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최초의 산악영화 <빙우> 제작일지 [2]
2004-01-16
글 : 이영진

캐나다는 산도 높고, 벽도 높다

2002. 9

생각보다 벽이 높다. 여름에 귀국한 현지 프로듀서로부터 입국하려는 국내 제작진의 수를 줄이고, 필요하다면 현지 인력을 고용하라는 규정을 전해듣긴 했지만 캐나다를 방문해서 로케이션 매니저로부터 전해들은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감독을 포함 10명 내외의 인원에게만 워크 퍼밋(Work Permit)이 가능하다니. 할리우드에나 어울릴 법한 규정을 똑같이 적용하겠다는 캐나다쪽의 횡포에 분통을 터트려야 하나. 그러나 무엇보다 그럴 여유가 없다.

2002. 10

배우들은 자일 매듭이 손에 익은 듯하다. 오늘은 중앙대 안성캠퍼스 기숙사에서 김하늘이 대역없이 5층 높이의 기숙사를 오르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빙산이라면 모르지만 대역 쓰기 위해 롱숏으로 기숙사를 잡을 순 없다. 그걸 아는 듯 오후 내내 김하늘은 원통 잡고 창틀 밟고 계단없는 기숙사를 오르내린다. 스파이더 걸이 따로 없다. 드디어 밤 촬영이 시작됐다. 와이어를 등에 매달아놓긴 했는데 걱정이 된다. 시범 한번 보고서 잘 따라했던 걸 보면 안심도 된다. 순간, 김하늘이 아래로 떨어진다. 추락은 아니다. 실수로 와이어를 놓친 스탭이 잽싸게 걷어올린다. 다행히 벽에 부딪히진 않았다.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릴 뿐이다.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다. 짬이 날 때마다 김하늘은 모니터를 본다. 더이상 못하겠다, 면서도 모니터를 보고서 제 맘에 안 차면 다시 하겠다고 하는 성미다.

2002. 12

캐나다 이민국과의 본격적인 줄다리기는 두달째 지리하게 계속되고 있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 해도 ‘예, 알아서 모시겠습니다’라고 할수는 없다. 같이 작업했던 동료들을 떨구고 현지에서 부문별 오퍼레이터를 구해야 하는 것은 예산 등의 실리적인 차원에서도 물러설수 없는 부분이다. 애초에는 대부분의 젲작 스탭이 해외 로케이션에 참여하고, 캐나다 쪽으로부터는 통역, 현지 안내 등 촬영에 필요한 사항만 취하려 했었다. 그때의 주장을 고수할 수는 없지만 입국 스탭 수를 반 아래로는 줄일수 없다는 마지노선을 정하고서 캐나다 이민국쪽과 쇼부에 나선다.

2003. 2

국내 촬영 마지막날. 물을 끌어올려 만든 100m 높이의 인공 빙벽 중간에서 이성재와 류해진은 2시간째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스탭들의 무전기에서는 “우리를 매달아놓고 또 회의하냐”는 두 사람의 아우성이 번갈아 터져나온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과 달리 위에서는 아래가 까마득할 정도로 현기증이 인다고 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벽 틈에 비벼넣은 아이스 스크류가 언제 빠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한다고도 했다. 긴장을 풀 수야 없겠지만, 이들의 말투에는 여유가 배어 있다. 두 사람도 엄살부리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 촬영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영하 40도, 필름이 찢어진다

2003. 3. 4

가까스로 30명 규모의 국내 스탭들의 캐나다 입국이 가능해졌다. 감독을 포함한 선발대에 이어 한달 뒤 본팀이 합류했다. 첫 촬영은 알래스카 국경의 프레이져 캠프 일대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이날 필요한 세팅은 텐트 3개가 달랑이다. 당일 아침에 후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스노 모빌에 썰매를 달아 장비를 실어나를 수 있도록 눈길을 다지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많은 듯 하다. 현지 스탭들에 따르면, 이 정도 촬영을 위해서도 5일은 족히 필요하다고 한다. 간밤 내내 불어댄 강풍 때문에 지형이 변하기도 할정도라니.

2003. 3. 10

숙소에서 나온 시각이 새벽 6시. 촬영지 근처까지는 차로 2시간 거리다. 베이스 캠프를 차려놓은 데까지는 다시 스노 모빌로 타고 20분을 가야 한다. 스노 모빌이 무슨 봉고도 아니고. 많이 타야 1대에 2명이다. 이동하는 데만 족히 4시간은 걸리는 듯하다. 한국과 달리 여기서는 간식 시간이 따로 있다. 한국 스탭들에겐 주식이라 할 만한 양의 샌드위치, 치킨 등이 나온다. 우리 스탭들은 첫 촬영부터 간식을 주식 삼고, 정작 현지 스탭들이 요리를 먹을 때는 사발면으로 때운다. 그리고선 어서 촬영하자고 재촉한다. 캐나다 스탭들이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는 동안 일부 스탭들은 스노 모빌로 경계 넘어 알래스카쪽 땅을 밟고 오더니 “나 미국 다녀왔다”며 자랑한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슛을 부른다. 초반부에 원정대가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장난치는 장면이다. 얼마 되지 않아 카메라 배터리가 멈춰선다. 이곳은 영하 20, 30도가 기본이다. 햇살도 무용이다. 단단히 맘먹고 왔지만 소용없다. 비교적 따뜻한 곳에 보관했던 배터리로 교환한다. 혹한은 이번엔 모니터를 망가뜨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해야 한다. 모니터 대신 육안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다행인 건 현지 스탭들과 큰 불화가 없다는 점이다. 얼굴을 동여맨 스탭들은 서로를 익히기 위해서 다들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다만 세팅 때와 달리 노출이 달라지다보니 아무래도 윤홍식 기사님이 애를 먹는 듯하다.

2003. 3. 11

추위에 대한 워밍업이 다들 안 되어 있다. 밤 촬영이 잡혀 있는데 오후에 숙소를 떠나기 1시간 전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현지 로케이션 매니저가 혹한에 눈사태 위험이 있으니 오늘 촬영은 어렵지 않겠느냐며 호들갑이다. 영하 40도 이하의 강추위를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날 분량을 찍지 못하면 예산상으로서는 큰 부담이다. 이라크 침공으로 마침 환율까지 대폭 뛰었다. 결국 소수 정예 인원으로 팀을 꾸린다. 영하 40∼50도의 추위는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이 불가능하다. 스탭들이야 에스키모가 신는다는 고무 방한화라도 꼈지만 배우들은 등산화뿐이다. 송승헌은 깔창에 핫팩까지 붙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얼어붙었다고 울상이다. 슛 가기 전까지라도 바꿔 신겨주고 싶지만 정승권 선생이 그러면 열을 더 뺏긴다고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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