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최초의 산악영화 <빙우> 제작일지 [3]
2004-01-16
글 : 이영진

절벽에 매달린 카메라, 눈속에 파묻힌 배우

2003. 3. 13

(김)하늘이 캐나다에 와서 첫 촬영에 임한 날, 어찌된 일인지 하늘이 도와주질 않는다. 카메라가 얼어버리는 바람에 촬영을 접어야 했다. 돌려봤자 카메라는 뻑뻑할 뿐이고 애꿎은 필름만 찢어질 뿐이다. (김)하늘이 분량만 치면, 이제 무어 크릭 절벽으로 넘어간다. 그동안 다들 귀 동상이 한번씩은 걸린 듯하다. 슬슬 향수병도 도지기 시작할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 신자가 하나둘 늘어났다는 거다. 독실한 이성재씨의 전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어찌된 일일까. 알아보니 근교 한국인 목사가 세운 교회에서 스탭들에게 한국 음식을 예배 뒤에 차려준다는 것이다. 오는 일요일은 보지 않아도 교회로 향하는 셔틀버스 정류장에 줄 서 있는 우리 스탭들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배고픔과 향수에 성경책을 끼고서 한시적으로나마 주님의 아들, 딸들이 되기로 한 이들을 누가 손가락질할 것인가.

2003. 3. 17

윤홍식 기사님이 드디어 떴다. 그동안 안전요원들이 거긴 위험해서 안 된다, 고 제지한 탓에 몸이 근질근질 했을 것이다. 안전요원들도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아니다. 결국, 정승권 선생이 윤 기사님을 뒤에서 부축하기 위한 요원으로 나서기로 했다. 90도에 가까운 절벽에서 5kg에 달하는 카메라를 들고 서 있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낙석 위험 때문에 먼저 안전요원들이 절벽 청소(?)에 나선 다음 두분이 절벽에 오른다. 대략 아래로부터 25m 높이. 카메라 또한 흔들리지 않도록 2중 3중으로 고정해뒀다. 한편, 언덕배기에서 눈썰매를 타는 배우들을 발견한 안전요원들이 말리려고 뛰어간다. 쌀 부대 비슷한 비닐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일이다.

2003. 3. 21

배우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맘에 걸린다. 특히 이성재씨에게 미안하다. 실제 발은 눈 속에 파묻은 상태로 가짜 다리를 내놓고 있는 장면을 찍다가 잠시 컷.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분장이 안 되면 그냥 눈으로 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숨도 들이키지 못하고 얼굴에 가해지는 차가움이라니. 오후 들어서 강풍이 더욱 거세지고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라 마음만 앞서고. 데이 포 나잇으로 찍었던 엔딩장면에서도 이성재씨는 눈고문을 당해야 했다. 테이크가 서너번 가는데도 그냥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얼굴색이 검은 빛이 돌 때까지. OK사인이 난 다음 스탭들은 박수로 그를 격려했지만 그는 다만 보들보들 떠는 손가락을 내보였을 뿐이다.

2003. 3. 27

르웰린 빙하지대에서의 촬영은 모두 합하여 10명 이하로 결정됐다. 헬기 타고 20분을 날아야 하는 그곳은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안전요원들이 일일이 피켈로 찍어서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동선을 따라서만 이동이 가능할 정도란다. 여성은 감독을 제외하곤 모두 빠졌다. 아무런 방패막이 없는 이곳에 안전요원들은 어느새 눈으로 바람막이를 만들어놓았다. 그 안에서 스탭들이 점심을 해치우고 있는 사이 한 스탭이 바로 바깥에서 일(?)을 보다 감독에게 적발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하긴 스탭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안전요원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들과 떨어진 곳으로 혼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

고도 2000m에서 떨어진 2000만원짜리 렌즈

2003. 4. 9

캐나다 출국을 하루 앞두고 윤홍식 기사는 촬영부 조수들과 함께 몽타주로 쓸 배경을 찍기 위해 헬기에 올랐다. 줌 렌즈가 너무 길다보니 고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쪽에서 촬영부 퍼스트가 렌즈를 쥐고 있어야 했다.

고도가 2000m에 이르렀을 무렵, 촬영이 시작됐고 포커스를 맞추던 과정에서 그만 렌즈가 뚝 떨어졌다. 시가 2천만원짜리 렌즈가 설원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촬영분량을 찍지 못하겠구나 걱정하는 윤 기사에게 조종사는 렌즈가 뒷프로펠러에 걸렸더라면 목숨이 공중분해됐을 것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행인 것은 헬기가 이동하는 경로가 일정하다는 것. 8명이 일렬로 서서 수색 끝에 그 광대한 설원에서 4시간 만에 파손된 렌즈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누군가가 무전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날은 아이스하키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어떻게든 경기 중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캐나다 스탭들이 총동원된 끝에 무전기도 얼마 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달 뒤. 캐나다를 다녀온 <빙우> 팀은 수원 방송사 세트에서 추락장면을 담는 암벽 실내장면을 촬영했다. 당시 메이킹을 보면 큰 고비 넘긴 듯한 안도감이 얼굴 가득이다. 김하늘은 오버행(90도 이상의 암벽 등반)을 기어코 해냈고, 며칠 뒤 초반 조난장면을 찍느라 다시 자일을 맨 송승헌과 이성재 또한 촬영이 끝나자마자 웃옷을 벗어젖히고서 한 스탭을 타박하기까지 한다. “산악반이었다면서 어째 영 자일 매는 게 허술한데…”라고. 그리고 또 8개월이 흘렀다. 그들을 포함, 제작진은 뒤늦게(?) 지난 2년여 동안 흘렸던 ‘빙우’를 관객 앞에 내놓고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