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에로’가 아닌 ‘로맨스’를 위하여,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2003-12-16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에로’가 아닌 ‘로맨스’의 도시, 유성에 대한, 유성에 의한, 유성을 위한 영화.

“일년 열두달 중에 단 하루 섹스를 해야 한다면, 설날? 단오? 추석? 아냐! 바로 크리스마스 밤!”이라는 대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리 ‘에로’하지 않다. 등장하는 인간들도 그리 ‘해피’하지 않다. 오히려 남루하기 짝이 없는 변두리 인생들이다. 세계인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범한 날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대전구에는 유성이라는 동네가 있다. 그냥 띄어놓고 보면 생경한 지명이지만 ‘유성온천’이라고 하면 ‘아! 거기’라고 할 것이다. 영화는 이곳을 “뜨거운 물, 관광객, 건달, 양아치… 그게 전부인 곳”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그게 전부인 곳은 아니다. 여기엔 경찰관이 있다. 온천 일동파출소 순경인 성병기(차태현)는 이름이나 마음만은 ‘병기’처럼 철통같지만 사실 인생은 헛발질에 사고투성이다. 여기엔 아가씨도 있다. <온천 볼링장> 카운터에서 일하는 허민경(김선아)은 병기의 오랜 짝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나 1년 365일 중 하필이면 예수님과 같은날에 태어난 민경은 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징크스를 안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락이 뜸해지던 소방관 남자친구는 결국 그녀를 배반하고 만다. 홧김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민경과 외로움을 달래던 병기가 우연히 노래방에서 만나고 그날 이후 병기는 올해 크리스마스 전엔 반드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다. 바로 온천파 보스인 방석두(박영규). “45도면 계란이 익고 50도면 닭이 익는다”는 펄펄 끓는 온천물에 어린 병기를 그저 장난으로 풍덩 던져버린 방석두는 병기가 “언젠가 내 손으로 잡고 말 거야!”라고 이를 바득바득가는 존재. 한편 옥상에서 뱉은 민경의 침이 우연히 이마에 딱 들어붙는 순간 “운명!”을 느켰다는 방석두는 그날 이후 민경에게 과도한 애정공세를 펼친다. 이렇게 병기, 민경, 석두 사이엔 이상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여러모로 곽경택 감독의 데뷔작 <억수탕>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이건동 감독 역시 뉴욕대를 졸업했고, 곽감독의 단편 <영창이야기>에서 직접 붐마이크를 들기도 했다는 개인적 인연을 제외하고). “원래 15명 정도 등장하는 <숏컷> 같은 영화를 생각했다가 몇명의 캐릭터로 집중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고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메인 캐릭터들은 크게 빛깔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감독의 고향인 ‘유성’이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알카리성 라듐 방사능 단순천이며 피부병, 신경통, 두풍 등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온천 휴양지”인 이 동네는 “안마사 여성이 한겨울에 앏은 속옷만 걸치고 담배를 사러나와도 전혀 주목을 끌지 않는 도시”이자, 건달들이 용이나 호랑이 문신 대신 온천마크(♨)를 팔뚝에 새기며, 얼굴 좀 되고 몸 좀 되는 처녀들은 ‘온천아가씨 선발대회’에서 선발되는 것을 꿈꾸는 곳이다. 여관과 나이트클럽이 슈퍼보다 많은 이곳은 성적인 유혹들이 조심스럽게 가려져 있기보다 오히려 거리거리에 꽃피워진 동네다. 결국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온천장>쯤의 제목이 어울릴 법한 영화다(물론 이 제목으로 흥행은 장담할 수 없지만).

