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독립영화계의 문제적 감독 신재인 스토리 [3]
2004-01-09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인간들은 너무 말을 잘한다. 그래서 지겹다. 그중 누구도 내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내 친구는 돼지다. 나는 소를 사랑한다.” - 소설집 <포도주> 중 <공포영화>

“11월이면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담했지만 이건 아카데미 단편이 아니었다. 15일 빡빡하게 준비하면 가능했던 단편과 달리 독립장편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처음에 투자를 약속했던 제작사는 지나친 서류작업을 요구했고 이런 소모적인 과정 속에서 PD들이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두달간의 작업은 “유황불에 몸을 달구는 것” 같았다. 캐릭터 있는 아이들만 15명, 전체 25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아역배우 캐스팅부터 고아원 헌팅까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10월 초부터 조감독과 둘이 앉아 한달을 꼬박 준비했는데 준비된 건 없었고, 몸은 축이 날 때로 나 있었다. 조강지처 같았던 조감독은 어느 날 “나는 감독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스탭들은 “수능 두번

본 기분”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선상반란이 가장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하지 않나. 스탭들의 분위기가 거의 선상반란 수준이었다.” 감독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등을 지지는 꿈도 꿨다. 이렇게 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자신의 영화가 너무 싫었다. 영화를 엎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차마 못하겠고 “누가 뒤통수를 부수고 갔으면 했다. 영안실에 누워 있다면 영화를 안 찍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신만은 쓰러지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유체이탈 같은 상태로 며칠 밤을 멍하니 새기도 했고 누군가는 “영화 한편 찍고 죽을 겁니까?” 하고 답답한 듯이 묻기도 했다. 결국 12월 초에 조연출과 연출부들을 새로 구성해야 했다. 제작사와는 사무실을 빌려쓰는 정도로 정리했다. 그렇게 12월22일 우여곡절 끝에 독립장편영화 <천사를 본 소년>의 첫 촬영에 들어갔다.

“옛날에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 그애의 모친은 사려 깊게 그녀를 교육시켰지. 그녀를 소설 나부랭이로부터 격리시키고. 대신 어머니는 그녀에게 과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고 단순한, 행복한 여인으로 성장했어.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소설 <파우스트>를 읽고 말지.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결국 그녀는 쓰러진다. 연애 감정, 죄의식, 부적절한 비유, 답이 없어도 되는 의문들, 모든 것을 아는 체하며 또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양….” - 소설집 <포도주> 중 <탕아, 돌아오다>

경기도 파주 교하읍, 허름한 건물에 만들어진 고아원 세트에서는 추운 날씨 속에도 촬영이 한창이다. 하지만 신재인 감독의 얼굴엔 지난 2달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모든 고민들과 고통들이 눈녹듯이 녹았다.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촬영하지 않을 때이고, 다음은 프리프로덕션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촬영하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번엔 “매일매일 장편의 리듬을 깨우쳐가고 있는 중”이라며 꽤나 신이 난 표정이다.

