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유혹의 아이콘, <천년호>의 김효진
2003-11-19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토끼 같은 저 두눈이 무엇에나 반응 잘하고, 쉽게 놀랄 것 같고, 눈물도 많이 금방 투두둑 떨어뜨릴 것도 같은데 모두 다 억측이었다. 깊어서 혹은 넓어서 흔들리지 않는 호수처럼, 오랜 시간 천천히 식으면서 굳은 호박(琥珀)처럼 눈빛은 잔영없이 단단하고 야무졌다. 중학생 교복 차림으로 하이틴 잡지의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서던 때부터 그녀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의 출렁임이 거의 없는 대범한 소녀였다.

셔터 소리와 카메라 불빛에 적응이 되니, 오히려 즐기는 정도가 되었단다. “떨리는 건 요즘이 그래요. 그땐 너무 몰라서 그랬는지. 모르는 사람이 용감한 법이잖아요. 요즘은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하곤 해요. 예전엔 없던 일이에요.” 조급하게 몰아세우는 스케줄에 둘러싸이게 되자 고됐던 걸까.

그녀는 브라운관을 도망치듯 떠나 멀리멀리 몸을 숨긴 듯이 보였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이야 일이 고될수록 그 큰 두눈을 부릅뜨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성격의 그녀를 아는지라 도망 운운하는 오해 따윈 없었겠지만. “스스로 납득이 안 됐어요. 왜 이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뭔가 제 의지가 조금이라도 작동해서 ‘선택’한 일이었다면 좋았겠다 싶었죠. 남들이 골라준 극에 여물을 먹듯 출연하는 건 의미가 없었죠. 그래서 미련없이 쉬자고 했어요.”

학교를 다니며 안정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얼굴이 더 환해졌다. 큰 바위를 가슴 위에서 내려놓은 시원함, 끙끙 싸매기보다는 훌훌 털어버릴 줄 아는 지혜를 열여덟 소녀가 가진 것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신입생으로 학교 지리를 익히는 사이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방송 활동을 시작했던 아이들은 배우에서 가수로 그리곤 짧은 은퇴를 번복하거나 드라마의 작은 배역들을 착실히 밟아나갔다. 연예인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내내 흔한 우울증 한번 없었다.

중간고사를 나쁘지 않게 치러내고, 방학을 보낸 뒤 교정에 다시 섰을 때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됐다. 김민정이 출연하기로 한 영화의 시나리오가 덜컥 그녀의 손으로 날아든 것이다. 그때가 지난해 11월 1일. 중국으로 출국한 날은 11월 10일. 배역 준비고 뭐고 이뤄졌을 리 만무했지만, 마음은 강한 의지와 용기로 100% 충전돼 있었다. “밤 10시에 상하이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촬영지까지 6시간 동안 버스로 달렸어요. 다음 날엔 눈뜨자마자 와이어 테스트를 받았는데, 무술감독님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더라고요. 바로 액션신에 투입이 됐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대역없이 절벽 추락신을 찍어내면서도, 도닥여줄 부모님도 없었지만 막사에서 혼자 숨죽여 우는 일은 없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삼키면서도 ‘이런 걸 못 참고 어떻게 큰 산을 넘을 수 있겠어’ 하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그래도 현장은 험했다. 여유로움을 내보이며 지친 현장을 달랠 위치도 아니었지만, 까탈스런 여배우의 투정은 애초부터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지상에서 그녀는 말 위에서 달리고, 맨발로 뜀박질하고 절벽에서 호수로 뛰어내렸으며, 지상에서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고, 갑자기 솟구치거나 내려앉고, 장풍을 쏘아대는 혹독한 액션신을 치러내야 했다. “나중에는 감독님이 그러더라구요. 여배우가 많은 필모를 통해 배우는 것을 넌 이 영화 한편으로 거의 배운 셈이라고.” <천년호>의 자운비는 순수한 사랑을 희구하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혼백마저 거대한 악(惡)에 유린당하는 비운의 여자다.

“자운비의 천진난만함과 아우타(자운비의 몸을 빌린 귀신)의 섬뜩한 악마성을 표현해내는 게 참 어려웠어요. 그러나 극에 충분히 몰입한 뒤에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감정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열심히 했으니까 많이 봐주시고 평가도 내려주세요.” 순수함과 뇌쇄적인 악마성을 모두 지닌, 마릴린 같은 여자. 김효진은 이른 시간 안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아이콘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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