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보다는 폭력을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
로버트 A. 하인라인은 폐결핵 진단을 받고 젊은 나이에 제대한 해군장교였다. 그는 6년 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지원했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다시 한번 거절당했다. 밀리터리SF라는 장르를 확립한 <스타십 트루퍼스>는 군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하인라인이 한을 푸는 것처럼 치밀하게 써낸 소설이다. 군대와 우주, 한몸처럼 행동하는 집단과 미지의 공간. 하인라인은 소년들이라면 마음 설레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소재를 선택해서 우직한 성장담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폴 버호벤이 영화로 만들었을 때 비판을 불렀던 것처럼, <스타십 트루퍼스>는 파시즘에 가까운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곳에선 군인으로서 복무 기한을 마치지 않으면 시민권을 얻을 수 없다. 눈에 띄는 차별을 받는 건 아니지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조니 리코는 정치적 욕망이 아니라, 짝사랑하는 소녀가 군대에 가기 때문에, 멋모르고 함께 입대해버린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다. 조니는 캡슐을 타고 행성에 내려가 외계 생물을 사살하는 강하병이 되고, 차츰 의젓한 군인이 되어간다.
펜은 카메라보다 자유롭다. 하인라인은 보병에게 육체적인 힘과 무기를 부여하는 ‘강하복’처럼, 버호벤이 버려야 했던 매력적인 기계들을 활용했다. 점프하고, 주변을 정찰하고, 벌레들을 쓸어버린다. 이 단순한 임무는 1인칭 서술 속에서 두렵고도 속시원한 전투로 변화하고, 엄청난 살육으로 이어진다. 하인라인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벌떼와도 같은 군대를 칭송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사회가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파, 그러면서도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운 남자. 하인라인은 위험한 작가였지만, 영감 넘치는 작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윤리 선생의 입을 빌려서 교화보다는 처벌을, 대화보다는 폭력을 다소 지루하게 강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년이 남자로 자라나는 과정은 언제나 매혹적이고 사랑스럽다. 모두 손을 모아 군국주의자 조니가 장교시험에 통과하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국적이나 민족보다는 연애를!
영화 <GO> - 소설 <GO>
‘정체성의 혼란’은 이민 2세, 3세 예술가들의 정체성을 못 박아온 테마다. 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조총련계 학교에서 공부한 한국계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반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가네시로 가즈키에게 전세대 재일작가들을 괴롭히던 뿌리의 문제는, 그것이 당장 오늘의 일상에 끼어드는 한에서만 관심사다. 나는 그냥 나인데, 자아 정체성을 찾는 데에 도대체 민족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장미는 무슨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롭다고 셰익스피어가 일찍이 갈파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데올로기와 혈통의 뻑적지근한 얽힘을 가리켜 가네시로는 “별볼일 없는 얘기다. 가능하면 유머도 섞고 싶은데 그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는 얘기다”라고 쓴다(그러므로 가능한 다른 모든 부분에는 유머가 구사된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뉘앙스가 실린 ‘재일 한국인’보다 ‘코리안 재패니즈’라는 담담한 명칭을 선호하는 작가는 책머리에 “내 또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적도 민족도 아닌 연애”라고 단언한다. 그렇게 허두를 뗀 <GO>는 민첩한 풋워크의 1인칭 소설이다. J. D. 샐린저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좀더 성질이 까칠했더라면, 그리고 좀더 주먹이 셌다면 젊은 날 편의점 카운터에서 끼적이지 않았을까 싶은 문체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좀 아깝다 싶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싸움 잘하는 소년으로 인류학과 생물학에도 조예가 깊다. 공산주의자로 살다가 오십줄에 하와이 여행비자를 받겠다며 남한 국적을 취득한 기분파 아버지 덕에 민족 중학교에서 일본 고등학교로 진학한 스기하라는 교내에서 많은 결투신청을 받지만 연전연승한다. 불량소년이 흔히 그렇듯 로맨티스트인 스기하라는 똑똑하고 예쁜 일본 여학생과 진지한 연애를 하지만, 같이 하는 첫 잠자리에서 한국인이라는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하는 따위의 시시한 비극도 겪는다.
