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고딩 잔혹사
유하와 김성수, 언뜻 보기에 잘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명의 영화감독은 사실 2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우정을 쌓아온 친구 사이다. 세종대 영문과 81학번 동기생인 둘은, 역시 동기생인 <흥부네 박 터졌네> <아줌마> 등의 안판석 PD와 함께 대학 시절 ‘반영화’라는 동인을 만들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유하가 1993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대실패 이후 거의 10년 만에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영화계에 돌아오는 데도 김성수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두 감독이 유하 감독의 신작 <말죽거리 잔혹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이야기는 혹여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수도 있었지만, 김성수 감독은 친구에 대한 진심어린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하 감독 또한 그런 비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스크린 밖으로 빠져나와 20여년 전 그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향했고, 이내 추억의 향기가 자리를 가득 채웠다. 특히 두 감독 모두 고등학생 시절,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교실보다는 뒷골목을 자주 찾았고, 국민교육헌장보다는 이소룡 영화의 대사를 더 잘 외웠던 탓에 ‘전문용어’들도 수시로 튀어나왔다. 유하 감독과 김성수 감독이 친구이자 동세대로서 나눈 영화 안과 밖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성수 | 너 영화 잘 만들었더라. 깜찍해. (일동 웃음) <씨네21>에서 나보고 너를 만나달라고 하면서 너무 우호적으로 진행하지 말아달라 그러더라고. 그런데 그건 우리 관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지. 왜냐하면 친구는 친구를 잘 인정하지 않거든. (웃음)
유하 | 아, 한국의 대표적 액션영화 감독 앞에서 민망하더라고….
김성수 | 야, 액션 죽이더라. 나는 혹시, 네가 이 영화를 찍으면 액션에 대해서 나한테 뭘 물어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안 물어보더라고. (웃음) 영화를 보고서 아, 이렇게 찍으려고 그랬구나, 했지. 보니까 다큐멘터리를 찍었던데. (웃음) 사실적이더라고.
유하 | 옛날에 싸우던 게 다 생각이 나가지고….
김성수 | 지금의 젊은 배우들을 데리고 어떻게 그 옛날의 디테일과 말투를 재현해냈는지 모르겠더라.
유하 | 나도 처음엔 막막했지. 애들이 전혀 몰라. 걔들한텐 사극이잖아, 사극. (웃음) 사실 제일 걱정했던 게, 너 같은 친구들이 보고 “아, 그거 옛날에 그거 아니잖아” 그러는 거였어. 그럼 문제잖아.
김성수 | 나 같은 친구들이라니. 나는 교회, 도서관, 학교밖에 몰랐어. (웃음) 근데 디테일이 진짜 대단하던데 왜 그렇게들 안 웃는 거야. 시사회장에서 나만 웃었어. 내가 하도 웃으니까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째려보더라고. 나한테는 이 영화가 타임머신이야. 어느 순간 영화 속에 확 들어가버리더라고. 애들이 하는 동작이나 말투나 제스처가 그때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니까. 사실 그게 재현이 잘 안 되잖아. 영화들이 70, 80년대로 복귀해도 순도나 함량이 모자란데 이건 거의 퍼펙트하더라고. 78번 버스, 한남동. 야아, 그거는 진짜…. 그런 디테일들은 어떻게 복원시킨 거야?
유하 | 나는 기억력이 특별히 좋잖아. 다 기억으로 한 거지. 요즘 애들이 어떻게 알겠어. 나이트클럽 같은 건 너랑 얘기도 했고.
김성수 | 나이트클럽이라니? 난 아까도 말했지만, 교회,도서관만…. (웃음)
유하 | 허, 솔직하게 좀 드러내.
김성수 | 초반에만 놀았어, 초반에만. 2학년 초까지.
유하 | 사실, 배우들 데리고 리허설을 많이 했어. 거의 보름 정도. 일단 내가 옛날 얘기를 많이 해주고, 말투나 억양도 알려줬지. 자료 테이프도 보여주고. 사실 70년대를 만들기가 참 애매한 게, 자료가 없어. 미술작업 하기도 힘들고. 근데 그 시대에 관해 아는 사람이 현장에 나밖에 없는 거야. 진짜 힘들더라.
학교는 남자 마초를 키우는 곳
김성수 | 이 영화 안에 네 모습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더군.
유하 | 현수란 캐릭터에 내가 어느 정도 투영된 건 사실이야. “선방(선제주먹)을 날려라”라는 우식이 대사 있잖아. 그 캐릭터의 실제 모델이 된 친구가 영동중학교 시절 친구였어. 내가 전농중학교에서 전학을 딱 갔는데 반에 앉아 있는 애들이 다 시커먼 어른인 거야. 그중 한명이 우식이의 모델이 된 건데 그 친구가 싸움을 굉장히 잘했어. 한번은 내가 어떤 애한테 맞으니까 그 친구가 와서 그러더라고. “왜 그렇게 덩치 큰 놈이 맞냐, 선방을 날려라. 애들 싸움은 먼저 날리는 놈이 이긴다”라고. 그런데 넌 싸움 잘했잖아. 대학교 1학년 문무대 갔을 때 한양대 체육과 애들이랑 붙어서 1 대 8로도 싸우고.
김성수 | 뒈지게 맞았지. (웃음)
유하 | 우리 때의 중·고등학교 교육이라는 건, ‘남자’, ‘마초’ 이런 걸 키워내는 거야. 난 덩치에 맞지 않게 시도 쓰고, 라디오 방송에 엽서 보내고, 집에서 우표 수집하고, 이러던 여성적인 사람인데 학교가 나를 내버려두지 않더라고. 그래서 나도 선방을 날리기 시작한 거지. 고등학교 들어가서 실제로 문제아가 됐고. 정학도 두번씩이나 맞고. 우리 교육이 여성성을 내버려두지 않아. 그래서 만들게 됐어, 이 영화를.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 인물에 다 투영돼 있지. 성수 같은 애들도 그렇고. 네가 나랑 굉장히 다르지. 마초적이고. (웃음)
김성수 | 이 새끼가…. (웃음)
유하 | 아, 그거 있다. 우식이가 <사망유희> 흉내내는 장면(영화 속에서 우식이 반 친구들이 자신을 둘러싸게 하고서는 하나씩 해치우면서 이소룡을 흉내내던 장면). 니가 중학교 때 그랬댔잖아. 지가 이소룡이고 다른 애들은 사무라이야. (웃음)
김성수 | 네가 말한 그 당시 풍경 때문에 남자들은 다 힘으로 순위가 매겨졌지. 사회에 나가서 사람 구실 할 애들, 공부 잘하고 배경 좋은 그런 애들과 그렇지 않은 애들에 대한 구분이 정말 명료했어. 어떻게 아느냐. 선생이 다르게 대하는 게 너무 명확하거든. 공부 못하고 집안 안 좋고, 어리버리한 애들한테는 ‘비인간적으로 대한다’는 말조차 인간적으로 묶일 만큼 그렇게 심하게 애들을 함부로 대했던 거 같아. 그러니까 저항감이 생기지. 근데 문제는 그런 저항감이 똑같이 폭력의 서열로 매겨지고 제압됐었다는 거야. 심지어 공부를 좀 하는 애들도 반 안에서 벌어지는 남자들의 세계에 편입 안 할 수가 없었다고. 수업시간말고는 완전히 동물의 왕국이지 뭐.