>의 여정을 따라 몸을 섞는다. 세상 모든 복수담이 여기에 모여, 한편의 매혹적인 액션영화가 되었다.

<킬 빌>은 타란티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는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이 뒤엉키는 복잡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대사는 폭포처럼 거셌고, 편집은 조급하게 달음질쳤다. 그러나 <킬 빌>은 면사포 아래 짓뭉개진 신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첫 장면부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낸시 시내트라가 쓸쓸한 어조로 부르는 <뱅뱅>, 검은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코마 상태의 여인, 4년 만에 깨어나 뱃속에 있어야 마땅한 아기를 찾는 다급한 몸짓, 납작해진 배를 쥐고 터져나오는 통곡. 그 순간 <킬 빌>은 무고하게 죽은 아홉명의 목숨을 보상받으려는 처절한 복수극으로 나가려는 듯 보이지만, 곧 짧게 챕터를 끊어가면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찬란한 원색과 텍사스의 나른한 냉소로 옮겨간다. 도대체 이건 무슨 영화인가. 타란티노에게 <킬 빌>은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이다. 그는 여전사와 복수라는 기둥 두개를 박아두고선 숱한 애창곡들로 그 사이에 그물을 쳤다.

센 영화, 그 핏빛의 미학


타란티노는 친구들에게 듣고서야 알았다지만, <킬 빌>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다. 코넬 울리히의 추리소설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검은 옷의 신부>는 결혼식장 앞에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부가 차에 탔던 사람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킬 빌>도 외양은 비슷하다. 살모사 암살단의 킬러였던 브라이드(우마 서먼), 코드명 블랙 코브라는 텍사스 엘파소로 달아나 결혼식을 올리려 한다. 그러나 보스 빌과 옛 동료 네명이 들이닥쳐 식장 안에 있던 사람 전부를 죽이고, 빌의 아이를 배고 있던 브라이드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브라이드는 코마 상태에서 4년을 보낸 뒤 깨어나 복수를 시작한다.

200페이지가 넘는다는 시나리오의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로 <킬 빌>은 단순하다. 최소한 1편만은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타란티노는 브라이드가 복수 대상 리스트에 오른 다섯명을 찾아갈 때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살모사 암살단원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관객에게 “브라이드와 함께 멀티플렉스 사이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했다. 그 때문에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브라이드가 리스트의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해야 했다. 타란티노가 그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인에게 상처받은 청년 같은 표정”을 짓곤 했으므로. 1편에서 그 절정은 청엽옥의 전투였다. 도쿄 암흑가의 여왕 이시이 오렌(루시 리우)은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것이 당연했다. 컴퓨터그래픽을 싫어하는 타란티노는 일 대 백에 달하는 그 난투극을 찍느라 <펄프 픽션>의 전체 촬영기간 10주에 육박하는 8주를 소비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가 원한대로 청엽옥 전투는 “<지옥의 묵시록>의 헬리콥터 장면이 전쟁영화에서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치”를 액션영화에서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컷 한컷을 모두 언어로 폭로한다고 해도, 그 피바다는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을 제외한 국가의 관객은 붉은 피보라를 모노크롬으로 탈색한 흑백 버전을 보게 될 것이다. 타란티노는 아시아 관객을 위해 청엽옥을 컬러로 촬영했지만, 눈알이 뽑혀나가고 발목이 잘리는 장면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청엽옥 전투는 <금연자> <복수> <외팔이 검객> 등이 보여준 장철의 잔인한 사지절단 액션에 분수 같은 피를 사랑하는 사무라이영화의 관습을 더했다. 전선과 전선이 만나 불붙는 하얀 불꽃처럼, 처절한 핏방울이 튀어오르는 것이다. 전투의 대미, 칼날에 찢긴 오렌의 흰 기모노 위에 흐르는 일본 노래는 <학살의 꽃>이다.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


인터뷰 도중 오마주라는 단어를 수없이 언급한 타란티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영화들에서 버나드 허먼과 퀸시 존스, 아이작 헤이즈,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가져와 인용했다. 그것은 쇼브러더스가 좋아한 방법이었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다는 이유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구>는 <샤프트> 테마를 썼고, <태권진구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테마를 썼다. 저작권은 사지 않았다. 어차피 작곡가들은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구>의 음악은 원작보다도 멋있어서 몇번을 듣고 싶어질 거다.” 타란티노가 <킬 빌>을 그레이트 히트 앨범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비유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명인 하토리 한조가 브라이드에게 일본도를 선물하는 장면에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함께해온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깔린다. 비정하고 차갑지만 지켜야 할 계율이 있는 전사들, 혹은 총잡이들이 국경을 넘어 하토리 한조의 다다미방에 발을 딛는 듯하다. 그러나 넘친다 싶으면, 타란티노는 음악을 걷어낸다. 오렌이 마지막 말을 남기는 대목에서 들리는 거라곤 겨울 바람소리와 딸그락거리는 수통 소리뿐이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의 사무라이가 들었던 세상 마지막 소리를, 오렌도 들으면서 쓰러진다.

타란티노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날마다 영화 한편을 필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한데 얽혀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펄프 픽션>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복수에 나선 여전사를 떠올렸을 때, 그 머리 속에는 하나의 목록이 타이핑되고 있지 않았을까. 타란티노는 수많은 복수극들을 참고했고, 그 절절하면서도 무자비한 정서를 <킬 빌>에 누벼넣었다. 타란티노가 아는 영화의 여인들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느 부모는 매음굴에 팔려간 딸을 보고 절망해서 목숨을 끊는다, 남편은 살해당하고 자신은 강간당한다,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부모를 지켜본다, 그러나 모두들 살아남아 복수를 한다. 이 사연들이 피눈물을 모아 애니메이션 파트 <오렌의 족보>에 흩뿌리는 것이다. 오렌은 아홉살 때 일본도가 아버지의 몸을 바닥에 못박는 걸 보았고, 침대 밑에 숨어 침대 위에서 죽은 어머니의 핏방울을 맞았다. 2년 뒤 그녀는 원수를 갚고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피를 음미하면서 웃는다. 오렌의 과거를 설명하는 브라이드의 내레이션은 다소 코믹하지만, <킬 빌>은 이처럼 미국인으로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브라이드의 사부로 출연하는 액션스타 고든 리우는 “쿵후 동작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은 당신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쿵후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존중하는 법을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존중하면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타란티노는 <킬 빌>을 단 한컷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은 세 시간 넘는 액션영화를 시장에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킬 빌>을 두편으로 나누어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킬 빌> 2편은 내년 2월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한때 브라이드의 연인이었던 보스 빌이 얼굴을 보여주고, “모종의 이유로 밝힐 수 없었던” 브라이드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고, 타란티노가 능숙하게 써내려간 좀더 많은 대사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전해지는 소문이다. 넉달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킬 빌>은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는 격언으로 시작한다. 그 경구는 <킬 빌> 2편을 기다리며 몸달아하는 관객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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