그래서 좌절한 주인공이 민족학교 친구를 죽게 만든 일본 학생들에게 분노를 폭발시킨다, 면 미끈한 전개겠지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스기하라는 그저 “엉뚱한 짓하다가 죽지나 마”라는 인사를 친구와 나누고 돌아서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주인공 스기하라에게는 세대로 편을 가르는 반항하는 10대의 습성도 없다. 영화에서는 소략하게만 묘사된 개성만점 부모와 스기하라의 밀월 관계는 연애 에피소드 못지않게 재미난 대목이다. 진짜 멋진 음악과 영화를 가려내는 일, 스무살을 맞지 못하고 죽은 친구의 눈빛을 기억하는 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부모와 다투지 않아도, 민족과 국적에 짓눌리지 않아도 청춘은 할 일이 많다.
<심슨가족> 시대를 위한 동화
영화 <슈렉> - 동화 <슈렉>
‘내 아이에겐 예쁘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갖겠지만 과연 예쁜 것만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잘생긴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만 존재하는 상상의 나라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왕자나 공주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라. ‘나는 왜 쟤만큼 예쁘지 않지?’ ‘우리집은 왜 좁고 지저분한 거지?’ 하는 의문은 자연스레 밑도끝도 없는 열등감으로 발전할지 모른다. 거꾸로 자신을 왕자나 공주로 여기는 아이들은 ‘못생기고 가난한 쟤랑은 놀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인어공주>나 <백설공주>만 좋은 동화라는 생각은 그래서 시정될 필요가 있다.
<슈렉>은 <백설공주>류의 동화에 대한 해독제다. 대부분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으로만 알고 있지만 <슈렉>은 1990년에 출간된 그림책이 원작이다. <뉴스위크>에서 ‘카툰의 왕’이라 부른 적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출신 동화작가 윌리엄 스타이그가 창조한 녹색 괴물 슈렉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못생긴데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녀석이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슈렉은 그림책에 비해 훨씬 귀엽게 순화된 편으로 이야기의 뼈대는 애니메이션과 같지만 슈렉의 성격에 대한 묘사는 그림책이 훨씬 실랄하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슈렉을 껴안고 뽀뽀하려는 꿈을 꾸다 깨어난 슈렉은 이렇게 웅얼거린다. “나쁜 꿈을 꾼 것뿐이야… 아주 끔찍한 꿈이었어!” 공주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대목은 더 나아간다. “슈렉은 공주의 코를 덥석 물었어. 공주는 슈렉의 귀를 꽉 깨물었지. 둘은 서로를 꼭 껴안았어. 불과 연기처럼 이 두 사람은 하나였던 거야.” 한마디로 <심슨가족>의 시대에 어울리는 동화라 할 만하다. 애니메이션 <슈렉>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고정관념을 공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쁜 것만 좋은 것이라는 신화는 그림책 <슈렉>에서 이미 충분히 깨진다. <슈렉>은 당신의 외모가 어떠하든 나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좋은 그림책이고, 흉한 몰골의 슈렉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예쁜 그림책이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소설 <어바웃 어 보이>
이제 식후의 칵테일 삼아 고독을 들이키는 도시의 싱글 라이프는, 고부간의 갈등이나 당파싸움만큼 고색창연한 소재가 됐다. 하지만 닉 혼비가 창조한 <어바웃 어 보이>의 윌 프리맨은 모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경지를 연다. 선친이 작곡한 캐롤 송 인세로 넉넉히 먹고사는 윌은 쿨하다 못해 저체온증으로 숨질 지경인 런던의 ‘전문직 백수’. 그의 전문 능력은 넘쳐나는 시간 속에 익사하지 않고 요령껏 떠다니는 기술이다. 친구가 진짜 사랑에 빠지면 “참 보기 안 좋은 광경”이라며 측은해하고 남들이 스트레스 해소에 부심하는 동안 윌은 일정량의 스트레스를 섭취하기 위해 일부러 러시아워에 차를 몰고 나선다. 