“원래 집 밖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는 그가 촬영 시작 뒤 거의 열흘 만에 집을 찾는다. 꼬불꼬불한 상도동 골목을 따라 들어간 그의 집 문을 열자 영화준비하는 두달 동안 신경을 못 써줘서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는 푸들잡종 두 마리가 유난히도 부산스럽게 주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머리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자꾸 고꾸라지는 중국산 스탠드가 어두운 집안을 밝히는 가운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얼굴이 담긴 액자와 <피아니스트>의 포스터가 부조화스럽게 붙어 있다. “스필버그는 극장에서 돈내고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네케 사진은 지갑에 넣어서 다닐 정도고, 아! 김기영 감독의 영화도 너무 좋다.” 이 널뛰는 ‘테이스트’의 주인공은, 13년째 은단중독이라는 이 여자는,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하루 4갑이라는 이 골초감독은 “상업성이 본질적인 것을 침해하지 않는 한 언제라도 상업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다”며 “그러나 이 지독한 중독이 다른 데 꽂혀버리면 그땐 영화를 아예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앞엔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노인을 이용해 엽기적인 성행위를 벌이는 심각하게 야한 시나리오”를 비롯, 에로영화 트리트먼트도 수북이 쌓여 있고, 당장 <남이 먹을 때>의 2편인 <재수 없는 소녀>를 찍고 싶은 조바심도 목 끝까지 차 있다. 서늘한 시선, 기괴한 감성, 진실된 유머, 의외의 상업성으로 무장한 괴물 같은 감독 신재인. 이 재능있는 인간의 진실이, 그의 중독이 전진하는 발걸음을 따라 한국영화의 지형도에서 한번도 탐험되지 않은 처녀지는 지금 막 그 입구를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화들, 보셨나요?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소년 이준섭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인기도 없는 외톨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부터 샤프심, 지우개, 가래침으로 비빈 도시락, 분필, 노트 등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의 관심을 사기 시작한다. “야, 니네 반에도 이런 애 있냐?” “없어, 이런 애가 어딨어.” 그는 전교에서 유일한, 독창적이고, 신기한, 그리고 비위가 좋은 소년이다. 그런 이준섭이 한 소녀를 좋아한다. 소녀는 그에게 “너 나 좋아하지? 얼마나 좋아해? 많이 좋아해? 그럼 너 내 똥도 먹을 수 있어?”라고 묻는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소녀와 소녀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똥이 담긴 도시락을 앞에 두고 꿈을 꾼다. 소년은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확인시키고 전교생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연다. 해피엔드. 그러나 더욱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100년 만에 찾아온 가뭄으로 전 인류가 굶주려 있을 때 소년은 기차역 앞 노숙자들을 향해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눈을 뜨세요. 모든 게 여러분의 밥입니다!”라고 외친다. 구황(救荒)소년은 그렇게 지구를 구한다. 판타지가 깨지면 소년은 여전히 도시락 앞,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다. “그래도 나는 재능있는 소년. 소녀는 나를 사랑할 거야. 그래도 우린 행복할 거야….”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한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며 보호자에게 말한다. “수술 잘되었구요… 환자의 머릿속에는 제 진실을 넣었습니다.” 다급히 의사를 부르는 간호사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남자가 들어선 곳은 법정이다. 남자는 법정에서도 다음 장소인 교회에서도 “내 입에선 오로지 진실만이 콸콸 쏟아져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내 진실에 빠져 죽으리라”고 말하며 판사와 목사에게 대항한다. 그를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푸른 모니터와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은 이 이상한 이야기에 의문을 더할 뿐이다. 그러나 “내 입을 크게 열라”는 잠언의 말씀에 따라 남자가 입을 열자 그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결국 교회는 물속에 잠긴다. 목사는 물에 잠긴 채 말한다. “그동안 네 이야기 재미있었다. 나는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장면이 전환되면 이곳은 경찰서 고문실이다. 남자는 “네 입을 크게 열라”는 성경구절이 써 있는 깨진 거울 아래 수조에서 물고문을 당하고 있고, 목사와 판사로 등장했던 이들은 그에게 “물 좀 고만 먹고 이제 진실을 불라”고 강요하는 형사들이다.

▶ <천사를 본 소년>

외딴 고아원 ‘천사의 집’의 원장은 식비를 줄이기 위해 원생들에게 먹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성경의 구절을 들먹이며 아이들의 식욕을 유린하고 결국 고아원의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것을 도저히 못 참을 지경이 돼서야 식당에 가서 초코파이를 타서 침대 밑이나 화장실에서 회개하며 먹는다. 이들에게 가장 큰 벌은 남이 보는 데서 식사하는 일이다. 뚱뚱한 소년 성일은 원장의 교리를 가장 잘 따르는 아이지만 말라가는 친구들과 달리 풍만한 자신의 몸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식탐하는 돼지라는 오해를 산다. 결국 성일은 금식선언을 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금식에 실패한 어느 날, 성일은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날개로 가려주는 따뜻한 천사를 본다. 한편 아이들은 우연히 원장과 수위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아이들에게 원장과 수위의 식사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그들이 섹스를 나눈 것 같은 환상과 겹쳐지면서 끔찍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성일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장을 의심하던 갑수는 원장을 살해하고 시내로 탈출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갑수가 원장에게 반발하는 사이 오히려 성일이 고아원을 탈출하게 된다. 다음날 시내에서 눈을 뜬 성일, 그는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수치심도 모른 채 밥을 먹는 놀랍고 역겨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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