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피는 다음과 같이 속삭이곤 한다고 합니다. ‘너의 이야기가 진실이어도 거짓이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모순이 없도록만 하여라. 그럼 내 네게 영생(永生)을 약속하마.’ 한때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기도 했던 이 피의 속삭임을 믿는다면 그가 영생을 누리지 못한 까닭은 단지 그가 모순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소설집 <포도주> 프롤로그 중
짧은 단편들로 이어진 소설집 <포도주>는 한 문화재단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결국 여덟 군데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들긴 좀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99년 여름 1년간 처박아 두었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출판사에 들고 가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걸로 영화를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99년 한겨레문화센터에 들어갔고, 영화아카데미가 나이제한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조해서 만든 단편 <소세지>를 들이밀었다.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비디오방에서 1년을 죽친 자신과는 지식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지만, 별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학교는 가르쳐주는 게 없었지만 동기들이 영화 찍는 걸 옆에서 보면서 진짜 영화란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우리 인간들은 소중한 양분이 될 많은 자원들을 방치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지에 먹을 것을 널어두고도 배를 곯고. 단지 무지, 비위 혹은 그놈의 테이스트 때문에 말야….” 소설집 <포도주> 중 <남이 먹을 때1>
아카데미 1학년 작품이었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은 뭐든 먹어치우는 놀라운 비위를 가진, 그것만이 유일한 재능인 소년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인 ‘이준섭’은 그 아이의 본명이다. 촬영헌팅을 갔던 학교에서 “PC방 가려는 데 돈이 없다, 천원만 주라”며 뻔뻔하게 묻던 아이였다. 그외 아역배우들 역시 섭외한 학교 운동장에서 무작위로 불러모은 100% 아마추어였다. 하루 나왔던 아이들이 그 다음날은 안 나오는 통에 연결이 튀는 경우도 많았다. 여자주인공을 비롯한 소녀들은 자칭 ‘칠공주파’라고 부르던 그 학교에서 좀 ‘나가는’ 아이들이었다. 머리염색해야 한다고 돈 달라는 건 예사고, 돌아서면 “아줌마, 대사가 이게 뭐야!”라는 솔직한 소리도 서슴없이 내뱉았다. “나는 아이들이 싫다. 내 영화에 아이들이 곧잘 등장하곤 하지만 결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내가 인간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가 바로 위선적이라는 것과 코미디를 할 수 있다는 거다. 아이들은 코미디를 할 수는 있지만 너무 솔직해서 위선을 못 떤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렇듯 아이들을 싫어하는 감독이 만드는, 아이들만 등장하는 이상한 영화의 촬영장엔 감독도 아마추어, 배우도 아마추어였다. 날은 영하 20도, 학교협조도 잘 안 되었고, 프로듀서는 쉼없이 내리는 눈을 치우다가 결국 삽을 던지고 도망갔다. 고생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재인은 너무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너무 기뻐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연애할 때의 희열, 쾌락과 정확히 일치했다. 전기가 몸에 찌릿찌릿 오는 것 같은, 깊은 고통과 엄청난 희열이 시소를 타는. 그렇게 그는 이제 ‘영화촬영’에 중독되었다. 결국 첫경험을 치르고 졸업영화를 찍기까지 1년 동안은 엄청난 금단현상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촬영장에 나가서 카메라를 잡고 싶었다.
“… 들어라, 여기 유일한 것이 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닌 것이 여기 있다. 그래도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의 뺨을 함몰시키고 그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버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의 두개골을 열고 진실을 슬쩍 집어넣은 뒤 봉합하고도 싶었겠지. 그리고 그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너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느니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집 <포도주> 중 <너의 진실1>
1년 뒤 들어간 졸업영화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교회가 어떻게 물에 잠기냐고 걱정을 했지만 스스로에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터넷 공모로 스탭들이 모였고, 의외로 교회섭외도 쉽게 이루어졌으며 특수효과 하나 쓰지 않고도 시나리오를 영상화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냥 너무 행복했다. 촬영이 끝나면 밤새 술을 마시고 (그들은 별로 탐탁지 않았겠지만) 스탭들에게 헤어지기 싫다고 집에까지 쫓아가기도 했다. 고단한 줄도 힘들지도 않았다. 찍고 나니 아카데미에서 준 제작비 중 50만원이 남았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고 촬영이 끝나는 날 펑펑 울었다. 또 찍고 싶다, 어떻게 여기서 끝내냐, 그러다가 촬영에 대한 집착이 중독을 넘어가는 순간이 왔다. 촬영이 없는 일상생활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밥먹고, 차마시고, 자는 시간들이 단조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준비 중이던 에로영화 프로젝트가 엎어지자 금단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미쟝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번 본 적 있는 봉준호, 허진호 감독을 무턱대고 찾아가서 “스탭으로라도 써달라”고 애걸했다. “<친구>의 마약 먹은 준석이처럼 눈이 퀭해져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감독들은 “영화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사람 같으니, 바로 당신 영화를 찍어라”며 그를 스탭으로 두는 것을 유보했다. 이런 그를 두고 충무로에서는 “신재인이란 여자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사이코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아이디어는 콸콸 쏟아지는 물처럼 흘러넘쳤다. 그러나 하나를 붙잡고 진득하게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영화사를 찾아가고 하는 과정을 진행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계속 트리트먼트 수준의 글들만 쉼없이 쏟아냈다. 그때 쓴 트리트먼트가 대략 30여편이 되었다. 꿈에서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빨리 찍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행한 시기 중간중간에 영화제에서는 상을 주었다. 그러나 상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면 조잡한 영화라도 빨리 찍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남편도 “너 좀 이상한 것 같으니까 정신병원에 가봐라”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두문불출하고 무지막지하게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던 중 한 제작사 대표에게 <천사를 본 소년>과 <재수없는 소녀>의 두개의 중편을 묶은 장편 프로젝트 <남이 먹을 때>를 들고 갔고 소액이지만 투자하겠다는 뜻을 들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되어 3천만원의 지원금도 받았다. 2003년 10월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영화찍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