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그물 모양의 신종 장난감은 다양한 분야에서 권력이동을 일으켰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영화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소통하고 힘을 겨루는 방식 역시 대변동을 겪었다. Ain’t It Cool News 사이트의 창립자이자 지휘자인 해리 놀즈(Harry Knowles)는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뚝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슬랙커>들의 고향 텍사스주 출신의 해리 놀즈는, 병상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수다 사이트를 구상했고, 신속하고 여과되지 않은 소문과 프리뷰를 서슴없이 게재해 기존 저널을 압도하는 ‘권력’으로 성장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밀월하기를 원하고, 미국 시장 진출을 원하는 비할리우드 영화인들이 지원을 청하는. 급기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 <프리미어>의 파워 100에까지 선정된 해리 놀즈는, 이제 주류 할리우드의 경계뿐 아니라, ‘과연 게릴라인가? 박쥐인가?’를 묻는 독립영화 진영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대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불타는 감자 빨강머리 해리의 할리우드 습격사건 전말을 살펴보고, 이메일로 청해 들은 놀즈 본인의 목소리도 소개한다.
얼마 전 모 시사주간지가 ‘나 지금 쿨∼ 하니?’라는 제목의 독특한 커버스토리로 독자들의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2003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화두이자,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향하는 생활양식을 표현하는 단어로 ‘쿨’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젊은이들이 일종의 속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지 수십년이 지나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cool’이 원래의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 ‘쿨’이 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정확히 간파한 기획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cool’이 그렇게 거대한 화두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마이클 잭슨이 펩시콜라 광고모델로 등장해 ‘cool’을 외쳤던 80년대 초 이후로, ‘cool’은 그저 ‘좋다, 멋있다, 세련되었다’라는 의미를 우리말로 치면 ‘죽인다’ 정도로 표현하는 일상화된 속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일상화된 단어인 ‘cool’을 검색어로 미국 야후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결과로 나오는 약 4천만개의 사이트 중 3번째 인기 사이트로 Ain’t It Cool News(www.aintitcoolnews.com, 이하 AICN)가 뜬다는 사실이다. ‘죽이는 뉴스 아니냐?’라는 다소 황당한 이름을 가진 이 사이트는 이른 바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비공식 뉴스와 리뷰의 집결지’로 영화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1996년 오픈한 초기부터 이 사이트가 영화계와 영화팬들 사이에서 이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비공개 시사회에 몰래 참석한 뒤 영화에 대한 리뷰나 누출되지 말아야 할 정보들을 마구 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과정에서 홍보나 배급 담당자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발생했고, 다시 그 사실이 뉴스로 전파되면서 홍보효과는 더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스타쉽 트루퍼스>에 등장하는 곤충괴물의 사진을 인터넷에 사전 공개해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스타쉽 트루퍼스 사건’의 당사자도 AICN이었다.
텍사스 오스틴 출신의 영화 괴짜
이렇게 영화에 대한 열정에 다소 변칙적인 방법을 더해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최고로 ‘cool’한 사이트로 만든 주인공은 스스로를 괴짜 혹은 기인이라는 뜻의 ‘geek’이라고 부르는 해리 놀즈다. 1971년생인 그는 뚱뚱하다는 말로는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드는 200kg의 육중한 몸매와 빨간색인데다가 엉클어지기까지 한 긴 고수머리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스타일을 지녔다. 하지만 외모에서 그와 그의 사이트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면 절대 안 된다. 오늘의 그가 존재할 수 있게 된 데는 그의 가정환경과 두번의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알코올에 절어 살았던 어머니와 히피즘에 빠져 있었던 아버지가 모두 영화광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설명해주는 요인이다. 영화 관련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를 따라 영화제를 다니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빨간 머리를 한 거구의 남자아이에게 영화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네마 키드로 자라난 놀즈가 AICN과 같은 웹사이트를 운영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사건의 결과가 작용했다. 두 사건이란 사고로 인해 하반신 불수가 된 것과 맷 드러지와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우선 90년대 초반 하반신 불구로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백수생활을 하던 그에게 인터넷의 등장은 영화에 버금가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영화정보를 접할 수 있고, 불특정 다수의 영화관객과 영화에 대한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를 더욱 인터넷에 빨려들게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는 수준 높은 영화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Mr. Showbiz’라는 사이트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 <할리우드 리포터>나 <버라이어티>에 나온 기사를 재탕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는 유즈넷 뉴스그룹의 영화 관련 게시판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활동했고, 그곳에서 나름대로 ‘텍사스 오스틴 출신의 영화 괴짜’라 불리며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가 막 <드러지 리포트>라는 이름의 메일링 리스트를 운영하던 맷 드러지를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맷 드러지는 의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인터넷을 통해 가십거리들을 모아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취미 삼아 하던 평범한 인물. 그러다 기존 언론이 전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생각으로 1995년 <드러지 리포트>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부 네티즌의 호응을 얻는 데 그쳤지만, 얼마 뒤 클린턴 전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간의 섹스 스캔들을 최초로 보도하면서 그와 <드러지 리포트>는 일약 전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해리 놀즈는 <드러지 리포트>가 만들어낸 그러한 변화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고, <드러지 리포트>에 영화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1996년, 그는 <드러지 리포트>의 영화판이라고 불릴 수 있는 AICN을 만들고 운영을 시작한다. 정규적인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들을 소스로 해서 개봉예정작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던 몇몇 사이트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그는 속어와 비어가 난무하고 호오에 대한 표현이 분명한 자신만의 리뷰를 앞세웠는데, 그에 대한 몇 안 되던 독자들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 당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수많은 영화 관련 개인 사이트들과 AICN을 구별짓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 그런 상황을 급반전시킨 것은 이른바 ‘해리의 스파이’ 혹은 ‘해리의 군대’라고 불리는 리포터들이 생겨나면서였다. 특히 1997년 초부터 관계자들만을 대상으로 열리는 시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리포터가 등장하면서 AICN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