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그가 신인처럼 사는 이유, <천년호>의 정준호
2003-11-1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정준호는 낮고 굵은 목소리를 가졌다. 그저 타고난 음성이겠지,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과 설움을 아는 배우다. 그늘을 아는 사람은 눈빛에서, 목소리에서, 사소한 인사 한마디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과거를 내비치게 마련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외모를 가졌으면서도 그것과 상관없이 찾아왔던 실패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배우는 희로애락을 다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해요.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한을 묻어야 하는데….” 일찍부터 ‘충청도 영감’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는 정준호는 재주보다는 어쩔 수 없이 우러나오는 감정에 기대어 연기를 해야 한다고 믿는, 숙성되고도 때이른 가치를 품고 있었다.

막 연기를 시작했던 90년대 초반, 정준호는 너무 빨리 TV드라마의 주연이 되었다가 너무 빨리 추락했다. 몇년을 끈기로 견디고 난 정준호는 한국영화 역사에서도 상위에 기록될 법한 흥행영화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을 필모그래피에 더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 그에게 <천년호>는 엄청난 제작규모나 무협사극이라는 장르의 명칭과 관계없이 모험이라고 할 만한 영화였다. 밀려드는 시나리오는 대부분 안전한 흥행을 소원하는 코미디였고, “그런 블록버스터가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굳이 위험한 길을 갈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천년호>를 택했다.

정준호, 영화에선 통일신라의 장군 비하랑은, 여왕의 질투와 천년을 묵은 악령의 저주를 헤치고 연인을 보호하려 애쓰는 남자다. 끌릴 만한 인물이지만, 정준호는 멜로연기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연기란, 상대를 바라보기만 할 때도, 말 한마디를 건넬 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상력을 탕진해야 하는 것인데. 그는 그런 이유로 오천년 나이 먹은 나무들이 울창한 <천년호>의 숲으로 몸을 던졌다. “배우로서 거의 겪어보지 못할 도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오래된 숲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놓아 기른 거친 중국산 말 위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참으로 소박한 이유지만, 그것은 엄청난 욕심일지도 모른다. 정준호는 지금까지 코미디나 로맨틱코미디, 호러처럼 장르의 매력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를 해왔다. 그의 차기작 <동해물과 백두산이>만 해도 낚시하다 표류한 북한군 두명이 남한사회에 던져지는 코미디영화다. 그러나 정준호는 언젠가, 마흔 즈음이 되면, 그 자신의 연기가 성패를 좌우하는 영화를 하고 싶어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파이란>처럼 인간미가 있어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영화를. 그날을 위해서 정준호는 온갖 장르를 오가며 자신을 갈고 닦고 있다고 했다.

이미 서른을 넘겼는데도, 아직 신인처럼 연기를 공부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정준호는 왠지 믿음이 가는 배우다. “내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그게 더 나아요. 밤에 잘 때 편안하니까.” 손해보며 사는 이유치고는 참으로 소박하다. 그는 말을 매우 잘하는 배우이기 때문에, 더 나은 이유를 댈 수도 있을 테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를 기원할 수밖에. 언젠가 나이보다 앳된 눈동자에서 <라스베가스를 떠난며>처럼 진한 슬픔을 쏟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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