어른들은 산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절용 에로영화’ 제작에 몰입하고, “어부들 정력이 왜 센지 아냐?… 넙치 한 마리를 거기다 물리면 입을 뻐끔뻐끔 하면서 빨아주는데… 그게 죽인다는 거 아니냐”는 10대 소년들의 허풍 가득한 성적 판타지는 친절하게 영화적으로 재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면면이나 몇몇의 에피소드만으로 이 영화를 <색즉시공>과 <몽정기>를 적절히 섞어놓은 영화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성적인 이야기를 외투처럼 걸치고 있지만 사실 영화는 섹스보다는 로맨스에, 화끈한 농담보다는 수줍은 고백에 한표를 던진다. “C컵이예유, 여자 유방도 신발하고 같아서 큰 걸 입으면 커진다고 해서…”라며 야한 속옷을 선물하는 늙다리 조폭 두목보다는, 사랑고백 한번 제대로 못하고 주변만 맴도는 비리비리한 순경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드러난 많은 것을 배반한다. “일년 열두달 중에 단 하루 섹스를 해야 한다면, 설날? 단오? 추석? 아냐! 바로 크리스마스 밤!”이라는 대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리 ‘에로’하지 않다. 등장하는 인간들도 그리 ‘해피’하지 않다. 오히려 남루하기 짝이 없는 변두리 인생들이다. 악당들을 물리치는 경찰이 되겠다고 꿈꾸던 소년의 현실은 커다란 ‘포순이’ 가면을 쓰고 교통정리나 하고,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여자는 시비를 걸어오는 동네건달 앞에서 군말없이 몇번이고 볼링화를 바꿔줄 수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거친 인생을 살아왔지만, 사실 “오겡끼데스까”에 눈물 흘리는 “로맨스한 남자”인 석두 역시 어린 건달들에게 “석두=돌대가리”라는 놀림을 감내해야 한다. 세계인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범한 날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솔직히 ‘코믹영화, 김선아, 차태현 커플’이라고 하면 인기가요 1위한 지 6개월쯤 지난 노래제목처럼 식상하게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지끔껏 가져왔던 자신들의 연기톤을 한두 레벨 누른 채 영화의 차분한 기운에 기꺼이 자신을 묻는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는 화려한 전구장식도, 꼭대기에 반짝이는 큰 별도 없다. 백화점에서 산 매끈한 트리보다는 산에서 갓 베어온 나무처럼 조금은 어설프고, 조금은 투박하다. 그러나 여전히 장식할 구석이 많이 남아 있는 이 소박한 크리스마스용 트리를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진심’이라는 구슬이다.

:: 감독의 고향에서 촬영된 영화들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고 여기서 영화를 찍노라

“마이 뭇따 아이가….”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이 기상천외한 말들로 조합된 문장을 사천만의 유행어로 만들었던 <친구>.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투리를 영화 전체의 ‘언어’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현지인들만이 아는 지역의 독특한 정서 속에 퍼올린 펄떡거리는 캐릭터와 기억이 조합해낸 생동감 넘치는 대화는, 땅에 발붙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초특급 익스프레스웨이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여 감독들이 골목골목까지 익숙한 자신의 고향이나, 특정장소에 트라이포드를 세우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일는지 모른다.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출하면서 뉴질랜드의 경제,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까지 이야기한다면 좀 과한 건지 모르지만 이런 케이스는 외국 감독들에서는 비교적 자주 발견된다. 고향인 뉴저지 편의점에서 일했던 경험을 소재로 한 <클라크>로 94년 선댄스, 칸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케빈 스미스는 이후 <체이싱 아미> <도그마>에서도 고향인 뉴저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허드서커 대리인>으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혹평을 받았던 코언 형제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파고>는 그들의 고향인 미니아폴리스에서 촬영되었다. 87년에 일어났던 실제 유괴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파고>에서 “~야’로 끝나던 독특한 미네소타 사투리와 그 황량한 풍경은 어떤 음악이나 미술보다 강렬하게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한 포르노스타의 흥망성쇠를 포르노산업의 쇄락과 함께 역어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는 1970년대 미국에서 유통되는 90% 이상의 포르노영화가 제작되었던 LA 근교의 산 페르난도 밸리에서 촬영되었다. 이곳은 바로 감독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 그는 다음 작품인 <매그놀리아>에서 역시 산 페르난도 밸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모자이크식으로 엮어 보여준다.

로케이션영화 전체에 차지하는 영향을 정확한 수치로 드러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만약 <친구>가 남대문시장을 질주하고, 한강에서 물장구를 치며, 미끈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배우들이 나왔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거란 건 분명해 보인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