이처럼 영원한 유년에 체류하던 윌의 인생은, 아이다운 삶을 빼앗긴 소년 마커스의 보호자 역을 떠맡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바웃 어 보이>는 윌과 마커스의 이야기가 교대하는 두겹의 성장소설이다. 소설은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관객이 나이 든 소년 휴 그랜트의 현란한 눈깜박임에 정신이 팔려 놓쳤던 ‘진짜’ 소년 마커스의 비범한 캐릭터를 재발견할 기회를 준다. 실제 모델을 옆에 두고 쓴 게 아닌가 싶은 닉 혼비의 대사와 시추에이션은, 읽고 있자면 유혹당한 코미디 제작자들의 심장박동이 들릴 만큼 영화에 안성맞춤이다. 소설과 영화의 큰 차이는 클라이맥스. 원작 속 마커스의 여행을 대체한 영화의 학예회 장면은 극적인 효과를 압축하면서 정서적인 톤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영리한 각색의 실례를 보여준다.
흔히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헬렌 필딩과 짝지어 운위되지만 닉 혼비의 인물에게는 친숙하고 보편적이라는 것 이상의 비범한 속성이 있다. 마커스와 윌은 둘 다 세상이 뭐라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것만 믿고 거기에 근거해 움직이는 강인한 인간들이다. 레이첼이 지적하듯 윌은 삶의 의미를 일과 아이, 가족과 관련짓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그 모든 것이 없어도 그다지 절망하지 않는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마커스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사물이나 인간의 소유가 깨지기 쉬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설픈 두 ‘소년’의 앞길에 대해 안심하면서 휴 그랜트의 어리버리한 얼굴 사진이 박힌 책 뒷장을 덮을 수 있다.
인내에서 뻗어나오는 힘
영화 <인생> - 소설 <살아간다는 것>
이국적인 이미지를 팔아먹는다고 욕을 먹기도 했던 장이모는 <귀주 이야기> <인생>으로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두편의 영화는 힘차고, 튼튼하고, 고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생기는 어쩌면 온전한 장이모의 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두편 모두 원작을 각색하거나 하나의 원작에 다른 소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인생>은 한국에선 <허삼관 매혈기>로 유명해진 작가 위화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을 원작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소설의 제목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하나의 단어이며 힘이 넘치는 말이다. … 그 힘은 인내와 감수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복귀가 노인이 되도록 살아남는 방법은 바로 그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어린아들과 다 키운 딸을 잃고, 아내와 사위를 잃고, 하나 남은 외손자마저 먼저 떠나보낸다. 그가 마음에 품고 살던 친구는 그 아들이 죽는 원인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지나는 길손을 붙들고 사십년에 이르는 상실과 고난의 이야기를 허허로운 웃음으로 풀어놓는다. 함께 밭을 가는 소에게 봉화야, 유경아, 죽어버린 가족들의 이름으로 말을 걸어가면서.
1960년에 태어났지만, 문화혁명의 태풍 속에서 비교적 평온한 성장기를 보냈던 위화는 원래 실험적이고 난해한 단편들을 쓴 작가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온 끈질긴 중국인들에게 눈을 돌린 첫 소설이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는 것. 위화는 다음 소설인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술 한병과 안주 한 접시면 불행을 털어버릴 수 있는 한 남자의 일생을 다루기도 했다. 수동적으로 체념한다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복귀와 허삼관은, 위화의 말처럼 인내에서 뻗어나오는 힘을 가진 남자들이다. 살아남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결코 서글픈 일만도 아닐 것이라고, 이 느긋한 중국인들은 위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