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바다 사나이들이 출격한다
온 캘리포니아가 불길 앞에 전율하고 있었지만, 극장 안은 물바다가 되기 직전이었다. 피터 위어가 감독하고 러셀 크로가 주연한 신작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언론 시사회가 열린 곳은 LA 폭스 스튜디오의 대릴 자누크 극장. 에어컨이 과하게 가동된 객석에서 기자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들었다. 11월에 해양 어드벤처라니 너무 춥지 않을까. 애초 6월로 계획됐던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개봉이 가을 문턱까지 밀린 까닭은, 오스카를 내다본 제작사의 포석이라고 했다. 마침 극장 밖 복도에는 스튜디오 전성기의 ‘킹핀’ 대릴 자누크가 <이브의 모든 것> <나의 계곡은 얼마나 푸르렀나> 등으로 타온 묵은 오스카 트로피들이 콧대를 세우고 도열해 있었다.
물의 스펙터클 장관
드디어 불이 꺼지자 이십세기 폭스의 팡파르가 울리고 연달아 미라맥스의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떠오르더니 유니버설사의 지구도 한 바퀴 돈다. 1억3500만달러라는 무시무시한 제작비를 추렴한 세 영화사의 로고를 보고 있자니 오스카 야심에다가 손익분기점까지 높디 높은 대작의 부담감이 전해져왔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태생부터 순탄한 영화는 아니었다. 10년 전 MGM의 새뮤얼 골드윈 주니어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20권짜리 연작 해양소설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 처음 눈독을 들였지만 오브라이언은 영화라는 매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이후 오랫동안 ‘시대극’이라는 뜨거운 감자에 섣불리 입을 대려는 스튜디오는 없었다. 이십세기 폭스가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접수한 것은 <글래디에이터>가 시대서사극의 귀환을 선포한 2000년. <글래디에이터>를 표본으로 삼고 <타이타닉>의 요람 멕시코 바하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는 단편적 사실만으로도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포부는 선명하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나폴레옹 전쟁기인 1805년 남미 해역에서 프랑스 무장선박 아케론을 침몰시키거나 나포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영국 해군 서프라이즈호의 선장 잭 오브리(러셀 크로)와 선원 197명의 모험담이다. 스무권의 원작 가운데 <마스터 앤드 커맨더>가 스토리를 빌려온 것은 제10권에 해당되는 <세계의 머나먼 끝>(Far Side of the World, 피터 위어 감독은 <세계의 머나먼 끝>을 제목으로 원했지만 예술영화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숨을 흘렸다). 전력이 한수 위인 아케론호에 패배한 잭 오브리 함장은 수리를 위해 귀항하자는 장교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선상 수리를 고집하며 케이프 혼에서 아케론을 뒤쫓는다. 부상병을 치료하는 외과의사이자 박물학자이며 잭 오브리에게 연인보다 더한 친구인 스티븐 마투린(폴 베타니)은 선장의 명령이 자존심 때문이 아닌지 추궁하지만 잭의 결심은 확고하다.
▲민간인의 배로 가장하고 아케론에 접근하는 서프라이즈호(왼쪽), 행운아 잭이라는 별명을 지닌 오브리 선장은 배와 선원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명한다(가운데), 피터 위어 감독은 원작과 박물관, 학자들의 도움으로 19세기 선상생활 재현에 완벽을 기했다(오른쪽).
잭과 스티븐의 우정어린 갈등이 중심
예고편부터 <퍼펙트 스톰>을 연상시킨 이 영화에서 8천 갤런의 물을 갑판에 쏟아붓고 750개의 사실적인 특수효과를 동원한 물의 스펙터클은 당연히 볼 만하다. 그러나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차별화하는 두 가지 포인트는, 19세기 바다 사나이들의 전투적 일상의 엄밀한 재현, 그리고 셜록 홈스와 와트슨 콤비를 능가하는 잭 오브리와 스티븐 마투린의 특별한 파트너십이다. 리얼리티를 향한 자부심은 첫 신부터 분명하다. 완전한 군인 한 사람 몫을 요구받는 앳되다 못해 가련한 소년 사관 후보생들, 육박전이 벌어지는 갑판 밑에서 이뤄지는 속성 외과수술, 마치 해적처럼 나포한 적선의 재산을 성과급으로 받는 시스템 등은 못 보던 구경거리다. <행잉록에서의 소풍>부터 거의 모든 전작에서 특정 공간의 감각을 짚어내는 데에 탁월했던 피터 위어 감독의 장기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배의 곳곳을 고참 뱃사람의 시선처럼 노련하게 훑는 카메라가 돛대를 기어오르는 남자들의 실루엣을 잡아낼 때면 해양 모험에 대한 판타지가 없는 관객의 가슴에도 북이 둥둥 울린다. 감독의 사실주의적 원칙 덕택에 대화 신에서도 완전히 고정된 숏은 하나도 없다. 이같은 관찰력은 일찍이 “제인 오스틴에게 해군 간 남동생이 있었더라면 패트릭 오브라이언 같았을 것이다”라는 평을 들었던 원작자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기도 하다. 요컨대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과거의 해양 영화보다 밀폐된 우주선에 머물다가 가끔 행성에 정박하는 <스타트랙> 류의 스페이스 무비를 닮았다.
한편 심리적으로 영화의 항해를 인도하는 힘은 잭 오브리와 스티븐 마투린의 우정어린 갈등에서 나온다. 프랑스 전함 아케론은 서프라이즈호가 만나는 여러 얼굴없는 적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잭과 스티븐의 관계는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추진력이다. 지옥까지라도 돛을 올릴 듯한 잭과 어떠한 격랑 속에서도 고요한 이성을 잃지 않는 스티븐은, 딱 한번씩 친구를 위해 타협하면서 이야기를 클라이맥스로 몰아간다. 마스트에 매달린 러셀 크로를 휘도는 닭살스런 패닝숏보다, 두 친구의 현악 이중주가 몇십배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는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시의 블록을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은 보이지 않는다. 항해가 유유히 계속될 뿐, 막판에 바다가 고스란히 무덤으로 화하는 비장미도 없다. 무엇보다 잭과 스티븐이라는 캐릭터의 유명세가 없고 나폴레옹 전쟁의 외곽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무심할, 영미권과 유럽 외곽의 관객이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제작사들이 대면할 강적이 될 것이다. “프랑스 함장을 아동 성희롱이나 강간을 범하는 악당으로 그려 최후의 결전을 로맨틱하게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는 것이 차분한 미소를 띤 피터 위어 감독의 우스갯소리. 고지식한 해양액션블록버스터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한국에선 11월28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