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케이션 부문이 있다면!
월드 프리미어가 열리는 앰버시 시어터는 시민들의 모금과 시의 기금으로 새 단장을 마쳤다. 3부에 등장하는 나즈굴의 대장과 그의 애마(?)가 레드 카펫을 굽어보고 있다.
절대반지를 찾아 중간계를 헤맸다.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광을 기대하며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웃음이 헤프고 맨발 산책을 즐기는 아담한 체구의 키위들이 “중간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순간, 그 말이 강력한 최면으로 감겨왔던 것 같다. 여기는 중간계다, 그러니 반지의 행방을 찾으라는.
사실상 ‘메이드 인 뉴질랜드’ 제품이나 다름없는 <반지의 제왕>의 흔적을 찾는 것은 가까운 로케이션 탐사로부터 시작됐다. 개인 농장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호빗들의 고향 호비튼을 들러보리라 계획했지만, 그곳은 웰링턴에서 차로 6시간을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아주 먼 곳이다. 안타깝지만 일정상 미션 임파서블이다. 현지인들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웰링턴의 명소인 빅토리아 마운틴부터 들러보길 권했다. 시내 한복판에 우뚝 선 그곳은 영락없는 360도 회전 스카이라운지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 천연 전망대에선 고향을 떠난 네 호빗들의 여정에 처음으로 닥친 위험을 담아냈다. 반지의 검은 악령들에게 쫓기던 길, 몸을 숨긴 나무 둥치가 거기 있다. 불길하고 신산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던 ‘그 나무’는 이제 특수 분장을 지워낸 맨 얼굴로 조깅하는 시민들과 ‘성지 순례’ 중인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라”
웰링턴시 외곽에 위치한 카이토케 공원은 뉴질랜드 내 120여 로케이션 중 ‘유일하게’ <반지의 제왕>의 촬영장소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곳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공원 입구에서부터 ‘리벤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상냥하게 반긴다. 그러나… 정확한 촬영장소를 찾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프로도가 나즈굴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아웬의 구조로 회복되는 장면 등을 촬영했다고 하나, 이곳이 한때 엘프들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은신처였음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많지 않다.
중간계 부족들의 행진. 엘프들의 우아한 행진을 보라.
사우론에 투항한 마법사 사루만의 영토 아이센가드가 엘프들의 보금자리인 리벤델과 지척의 거리에 있다는 것은 재미난 우연이다. 카이토케 공원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하코트 공원에선 폭우 속에서 오크들이 뒤엉켜 나무를 넘어뜨리며 출정을 준비하는 장면, 그리고 간달프가 사루만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했다. 넓은 잔디밭과 기기묘묘한 모양의 나무들이 우거진 하코트 공원은 악의 기운은 오간 데 없이 여행자들이 충전을 위해 들르는 캠핑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변해버린 옛 애인과의 재회를 서둘러 마무리하는 심경으로, 웰링턴시 안팎의 로케이션 탐사를 마치고 나서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가이드>의 저자 이안 브로디에게 “모든 게 달라졌다. 알아볼 수가 없다”고 볼멘 소리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동조나 위로가 아니라 아찔한 카운터펀치였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라. 본래 <반지의 제왕>은 책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나. 어차피 세트란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질 운명이다. 나무나 플라스틱 같은 재료를 쓰기 때문에 날씨가 궂거나 시간이 지나면 파손되게 돼 있다. 게다가 촬영 허가를 받을 때 원상 복구 약속은 기본이다.” 인정한다. 세트와 CG 없이도 충분히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오스카 로케이션 부문이 있다면 수상하고도 남았을” 대자연 앞에 옹졸하게 대차대조표를 들이밀며 칭얼대고 있었음을.
웨타 스튜디오, 할리우드 부럽지 않다
웰링턴에 며칠을 머무르고도 <반지의 제왕>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웨타(WETA)에 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피터 잭슨의 전작 몇편에 참여했을 뿐인 웰링턴의 이 작은 시각효과 하우스는 <반지의 제왕>의 소품과 의상, 특수분장과 컴퓨터그래픽 등을 전담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이제 할리우드의 스카우트 경쟁으로부터 직원들을 단속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싸여 있다. 평소엔 언론은 물론 민간인 방문도 환영한다는 웨타는 3부의 개봉을 앞두고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많아진 뉴라인사의 통제로 기자단의 취재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대신 이들이 위로 삼아 마련한 자리는 주요한 소품들을 보여주고 설명을 곁들이는 약식 전시회. 중간계 시민들의 무기와 투구, 가재도구는 물론 마스크와 모형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웨타의 수장이자, 오스카 수상자인 리처드 테일러가 나타나 주요 소품을 소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하자, 기자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투구를 쓰거나 칼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기자의 본분? 그런 건 잠시 잊어도 좋았다.
월드 프리미어가 다가오면서, 반지의 흔적은 애써 찾을 필요조차 없게 됐다. 웰링턴시와 배우들, 중간계와 원정대 사이의 애정 표현이 너무나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월드 프리미어를 할리우드가 아닌 웰링턴에 유치한 것은 시민들이었다. 뉴라인이 LA에서 프리미어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웰링턴은 “그건 안 된다”고 술렁였고, 시와 시민들은 466만NZ달러를 투입, 시내 중심에 위치한 구식 극장 앰버시 시어터를 개조해, 원정대 환영과 환송 준비를 일찌감치 마쳤다. 뉴질랜드 국립우체국에선 주요 캐릭터의 얼굴을 딴 기념우표를 만들었고 나즈굴, 골룸, 트롤 등의 거대한 모형들로 공공 건물들을 뒤덮기도 했다. 이에 대한 원정대의 화답도 만만치 않았다. 피터 잭슨은 시의회와 함께 청년감독선발대회를 주관했고, 비고 모텐슨은 지역 대학기금 마련을 위해 사진전과 시 낭송회를 열었으며, 이안 매켈런은 게이 레즈비언 파티에 참여해 동성애 인권에 대해 발언했다. 카 퍼레이드와 레드카펫 세리머니와 월드 프리미어로 이어진 12월1일, 이들은 “생애 최고의 감동“을 서로에게 선사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경험. 가장 맑고 파란 하늘을 그날 거기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