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월드 프리미어 [1]
2003-12-12
글 : 박은영
스펙터클과 대서사의 완결,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월드 프리미어를 가다

절대반지의 대장정에 위대한 마침표를 찍다

“피터 잭슨을 총리로!” 이건 농담이 아니다. 12월1일 웰링턴 시내에 운집한 10만명의 군중 속에 선거 캠페인을 연상시키는 피켓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남국의 붉은 꽃송이로 엮은 화환을 목에 걸고 나타난 피터 잭슨에게 쏟아진 환호와 갈채는 머리를 멍하게 할 만큼 우렁찼다. 그는 뉴질랜드의 영웅이고 스타이고 제왕이었다. 실사 영화화 불가 판정을 받은 판타지의 고전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노하우도 인프라도 빈약한 고국 뉴질랜드로 들고 온 지 5년 만에, 그는 뉴질랜드의 존재감과 가능성을 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런 피터 잭슨을 배우 존 라이스 메이어스는 “캡틴 쿡 이래 뉴질랜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위인”이라고 추어올렸다. 그럴 만했다.

이틀 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월드 프리미어를 위해 말끔히 새 단장을 했다는 앰버시 시어터에 전세계 17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 이 작품을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더랬다. 명단 확인을 받고 엠바고 서약을 하고 가방을 열어젖히고 휴대폰을 맡기는 등의 보안검색 절차를 지나고도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지만, 누구도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원작소설 중에서도 3부의 스토리를 가장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피터 잭슨은 과연 자신의 그런 취향을 어떻게 스크린에 담아냈을까. 전쟁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두축 사이에서 행여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았을까. 이런 기대와 우려를 나누기엔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긴 기다림의 끝. 들뜬 환호와 함께 막이 오른 지 정확히 3시간12분 만에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다. 10분은 족히 넘을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며 자리를 지킨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반지원정대의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각색 원칙은 ‘절대반지를 따라가자’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3부작 중 최고의 작품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장담하건대, 완결편으로서 실망스런 작품은 아닐 것이다. 피터 잭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한순간도 망설이거나 헤매지 않았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도 여전히 주류에 편승하길 꺼리는 피터 잭슨의 어두운 상상력은 악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간계 생명체들의 고난과 역경을 비추는 줌 렌즈가 되어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다. 3부의 이야기를 “가장 영화적”이며 “가장 감정적”이라고 받아들인 그는 극장판의 완결편 또한 자신의 느낌대로 만들어냈다. 인간의 고결하고 추악한 본성을 속속들이 포착해낸 웅대하고 비장한 서사시로.

1년 전 이맘때 아라곤은 헬름 협곡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메리와 피핀은 숲 지킴이 엔트들을 선동해 사루만의 아이센가드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파괴할 임무를 짊어진 프로도와 샘은 골룸을 길잡이로 내세워 모르도르로 향했다. 3부 <왕의 귀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크게 두축으로 전개된다. 기울어가는 중간계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는 아라곤은 곤도르 왕국의 후계자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로한과 곤도르의 군대를 이끌고 사우론과의 결전을 치르게 되고, 운명의 산을 향해 갈수록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는 절대반지를 운반하는 프로도의 운명은 샘과 골룸의 노골적인 반목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절대악에 맞서는 ‘정의로운 전쟁’의 승산을 믿는 것은 간달프의 말마따나 “바보의 희망”이다. 그 성패가 모르도르의 검은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작고 약한 두 호빗의 손에 달려 있으니,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 보인다.

<왕의 귀환>에 이르러 인물들은 폭풍과도 같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제껏 ‘배후 조종자’에 머물렀던 간달프는 프로도에게 감당키 힘든 짐을 지운 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전장의 지휘관 역할을 떠맡는다. 얼떨결에 반지원정대에 끼어들었던 유쾌한 호빗 친구들인 메리와 피핀도 맥주잔과 담뱃대 대신 칼을 치켜들고, 먼 발치에서 아라곤을 연모했던 로한의 공주 에오윈도 여전사의 위용을 뽐낸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왕의 귀환>의 MVP는 샘이다. 골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아둔하고 우직한 샘은 절대반지의 사악한 힘에 미혹돼 무력해진 프로도에게 끊임없이 ‘미션’을 일깨운다. 중간계의 가장 보잘것없는 종족 호빗, 미천하고 나약한 촌부 샘의 우정과 용기와 상식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빛을 발한다.

3부작을 통틀어 가장 어둡고 슬픈 이야기지만, <왕의 귀환>은 대단원답게 사랑과 우정이 세상의 희망임을 설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호빗 친구들의 우정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나 있다. 특히 곤도르 왕국의 섭정 데네소르와 아들 파라미르, 로한의 세오덴과 그의 조카 에오윈, 엘론드와 그의 양아들격인 아라곤의 관계가 부각되고 있다. 희생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려는 아웬의 생명력을 절대반지의 검은 힘과 반비례 관계에 놓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펠렌노르 전투의 배경과 동기가 되는 이들의 에피소드는 “얼굴없는 전쟁, 감정없는 서사”를 원치 않은 감독의 뜻을 잘 보필하고 있다.

피터 잭슨의 각색 원칙은 ‘절대반지를 따라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원칙에 철저했다. <반지원정대>의 경우 원작에선 비교적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톰 봄바딜의 에피소드를 배제했던 것처럼, <왕의 귀환>에선 샤이어 전투와 사루만의 몰락을 생략했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고 돌아온 호빗들이 사루만에게 넘어간 샤이어를 지켜내기 위해 격전을 치르고 사루만의 최후를 목도하는 대목이 끼어들면 반지 중심으로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내러티브의 초점을 흩뜨린다고 판단한 것. 사루만의 행방에 대한 설명은 “그는 탑에 갇혀 힘을 잃었다”는 간달프의 대사로 갈음된다.

취재지원 주한뉴질랜드 대사관·뉴질랜드 무역산업 진흥청뉴질랜드 관광청 ·이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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